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소녀 허쯔전의 비극적인 삶
다음 날 아침 천구이밍 선생과 함께 허쯔전을 찾아갔다. 답사를 시작한 지 벌써 7일째였다. 융신현 시내에 있는 허쯔전 기념관은 그나마 그녀의 불행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기념관 앞에 허쯔전이 마오쩌둥과 함께 서 있는 석상이 있다. 융신에서 징강산으로 가는 중간의 황주령黃竹嶺이란 산골에 허쯔전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이곳은 국가에서 복원해준 것이 아니라 홍콩의 한 사업가가 사비를 들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허쯔전의 조카뻘 되는 노인 한 분이 근처에 살면서 집을 관리하고 있었다.
혁명 동지를 세 번째 아내로 맞다
허쯔전 기념관에서 그녀의 불행한 일생을 다시 한 번 읽어나갔다. 허쯔전은 장시성 융신현 출신으로 가족이 모두 혁명에 투신했다. 열네 살에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열다섯 살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오빠와 함께 융신의 무장봉기에 참가했다가 징강산으로 피신했다. 얼마 후에 마오쩌둥이 추수봉기에 실패하고 잔여 부대를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왔다. 허쯔전은 마오쩌둥의 통역 겸 비서 업무를 맡았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8년 5월 징강산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한 혼례를 치르고 살림을 차렸다. 훗날 허쯔전의 바로 아래 여동생 허이賀怡가 마오쩌둥의 친동생 마오쩌탄과 결혼하면서 두 집안은 겹사돈을 맺었다.
마오쩌둥이 징강산을 시작으로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해가는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소비에트를 하나씩 건설하던 시절, 허쯔전은 그의 가장 열성적인 동반자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에 대항하여 난창봉기와 추수봉기를 일으켜 무장투쟁으로 맞섰지만 맥없이 무너졌다.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 사회의 특성에 맞춰 농민운동, 농민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마오쩌둥은 농촌으로 들어가 토지혁명을 전개하면서 혁명 근거지를 조금씩 개척해나갔다. 무장투쟁에서는 우호적인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치고 빠지는 영리한 유격전을 펼쳤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에서 장제스에게 가혹하게 탄압당한 공산당이 곳곳에서 회생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각지의 혁명 근거지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하자 혁명 근거지, 즉 소비에트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집행위원회(행정부에 해당)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하이에 있던 중국 공산당 중앙은 왕밍王明을 중심으로 좌경 모험주의로 흘렀고, 당 중앙에 비해 현실적이고 신중한 노선을 견지하던 마오쩌둥은 우경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며 정치적 견제를 받았다. 게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건강도 나빠졌다.
마오쩌둥이 병으로 고생하고 정치적으로 휘청거릴 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세 번째 부인이자 동지였던 허쯔전이다. 마오쩌둥이 겪었던 정치적 시련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장정을 시작할 때 마오쩌둥이 정치적 왕따 신세로 전락한 곡절은 이러했다.
마오쩌둥이 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제1차 전국소비에트 대표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1931년 11월 1일, 공산당 중앙이 제1차 중앙소비에트 당대표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전국소비에트 대표대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던 마오쩌둥은 당대표대회에서 느닷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혁명은 교과서에 따르는 것本本主義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협소한 경험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토지혁명을 하면서 지주에게 구량지口糧地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땅을 남겨준 것도 부농노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장제스 반대 세력과의 연대를 주장한 것 역시 우경 기회주의로 몰렸다. 그러면서 소비에트 대표대회 준비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마오쩌둥을 공산당 중앙국 대리비서직과 홍군 제1방면군 총전선위원회 서기직에서 해임했다.
마오쩌둥이 잘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27년 9월 추수봉기에서 공산당 중앙의 승인을 받지 않고 임의로 행동했다는 이유로 중앙정치국에서 제명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난창봉기와 추수봉기의 연이은 실패와 혼란 속에서 마오쩌둥이 징강산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제명 처분이 전달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되었을 뿐이다.
창당 이후 상하이 조계에 머무르고 있던 공산당 중앙은 장시성 남부 중앙소비에트의 유력자 마오쩌둥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다. 당 중앙은 1932년 장제스의 토벌전에 대항하여 장시성에서 몇 번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이를 과신하여 난창 같은 대도시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여 조속히 점령하라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국부군과 전면전을 벌이라는 것이었다. 마오쩌둥과 주더朱德의 유격전술에 반하여, 이러한 좌경 모험주의를 진공進攻 노선 또는 왕밍 노선이라 한다. 마오쩌둥을 견제하는 핵심 근거는 당 중앙의 왕밍 노선에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1932년 10월 닝두寧都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통치력이 약한 곳을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도시를 조속히 탈취하라는 당 중앙의 방침에 대한 사보타지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일시 회복했던 제1방면군 총정치위원직에서 또다시 해임되었고, 임시정부에서도 후방업무만 주어졌다.
허쯔전의 끝없는 시련
더 큰 변화가 밀려왔다. 보구, 장원톈張聞天(일명 뤄푸洛甫), 천윈陳雲 등 상하이에 있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인사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933년 초 루이진으로 옮겨온 것이다. 중앙소비에트로 내려온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최고 책임자는 스물다섯 살의 혈기방장한 보구였다. 그는 코민테른과 왕밍의 신임을 등에 업고 왕밍 노선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는 마오쩌둥의 유격전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푸젠-광둥-장시(閩粤贛)성 위원회 서기인 뤄밍羅明이 왕밍 노선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뤄밍과 유사한 성향을 가진 간부들을 ‘뤄밍 노선’으로 몰아세우며 숙청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내부의 노선 투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1934년 1월 22일 제2차 전국소비에트 공농병 대표대회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이번에도 중앙정부인 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름만 주석이지 아무런 실무 부서도 실질 권한도 없는 허수아비였다. 허쯔전은 마오쩌둥의 이런 정치적 시련기를 함께 견뎌준 동지였다. 마오쩌둥은 허쯔전의 위로와 내조를 받으며 시련을 견뎌나갔다.
그러나 대장정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의 시련이 허쯔전에게로 옮겨갔다. 허쯔전은 어린아이를 마오쩌탄 부부에게 맡기고 임신한 몸으로 대장정을 시작했다. 1935년 2월 대장정 행군 중에 구이저우성의 바이먀오촌白苗村이란 곳에서 딸을 출산했으나, 홍군의 대장정 규정에 따라 인근 주민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다. 낳자마자 생이별이었다. 허쯔전은 자신이 낳은 6명의 자식을 전부 혁명을 위해 떼어놓거나 생이별을 하거나 어려서 병사하는 불행을 감수해야 했다. 훗날 다시 만난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허쯔전은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부군의 폭격에 파편을 맞아 온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한 달 동안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만큼 극심한 고통이었다. 허쯔전의 남동생도 대장정에서 전사했다.
혁명의 동지에서 부부가 되었으나, 남편 마오쩌둥은 대장정이라는 지독한 고난이 끝나자 시련의 동반자 허쯔전을 멀리했다. 허쯔전이 지척에 있는데도 노골적으로 한눈을 팔았다. 옌안에서는 통역이자 무도 파트너였던 우리리吳莉莉에게, 그다음에는 상하이에서 찾아온 스물두살 연하의 미녀 배우 장칭에게 빠져들었다. 1937년 허쯔전을 병 치료를 이유로 모스크바로 보내고, 그다음 해 장칭과 결혼했다.
네 번째 부인 장칭은 양카이후이나 허쯔전 같은 혁명의 동지가 아니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자가 중국 최고의 미녀 배우를 취한 것이니 ‘권력의 여자’였을 뿐이다. 공산당 중앙 성원들은 처음에 마오쩌둥의 재혼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자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중앙 성원들이 우려한 대로 장칭은 나중에 혁명가가 아닌 권력자 마오쩌둥의 정치적 불쏘시개가 되어 4인방의 일원으로 문화혁명의 최전선에 나섰다. 마오쩌둥 사후에는 1976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91년 자살로 생을 끝맺었다.
남편의 배신을 감수해야 했던 허쯔전은 온몸의 병을 떼어내지 못한 채 옌안에서 마오쩌둥과 헤어진 지 22년이 지난 1959년 여름, 루산廬山의 마오쩌둥 거처에서 전 남편을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당시 광경이 또 처연하다.
허쯔전은 누구를 만나는지도 모르는 채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접견실로 들어오자 그를 알아본 허쯔전은 한참 동안 통곡했다. 그런 다음에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봐야 고작 한 시간 남짓이었고, 그 뒤 마오쩌둥을 다시 만난 것은 마오쩌둥 사망 3주년이 되던 1979년 베이징의 마오쩌둥 기념관에서였다. 허쯔전은 1984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허쯔전은 지금도 위대한 혁명투사로 불리지만, 한 여인으로서는 혁명과 권력, 전쟁과 사랑 속에 산산이 부서진 삶이었을 것이다.
허쯔전의 생가 앞에 허쯔전의 흉상이 있다. 상하이에서부터 답사 여정 내내 따라온 겨울비가 허쯔전을 적시고 있었다. 빗물이 허쯔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찾지 못한 자식들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일까. 아니면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슬퍼하는 눈물일까.
혁명은 인민의 밥그릇에서 시작한다
7일째 되던 날 허쯔전 기념관을 거쳐 드디어 혁명의 산채 징강산에 도착했다. 허쯔전 대신 울어주던 겨울비는 징강산에 이르자 아름다운 눈으로 변했다. 차도 양옆으로 눈이 쌓여갔지만 다행히 차가 다니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창밖으로 설경이 펼쳐지니 그야말로 서설이 아닌가 싶었다.
징강산에 도착하니 천구이밍 선생의 현지 지인들이 주차장까지 나와서 환영해주었다. 이들 역시 외국인의 대장정 답사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들의 소박한 환영 오찬 후에 징강산 혁명박물관으로 갔다. 징강산혁명박물관도 규모의 미학을 자랑했다.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이 크기와 규모로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전날 밤 우리가 어디 있는지 확인한 베이징의 이경석 사장이 징강산으로 날아와 합류했다. 이날 저녁에는 이경석 사장이 답사 여행을 격려하는 뜻으로 만찬을 열어주었다. 20년 가까이 중국에서 사업을 해왔지만 일반인들이 이런 장기 답사를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천 선생에 이어 이경석 사장까지 합해 6명이 되자 식탁은 더없이 풍성해졌다. 거기에 이경석 사장의 호의가 더해지니 느긋하게 호사를 누릴수 있었다.
이경석 사장과 답사 일행 세 사람, 중국인 둘이 자연스럽게 역사 토크를 이어갔다. 우리말과 중국어를 섞어가며 대장정에 관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누구는 양카이후이의 장렬한 희생을, 누구는 허쯔전의 인간적 비극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마오쩌둥의 ‘나쁜 놈’ 행적을 힐난했다.
“지주를 타도하여 호박을 먹자”는 소박하고도 절실한 홍군 전사들의 자연발생적 구호와 혁명박물관에 전시된 호박을 떠올리며 밥이 하늘이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호박을 먹자는 구호에서 황인성 교수는 혁명의 자생성과 토착성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하이의 와이탄에서 시작해 창사를 거쳐 추수 폭동의 현장을 거쳐 징강산에 이르는 답사 여정에서, 오늘의 중국과 당시 혁명의 흔적을 한꺼번에 둘러보았습니다. 오늘의 중국과 역사를 생각해보면 혁명은 수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역과 주민의 삶과 희망이 엮어내는 역사적인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추상적인 아이디어와 이론이 아니라, 현지 주민의 삶 속에 녹아서 재창조된 이론과 전략, 정책이 아니고서는 혁명이란 생명력을 갖기 힘들다는 사실을 대장정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이어졌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답사 여행은 승자의 기록을 살피게 되는 것이지만 패자의 그늘 속에 희생된 백성들에 대한 언급도 가슴을 울렸다. 홍군 전사들 중에 이념을 학습해서 전사가 된 경우도 있겠지만, 토지혁명에 의해 토지 소유라는 현실적 이익을 얻게 된 가족 가운데 누군가 홍군에 입대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시대의 격랑 속에 시기와 우연과 밥그릇이 홍군으로 쏠렸기 때문에 그들은 승자가 되었다. 국부군 병사들 역시 이념이 투철해서 입대했겠는가. 전장에서 똑같이 죽었으나 국부군의 패배라는 멍에로 인해 위령탑 하나 없으니 그들도 측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도 패자에 대한 위령탑 하나쯤은 생각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강원도 양구에 펀치볼이라는 지역이 있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우리도 희생이 많았지만 중공군의 희생은 더 컸다. 이제는 그런 전적지에 ‘이긴 우리 편’이 아닌, ‘상대방의 희생자’들을 위한 소박한 위령비 하나 세울 수는 없을까. 시진핑이 한국과 중국 공동의 상대인 일본을 겨냥하여 하얼빈역 역사 일부를 개조하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만들었다.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 펀치볼에서 죽어간 수많은 혼령들을 위해 위령비 하나 세우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한중 관계는 물론 남북 관계 회복에도 큰 의미가 있고, 중국 관광객을 위한 훌륭한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징강산의 밤이 깊어가고 새벽에는 눈발이 굵어졌다. 다음 날 아침 징강산의 설경 속에 눈을 떴다. 눈이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 징강산은 홍군 유적지가 많은 지역인데, 대부분 출입이 통제되었다는 전갈이 현지의 지인들로부터 날아들었다. 아쉽지만 혁명 유적은 접어두고 차량 통행이 허용된 가까운 징강산 설경을 찾아 나섰다. 징강산 주봉으로 가서 오를 수 있는 만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계곡이 깊어 적은 병력으로 도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펑펑 쏟아지는 설경 속에서 혁명이니 역사니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우리는 감성이 이끄는대로 탁 트인 공간으로 빠져나갔다.
징강산의 룽탄龍潭 폭포를 찾아갔다. 도보 통행을 허용할지 말지 망설이던 공원 관리자는 몇 번이나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나서야 문을열어주었다. 겨울철 비수기인 데다가 눈까지 내려 계곡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신선이 된 기분으로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지르며 두어 시간 가까이 설경 속을 걸었다. 룽탄 폭포는 장관이었다. 흰 눈과 초록 나뭇잎이 한데 어우러지고, 쏟아지는 폭포수 앞으로 춤추는 눈발은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징강산에 눈이 더 쌓이면 다음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조금 일찍 하산하여 루이진으로 갔다. 여행을 시작한 지 9일 만에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루이진은 중국 혁명의 홍색고도紅色故都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로 타격을 입고 추수봉기와 난창봉기가 실패하면서 위기에 처한 중국 공산당은 곳곳에서 혁명 근거지를 일구면서 서서히 회복했다.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장시성의 소비에트는 지역과 인구 면에서 규모가 가장 컸기 때문에 중앙소비에트로 불리기도 했다. 1931년 11월 7일부터 25일까지 제1차 전국소비에트 대표대회가 열리면서 루이진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중국 공산혁명에서 루이진을 묘사하는 한마디는 ‘인민공화국이 이곳에서 나왔다(人民共和國從這里走來)’는 것이다. 루이진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중앙혁명 근거지 역사박물관의 정면 상단에도 이 문구가 걸려 있다. 그 아래에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혁명 원로들과 인민들이 힘차게 걸어 나오는 거대한 석상이 멋지게 장식되어 있다.
1931년 중국 공산당과 임시정부 중앙기관 대부분은 루이진의 교외인 예핑촌葉坪村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위치가 국부군에게 알려지자 1933년 4월에 사저우바沙洲壩로 옮겼다. 예핑촌과 사저우바는 현재 혁명 유적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을 거닐어보면 중국인이 자신들의 혁명에 대해 얼마나 자긍심을 느끼는지 실감할 수 있다.
승승장구하던 장제스, 공산당 토벌에 목숨 걸다
훗날 마오쩌둥의 정치적, 군사적 경쟁자가 되는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시작할 무렵 어땠을까.
장제스는 1930년 공산당 토벌전에 나서기 전까지는 승승장구하여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북벌전쟁에서 북양군벌을 굴복시켰고, 1927년 강절재벌과 제휴하면서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했다. 우한에 국민정부가 엄연히 존재했지만 난징에 독자적인 국민정부를 따로 수립했고, 몇 달 만에 우한의 국민정부를 굴복시켜 흡수해버렸다. 1929년과 1930년에 다시 일어난 군벌혼전에서도 연달아 승리했다. 그는 중국을 통일했고 장제스 대권은 굳건해졌다. 그러나 제일 먼저 잘라냈던 공산당 홍군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10여 개 지역에서 크고 작은 소비에트가 수립되었고 홍군의 병력은 10만 명 수준을 회복했다.
장제스는 1930년 12월 1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장시성 남부 루이진을 중심으로 마오쩌둥과 주더가 주도하는 중앙소비에트를 집중 공격했다. 이른바 빨갱이 토벌전을 벌인 것이었다. 1차 토벌전은 홍군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실패했다. 장제스는 체면이 구겨졌고, 이후 귀신에 홀린 듯이 공산당 토벌에 목숨을 걸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을 방관하면서까지 오직 멸공에만 전력했다. 1931년 2월 2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2차 토벌전에 나섰으나 이번에도 실패였다. 1931년 7월에서 9월까지 3차 토벌전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독일, 일본, 영국의 군사고문까지 불러들여 30만 병력이 3만 병력의 홍군과 격돌했으나 장제스는 다시 한 번 실패했다. 1933년 2월부터 3월까지 국부군 40만 명을 동원한 4차 토벌전도 성과 없이 끝났다.
이때 장제스는 안팎으로 홍군과 일본이라는 두 적과 동시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산당을 포위 공격했으나 매번 홍군의 홈그라운드로 당당하게 진입했다가 꼴사납게 옆구리를 찔린 채 후퇴를 거듭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구실 삼아 만주를 침략했다. 그런데 장제스는 장쉐량의 동북군에게 일본군과의 전면
적인 전투를 피하고 뒤로 빠지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에게 만주를 그냥 내주다시피 했던 것이다.
두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장제스는 공산당 때려잡기부터 시작했다. 외부의 적과 대결하기 전에 내부를 먼저 안정화해야 한다(攘外必先安內)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일본은 나중에 미국과 영국이 나서서 견제해줄 수 있지만, 인민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공산당은 자신이 직접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장제스는 5차 토벌전을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미국에서 500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항공기 150대를 구매했다. 60개 사단 5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서남북 세 방향에서 중앙소비에트를 포위했다. 이번에는 봉쇄선에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완전히 차단하여 중앙소비에트의 밥줄을 조여 들어갔다. 공산당의 혁명 근거지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전략전이라는 이름으로 탈주를 감행하게 된다. 이것이 대장정이다. 그러나 중앙홍군은 대장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않아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우리는 대장정 답사의 다음 여정지인 참패의 현장 샹강湘江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