365일 한시-왕창령王昌齡 변방을 나서며 1出塞 其一

변방을 나서며1出塞 其一/당唐 왕창령王昌齡

秦時明月漢時關 진나라 때의 밝은 달 한나라 때의 관문
萬里長征人未還 만 리 장정에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但使龍城飛將在 다만 용성의 비장 같은 장수만 있다면
不教胡馬度陰山 호마가 음산을 넘어오지 못하게 할 텐데

최고의 변새시(邊塞詩)로 꼽히는 왕창령(王昌齡, 698~757)의 작품이다. 호기로운 기세가 있으면서도 비장미가 있고 지명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서정이 잘 결합되어 있다. 본래 동일 제목에 두 수로 되어 있는데 이 시가 유독 알려져 있다. 명나라 때 고문가 이반룡(李攀龍)은 이 시를 당시의 절구 중 최고로 평가하였는데 이반룡을 좋아한 조선의 윤근수(尹根壽) 역시 이 시를 고금 최고의 절창이라고 평가하였다. 《당시배항방》에는 25위에 올라있다.

진나라도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나라 때도 변방의 달은 떠 있었으니 진나라는 달을 말하고 한나라는 관을 말하였지만 결국 진나라와 한나라의 달과 관을 다 말한 것이 된다. 이러한 표현을 호문(互文)이라 한다. 한 구 내에 대구를 이루게 하여 언어의 조형미와 리듬감을 주기 때문에 한문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많은데 한시에서도 종종 나온다.

변방의 성벽 요충지와 통행로에 설치한 관문에는 지키는 군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달빛이 쏟아지는 처연한 모습을 드러내고는 이어 그곳 관문을 나가 전장으로 출정한 병사들 중에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마디로 요약하여 많은사람들이 북방의 전장에서 죽어 간 것을 비장하게 말하였다. 실제로 중국은 고래로 북방 민족에게 수세적인 위치에 놓여 많은 대군이 몰살된 일이 빈번하였기에 왕창령이 이런 과감한 표현을 사용해도 전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용성(龍城)은 고대에 흉노족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부족들과 회의를 하던 곳인데 한나라 때 위청(衛靑)이 함락한 일이 있다. 비장군은 이광(李廣)을 말하는데 농서, 북지, 안문, 운중 등 북쪽 변방에 오래 주둔하고 또 흉노를 토벌할 때 매우 용맹하여 흉노족에게 ‘전장을 날아다니는 장군’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용성은 위청과 연결되고 이광은 비장군과 연결되어 다소 의미 맥락이 뜨게 된다.

여기 용성을 노룡성(盧龍城)으로 보면 문제가 해결된다. 바로 이광이 주둔했던 우북평군(右北平郡)으로 지금의 하북성 희봉구(喜峰口) 부근 일대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용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다만 시의 문맥적 의미가 ‘용성에 이광 같은 뛰어난 용맹과 지략을 갖춘 장군만 있다면’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음산(陰山)은 지금 내몽골에 있는데 흉노와 중국을 가르는 북방의 큰 산맥을 말한다.

이 시는 시상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워 한 호흡으로 쭉 뽑은 작품처럼 보인다. 이는 시인이 그만큼 시를 치밀하게 직조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병졸이 의미 없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이광 같은 훌륭한 장수가 있어야 한다는 애국적인 뜻도 있고 시의 기세와 비장미가 함께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왕지환(王之渙)의 양주사(涼州詞)가 굴곡이 좋다면 이 시는 기세가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두 편은 변새시의 쌍벽이자 걸작이다.

왕창령은 지금 산서성 태원(太原) 사람으로 당 현종 시기에 주로 활동했는데 시를 매우 치밀하고 청신하게 써서 당시 사람들이 ‘시가부자 왕 강녕(詩家夫子王江寧)’이라고 불렀다. ‘시가부자’는 시가 방면의 선생님이라는 말이고 왕 강녕은 왕창령이 강녕 령을 하였기 때문에 성 뒤에 관직을 붙여 왕창령을 높여 부른 것이다. 그는 성품이 호탕하고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주변에서 비방이 일어 두 번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왕창령은 오늘 소개한 변새시 외에 규원시(閨怨詩)와 송별시(送別詩) 분야에도 탁월한 작품을 남겼다.

옥문관, 사진 조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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