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초공선생전耿楚倥先生傳>[1]
선생의 이름은 정리(定理), 자(字)는 자용(子庸), 별호가 초공(楚倥)이다. 모든 학사(學士)들이 일컫는 이른바 팔선생(八先生)이 바로 이 분이다. 학사들은 모두 팔선생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선생 본인은 처음부터 그 팔선생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을 <초공선생전>(楚倥先生傳)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傳)이란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애초에 무언가 남에게 전하여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전’을 써서 후세에 전하려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선생은 애초에 무언가 남에게 전하여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선생을 위하여 ‘전’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덕이 있었지만 빛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덕을 빛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능은 있으되 관직이 없었으니, 이는 그 재능으로 관직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을 빛내지 않았으니, 이는 큰 덕을 이룬 것이요, 재능을 쓰지 않았으니, 비로소 ‘진재’(眞才)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남들이 어떻게 선생의 ‘전’을 쓸 수 있겠는가?
또한 선생은 시종일관 도를 배우는 것에 힘을 쏟았다. 비록 도를 배웠어도, 사람들은 그가 도를 배웠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그러므로 종일토록 그는 입으로 도를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만나보면 도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이른바 옷을 빨지 않아도 항상 윤기가 흐르는 격이었다.
장순부[2]가 내게 말했다.
“초공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처음에 방담일[3]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담일이 본래 학문이란 무엇인지 몰랐고 헛된 명성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태호(太湖) 등할거(鄧豁渠)에게서 일체평실(一切平實)의 뜻을 깨달아, 보고 들은 것을 거두어들여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고, 하심은(何心隱)에게서 “칠흑(漆黑)으로 들어가는 것은 문이나 입구가 없다”[黑漆無入無門][4]는 뜻을 얻어, 이에 비로소 충분히 스스로 만족하여 깊이 믿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세상 사람들 중 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종신토록 남들과 담론하지 않고 그저 나의 형 천대선생(天臺先生)과 집안에서 강론을 나누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결국 천대(天臺)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천대 역시 스스로 ‘나의 학문에 비록 여러 인연이 있기는 하지만 나의 여덟째 아우의 힘을 입은 것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초공선생이 일찍이 천대에게 ‘《대학》․《중용》․《논어》․《맹자》 등이 똑같이 배움을 논한 책이긴 하지만, 어떤 말이 가장 요긴한지 아직 밝게 깨닫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천대는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경지[聖人人倫之至][5]라는 한 마디가 가장 요긴하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선생은 그래도 미발지중(未發之中)[6]이란 한 마디만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시 위의 말을 듣고 초공이 너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륜의 지극한 경지가 미발지중(未發之中)인데, 미발지중(未發之中)을 모르고 또한 어떻게 인륜의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도(道)는 중(中)에 도달하면 지극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지극한 것이다’[中庸其至矣乎][7]라고 했고, 또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 지극하다’[無聲無臭至矣][8]라고 했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에 초공은 남경(南京)에 갔다. 당시 나는 무지몽매한 주제에 담론을 좋아했었다. 선생께서는 묵묵히 말이 없으시더니, 그저 내게 물으셨다. “학문은 자기 스스로 믿는 것[自信]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이것을 믿을 수 없다’[吾斯之未能信][9]고 말했다. 또한 학문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自是]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또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요순(堯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自以爲是, 不可與入堯舜之道][10]고 말했다. 스스로 믿는 것[自信]과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自是]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오.”
나는 그때 급히 대답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아도 역시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초공은 마침내 크게 웃고 떠났었다. 아마 내가 결국 도(道)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매우 기뻐한 듯했다. 나는 그 후로 줄곧 초공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또한 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정축년(丁丑年, 1577년)에 전(滇, 雲南)으로 가는 길에 단풍(團風)을 지나다가, 결국 배에서 내려 강가로 올라서서 곧장 황안(黃安)으로 가서 초공을 만나고, 아울러 천대를 만났다. 그러자 관직을 버리고 머무를 생각이 생겼다. 초공은 내가 시무룩해 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 다시 돌아오라고 내게 권하였다.
나는 이에 딸과 사위 장순부를 황안에 머물게 하고, 약속했다. “만 3년 동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정 4품에 올라, 그동안의 봉록을 모아서 이곳에 돌아와 자고 먹는 계산을 할테니, 그러면 선생과 함께 이 강가에 오르며 지낼 수 있겠지요.” 초공은 나의 말을 단단히 기억하고, 사위 순부가 도를 배우는 것을 매우 열성으로 가르치고 훈계했다. 천대선생 역시 내 딸과 사위를 자기 딸과 사위처럼 보살펴주셨다.
아아! 내가 감히 하루라도 천대의 은혜를 잊을 수 있으랴! 3년이 지나, 약속대로 나는 과연 돌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함께 모인지 몇 년 못되어, 천대는 조정의 부름을 받았고, 초공 역시 마침내 천명을 마쳤다. 나는 슬픈 나날을 보내며 즐거움이란 없었다.
천대선생은 끝까지 ‘인륜지지’(人倫之至) 한 마디를 마음속에 굳게 지켜, 내게 혹시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는 병폐가 있지나 않을까 때때로 염려했고, 나는 또 나대로 ‘미발지중’(未發之中) 한 마디를 굳게 지켜, 천대가 혹시 만물의 시초를 고찰하지 않고 ‘윤물’(倫物)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을까봐 염려했다. 그러므로 변론이 오가서 쉴 틈이 없다가, 마침내 서로를 거절하게 되어 줄곧 오늘에 이른 것일 뿐이다.
이제 다행히도 하늘이 내 마음에 깨우침을 주어, 나로 하여금 ‘미발지중’(未發之中)에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천대 역시 결국 문득 ‘인륜지지’(人倫之至)를 잊었다. 이로써 학문의 길에서 둘이 서로 (자기의 견해나 주장을) 버리면 둘이 서로 따르고, 둘이 서로 (자기의 견해나 주장을) 고집하면 둘이 서로 병폐에 빠지는 것이 원래 당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이 버리면 둘 다 잊어버리는 것이요, 둘 다 잊어버리면 혼연일체가 되어, 더 이상 일삼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늙은 몸을 마다않고 추위를 무릅쓰고 곧장 황안으로 가서, 산에서 천대를 만났다. 천대는 내가 왔다는 말만 듣고도 역시 결국 미친 듯이 기뻐했다. 뜻이 같고 도가 일치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러나 만약 초공선생이 계셨다면, 단 반 마디 말로 논쟁이 끝나게 하고 단 한 마디 말로 국면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을 것이니, 또한 어찌 내가 10여 년 동안 고통스럽게 피차 변하지 못한 연후에 깨닫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셨겠는가? 만약 10년이 못되어 끝내 내가 죽었다면, 나는 끝내 변하지 않았을 것이요, 나는 끝내 천대와 화합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날 초공선생의 아들 여념(汝念)과 함께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했는데, 선생 묘역의 나무는 벌써 한 아름이나 자랐다. 한 번 간 사람은 무덤에서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것이 나는 통한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특별히 이 전기를 쓰니, 세 부를 써서 준다. 첫번째는 천대에게 바치는 것이니, 나의 기쁨을 담은 것이다. 두번째는 여념(汝念)․여사(汝思)[11]에게 바치는 것이니, 선생의 묘소에 고하고 태우게 할 것으로서, 나의 통한을 담은 것이다. 세번째는 특히 서울의 경자건(耿子健)[12]에게 부치는 것으로, 기뻐하면서도 한스러워하고 한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나의 심정을 담은 것이다. 자건은 형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나에게 이르렀으니, 그 사랑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기를 지어서 나의 뜻을 전하고 선생에게 고한다.
<주사경[13]의 발문(跋文)>
나는 어렸을 때 병이 많아, 양생의 문제에 집착했지만 별 방법이 없었는데, 초공 형의 소개로 경천대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선생은 비록 나의 학문이 불가와 도가 두 가지에 푹 빠졌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나를 마치 아들처럼 사랑해주셨다. 계속 경선생 댁을 왕래하다가 이탁오선생과 어울리게 되었으며, 마음으로부터 절실히 스승으로 섬겼다.
두 선생은 서로 도(道)에 대해 논란을 벌이며, 지금까지 10여 년을 이어왔다. 나는 그 사이에 있으면서 한 마디도 참여할 수 없었다. 입에 쓰디쓴 황얼(黃蘖)을 머금고 있어 (내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판인데), 사람들 논쟁에 참여할 기운이 있었겠는가? 그저 초공 형께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사흘 전 초공의 장남 여념의 편지를 받았다. 여념은 장순부를 전송하며 구강부(九江府, 지금의 江西省)까지 왔다가, 특별히 인편을 물색하여 남경(南京)에 편지를 보내, ‘두 분 선생께서 이제 머리를 맞대고 말씀하시는데 아주 즐겁게 뜻이 맞는다’라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또 사흘이 지나 12월 29일이니, 오늘은 내 생일이다. 탁오선생이 지어 보내준 <초공선생전>을 받았는데, 두 선생께서 뜻이 맞게 된 본말을 자세히 적으셨다. 나는 읽으면서 불현듯 눈물이 흐르며 ‘두 분 선생께서 더욱 커지고 화합하시고, 마침 오늘 날짜로 소식을 접하니, 이 어찌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 아니리오! 아니면 초공선생께서 다시 태어나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를 직접 써서 판각에 들어갔다. 판이 완성되어 여념과 나의 사위 여사(汝思)에게 맡긴다.(권4)
[1] 경초공은 경자용의 호이다. 자세한 행적은 <이온릉전> 주12 참조.
[2] 장순부(莊純夫)는 이지의 사위이다. 이지는 부인 황씨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었는데, 장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했다. 장순부는 장녀의 남편이다.
[3] 방일린(方一麟)의 호가 담일(湛一)이다. 뒤에 이름을 방여시(方與時)로 고쳤다. 이지 역시 <초약후에게>(寄焦弱侯, 《속분서》 권1)에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한 내용이 있다. 《명유학안》(明儒學案) 권32 <태주학안서>(泰州學案序)에 그에 대한 전기가 보인다.
[4] 흑칠(黑漆), 즉 칠흑(漆黑)은 원래 암우몽매(暗愚蒙昧)하여 분별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선가(禪家)의 입장에서는 부동청정(不動淸淨)의 경지나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의식적으로 선(禪)을 탐하는 것이므로 이것조차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기서 칠흑은 모든 지혜의 빛을 머금어, 명(明)도 아니요, 무명(無明)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부지(不智)도 아닌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6] 《중용》 참조. 앞에 나온 말(성인인륜지지)은 올바른 인간 사회 질서의 전형으로서 성인을 상정하고 있는 반면에, 여기에 나온 미발지중(미잘지중)은 그러한 인륜을 체현하고 있는 성인 내면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희․노․애․락 등의 감정이 아직 생기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어디에도 기울지 않고 지나치고 모자람도 없는 중(中)의 상태이고, 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성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인륜’과 ‘미발지중’은 각각 외면적 도덕행위를 통한 수양과 내면 심성의 마음 공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중 무엇을 더 중시하는가에 따라 노선의 대립이 생기기도 한다.
[10] 《맹자》 <진심하>(盡心下) 참조.
[11] 경초공의 차남일 것이다. 이 글의 발문을 쓴 주사경(周思敬)의 사위이다. 발문 참조.
[12] 경씨 네 형제 중 셋째 경정력(耿定力)의 자로, 호는 숙대(叔臺)이다.
[13] 주사경(周思敬)의 호는 우산(友山)이다. 호북(湖北) 마성(麻城) 사람으로, 이지의 글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다. 형 주사구(周思久, 호는 柳塘)과 더불어 이지와 가장 교분이 깊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