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 《홍루몽》의 특수 독자와 《홍루몽》의 해석 4-2

2. 신홍학 이전의 지연재 비평의 운명

이상의 자료에서 우리는 현대 학자들이 지연재 비평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1930년대에 어떤 이(예를 들면 동캉[董康])는 “지연재=조설근=이홍공자(怡紅公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연재 비평의 지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1792년의 정고본(程高本)에서 지연재 비평은 거의 전부 삭제되어 버려서 몇 천 항목 가운데 겨우 몇 개만 본문 사이에 섞여들어 운 좋게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후스와 위핑보 등도 처음에는 지연재와 지연재 비평에 대해 중시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지연재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서 마침내 조설근과 대등한 위치까지 상승했다. 이 상승의 과정은 《홍루몽》 애석의 역사에서 무척 주목할 만한 일이다.

1) 비평가의 권위

먼저 비평가의 역할을 검토해 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비평가는 《홍루몽》의 창작 과정에서 작품의 제목을 결정할 만큼 지위가 아주 높았다. 갑술본 제1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석두기』의 제목을 『정승록(情僧錄)』으로 바꾸었다가, 오옥봉(吳玉峰)에 이르러 《홍루몽》이라는 제목을 붙였소. 동로(東魯) 땅의 공매계(孔梅溪)는 그 책을 《풍월보감(風月寶鑒)》이라 불렀지요. 나중에 조설근(曹雪芹)이 ……제목을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라고 붙였지요.……지연재가 갑술년에 베껴 쓰면서 다시 비평을 달면서 옛날처럼 《석두기》라는 제목을 썼답니다.

“지연재가 갑술년에 베껴 쓰면서 다시 비평을 달면서 옛날처럼 《석두기》라는 제목을 썼다.”는 구절은 본문으로서, 응당 작자의 원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지연재’라는 명호(名號)를 내걸어 책의 제목과 상응하게 하면서 지연재가 책의 제목을 결정할 수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으니 그의 영향력이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위 인용문의 “동로 땅의 공매계는 그 책을 《풍월보감》이라 불렀다.”라는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미비(眉批)가 달려 있다.

조설근에게 옛날에 《풍월보감》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아우 당촌(棠村)이 서문을 쓴 것이었다. 이제 당촌이 이미 죽어서 내가 새 필사본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것을 따랐다.

연구자들은 마지막의 “인지(因之)”라는 부분에서 ‘지(之)’에 대해 각기 달리 해석한다. 우스창은 ‘지’가 ‘당촌이 쓴 서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천칭하오나 피수민, 류멍시 같은) 학자들은 ‘지’를 책의 제목인 《풍월보감》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인지”를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모두들 지연재가 보통의 비평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의 제목이나 서문을 없애거나 남겨 두는 것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예는 비평가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만 결국 둘 다 본문과는 연관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갑술본 제13회의 회말총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가경이 음란함 때문에 천향루에서 죽다[秦可卿淫死天香樓]”라는 부분은 작자가 역사가의 필치로 쓴 것이다. 다행히 혼령이 왕희봉에게 가씨 가문의 뒷일 두 가지를 부탁한 일은 편안히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면 어찌 생각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 일은 비록 누설되지 않았지만 그 말과 그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절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잠시 용서해 주어서 근계(芹溪)로 하여금 삭제하게 했던 것이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원래의 《홍루몽》에 들어 있던 ‘음란한 때문에 죽은 일’이 삭제되어 현존하는 어느 판본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갑술본 제13회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회는 단지 10쪽밖에 안 되는데, 천향루 부분을 삭제해 버려서 (다른 회에 비해) 4, 5쪽이 모자란다.”라는 미비가 달려 있다. 이 미비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작품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비평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암시한다. 저우루창은 지금 남아 있는 《홍루몽》 판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지연재가 “손을 써서 보충[動手補足]”했다고 주장했다.

몇몇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존하는 필사본 가운데 경진년 가을의 확정본은 조설근이 생전에 쓴 가장 완정한 형태에 가까운 판본이다. 비평에 대해 말하자면 현존하는 경진본의 비평은 세상에 전해진 필사본 가운데 내용은 물론 형식까지 모두 가장 완비된 판본이다. 통계에 따르면 경진본의 비평은 모두 2,229개 항목이며 경진년 이후의 비평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경진본은 비평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세의 필사자들은 비평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아서 지연재와 기홀수의 이름도 점차 《홍루몽》 판본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간략히 서술해 보겠다.

2) 비평의 소실과 그 중대한 영향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지연재’의 이름이 소설 본문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다만 갑술본에만 “지연재가 갑술년에 베껴 쓰고 다시 비평을 달면서 옛날처럼 《석두기》라는 제목을 썼다.”는 구절이 들어 있으며, 현존하는 기타 판본에는 종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다음으로 지연재의 이름이 작품 제목에서 삭제되었다. 초기 필사본과 사열평본(四閱評本)은 모두 《지연재 중평 석두기》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몽(蒙), 척(戚) 계열과 열장본에는 단지 《석두기》라고만 되어 있다.

또한 지연재가 비평 말미에 한 서명(署名)도 몽, 척 계열에서는 삭제되어 버리고 글자 수만 같은 의미 없는 글자들로 대체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경진본 제16회에 들어 있는 두 줄로 적힌 협주(夾注)는 다음과 같다.

1. 問得珍重, 可知是外方人意外之事. 脂硏.
2. 於閨閣中作此語, 直與擊壤同聲. 脂硏.
3. 再不略讓一步, 正是阿鳳一生斷[短]處. 脂硯.
4. 寫賈薔乖處. 脂硯.
5. 阿鳳欺人處如此. 忽又寫到利弊, 眞令人一嘆. 脂硯.

척서본(중화민국 초기에 위핑보 등이 보았던 것은 상해 유정서국의 석인본이었음)과 《몽고왕부본 석두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1. 問得珍重, 可知是外方人意外之事也.
2. 於閨閣中作此語, 直與擊壤同聲者也.
3. 再不略讓一步, 正是阿鳳一生絶斷處.
4. 寫賈薔乖處如見.
5. 阿鳳欺人處如此. 忽又寫到利弊, 眞令人一嘆也.

이렇게 ‘지연(脂硏)’ 또는 ‘지연(脂硯)’이라는 명호가 모두 종적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런 예는 많은데, 상세한 정황은 《척료생서본 서두기》와 《몽고왕부본 석두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시 비평의 수를 살펴보자. 일반 학자들은 모두들 필사본 가운데 제목이 《홍루몽》으로 되어 있는 것은 비교적 나중에 나온 판본이라고 여기고 있다. 현존하는 판본들 가운데 《홍루몽》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은 갑진본, 척서본, 몽고본, 정고본이 있다. 이 외에도 《정진탁장 잔본 홍루몽(鄭振鐸藏殘本紅樓夢)》은 회수(回首)에는 《석두기》라고 되어 있지만 판구(版口)의 어미(魚尾)에는 《홍루몽》이라는 제목이 찍혀 있다. 이 판본들에 들어 있는 비평의 수는 경진본보다 적은데, 그 원인은 옮겨 쓴 사람들이 비평을 중시하지 않고 (또는 홀시하고) 아울러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홍루몽》이라는 제목이 붙은 판본에서는 비평이 삭제될수록 더욱 줄어들다가 최후에는 거의 전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비평이 사라진 정황을 살펴보자.

천칭하오의 통계에 따르면 갑진본에는 모두 203개 항목의 비평이 들어 있다. 갑진본의 비평은 다른 판본에 비해 간략한데, 펑치용은 이것이 일부 구절을 삭제하여 간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제19회의 총평에서 비평을 삭제해야 할 필요성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본의 비평과 주석이 너무 많아 본문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삭제하여 독자들이 곰곰이 생각하여 오묘한 의미를 깨닫고 작자의 영감을 더욱 잘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갑진본 제38회 이후로는 비평이 거의 전무하며, 제64회의 본문에 섞여 들어간 회전총평과 비주(批註)가 각기 한 항목씩 있을 뿐인 결과가 생겨났을 것이다. (지연재 비평이 조정의 금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몽고본(夢稿本)의 비평도 마찬가지로 대량의 축소와 삭제를 거쳐서 겨우 30개 항목만 남아 있다. 각종 흔적으로 보건대 이 판본의 필사자도 의도적으로 비평을 삭제한 듯하다. 여타 판본의 본문에 섞여 있던 비평도 몽고본에서는 삭제되었으며, 심지어 원래의 본문조차 비주(批註)로 간주되어 삭제되었다. 위핑보는 〈신간 건륭 시기 필사본 120회 《홍루몽》에 대하여〉에서 세 가지의 ‘비평 삭제 정황’을 정리했다. 첫째, 원래 삭제된 경우. 다른 판본에는 들어 있는 비평을 몽고본에서는 베껴 쓰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둘째, 나중에 삭제. 베껴 써 놓았던 비평이 먹물로 지워진 경우를 가리킨다. 셋째, 삭제 실수. 운 좋게 남아 있었으나 먹물로 지워지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이로 보건대 몽고본의 필사자 역시 의도적으로 비평을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서서본(舒序本)에서는 비평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서서본은 제1회에서 제40회까지만 남아 있기 때문에, 원본의 제41회 이후에 비평이 들어 있었는지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정장본(鄭藏本) 역시 비평이 들어 있지 않다. 정고본에 이르러서는 비평도 거의 전부 삭제되어 버리고 단지 여섯 개 항목만이 본문에 섞여 들어서 운 좋게 보존되었다.

정고본은 수많은 후세 판본의 조본(祖本)인데, 여기에 지연재 등의 비평이 없기 때문에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은 본문으로 처리되어 있음) 후세의 판본들도 자연히 비평이 없다. 문제는 왜 정고본에 지연재 등의 비평을 붙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정고본의 저본에 본래부터 비평이 없었다. 자오깡의 생각이 바로 이러한데, 저우루창 역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둘째, 정위원과 고악이 손을 써서 삭제했다. 우핑보가 이렇게 얘기했는데, 나중에 저우루창도 생각을 바꾸어 이 설을 따랐다.

정위원과 고악이 평점을 삭제한 것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비평에 제80회 이후의 줄거리를 드러내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이런 줄거리들은 정고본의 뒤쪽 40회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점이 뚜렷하다. 그러므로 정고본에 이 비평이 붙어 있다면 독자들의 의혹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위원과 고악이 비평을 삭제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정고본에 비평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실상 《홍루몽》 해석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정고본 120회 판본이 신홍학 이전에 지위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청나라 때의 논자들은 대부분 120회를 하나의 총체로 여겼다고 지적했는데, 그 원인은 지연재 비평이 사라진 일과 아주 큰 관계가 있다.

석두기 기묘본, 출처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