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經學과 한학漢學 2

1966년 1월 10일, 구졔강 선생이 고대 사료―경학, 송학(宋学)에서 청대까지의 한학―의 정리에 대여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미 고대의 경서를 정리하는 문제, 한대에 일어난 싸움, 그때 생겨난 한학(汉学), 그로 인해 발생한 경학상의 고문파와 금문파의 투쟁 상황에 대해 대략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이어서 당대의 경학과 송대 경학의 발전, 그리고 청대의 한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당대(唐代) 초년의 사람이었던 쿵잉다(孔颖达)는 《오경정의(五经正义)》라는 책을 편찬했다. 또 쟈궁옌(贾公彦)이라는 사람은 《주례주소(周礼注疏)》와 《의례주소(仪礼注疏)》라는 두 권의 책을 썼다. 이들의 저술은 고문파와 금문파의 논술, 그리고 논거를 혼합하여 양자의 모순을 조화시킨 것이다. 그들의 이른바 ‘주소(注疏: 뜻을 해석한 것은 疏라고 함)’는 곧 고대 경서에 주를 달고, 한대의 ‘주’에 다시 주를 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주 상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 쿵잉다와 쟈궁옌은 경서의 뜻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해설했기 때문에 경학의 통일이 실현되었으며, 그 이후로 금문파와 고문파의 다툼이 사라지게 되었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송대의 유가는 근본적으로 당대의 주소 및 한대의 주해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한․당 양대의 경서에 대한 주해가 모두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주를 달았으며, 송대의 주는 청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朱熹

송대의 대 유가인 주시(朱熹)가 주를 단 경서로는 《맹자(孟子)》 《논어(论语)》 등이 있다. 《서경(书经)》은 주시의 제자 차이선(蔡沈)이 주를 달았다.

주시는 고대 경서에 대해 확실히 독창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의 안목은 매우 예리해서 고서 속의 모순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당대(唐代)의 대유(大儒)는 그것을 조화시킨 것에 불과했다. 송대의 주시는 그 가운데의 모순을 간파하여 자신이 다시 주를 달고 새로운 학설을 성립시켰다. 이에 송학(宋学)이 성립되고 송학파(宋学派)와 한학파(汉学派)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송 왕조와 그 이후에는 황실의 과거제도가 주시의 주에만 의거하여 경서를 해설하도록 규정했다. 이른바 팔고문(八股文)이라는 것을 규정해 놓고 반드시 주시의 학설을 쓰도록 했기 때문에 그 후로는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청조에 이르게 되면, 청의 경학가들은 송학에 반대했다. 그들은 한학으로 송학을 반대했다. 그들은 한대 사람의 학설은 모두 옳으며 송대 사람의 학설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청대 초년의 마오치링(毛奇龄)으로 그의 태도가 가장 격렬했다. 마오치링은 주시의 학설 일체가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다. 마오치링은 송대인들의 착오만을 이야기하고 한대인들의 옳은 점은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마오치링의 뒤를 이어서는 후이둥(惠栋)이 경학가의 지도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한대인의 옳은 점만 이야기하고 송대인의 착오는 논하지 않아 마오치링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때에는 이미 한대의 경서들이 많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한대 사람들의 견해를 하나하나 수집했다. 그들은 한대의 고문가나 금문가가 모두 옳다고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대인의 경서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청대에 이르러서는 한학파가 새로 성립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청대에 문자옥이 크게 일어났던 데에 연유한다.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3대는 전후 수십 차례의 문자옥을 일으켰다. 청대의 문자옥은 문자의 잘못을 트집잡아 문인의 목을 베고 하옥시킨 것이다. 옥중에서 죽으면 다시 시신을 도륙(屠戮)하고 효수했으며 후손들까지도 연좌(连坐)해 처형시켰다.

트집을 잡힌 문자의 잘못을 예로 들어 보자. 《대학(大学)》에 주를 달았거나 《통감론(通鑑论)》을 썼다는 것, 또 《오경간영(五经简咏)》을 지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었다. 또한 《일주루시(一柱楼诗)》를 지었다거나 《속삼자경(续三字经)》을 지었다는, 심지어 묘지(墓志)를 지었다는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이들 유학자는 그때를 전후하여 저술 문제 또는 문자상의 문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큰 화를 입었으며, 그로 인해 과도하게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자 사람들은 저마다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듯 잔혹했던 문자옥은 문인들로 하여금 감히 당대의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게 했고 고서만 읽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학술계에는 침체된 분위기와 질식 상태가 조성되었다. 청대의 한학은 곧 이러한 배경 아래서 배태되고 형성되었던 것이다.

청대에 롼위안(阮元)이라는 한림(翰林)이 있었는데 그는 건륭(乾隆), 가경(嘉庆) 연간 이전의 청조 한학가들의 《경설전집(经说全集)》을 바탕으로 해서 《황청경해(皇淸经解)》 1400본을 간행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학을 알 수 있는 동시에 한대 고문학가와 금문학가들의 여러 가지 학설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롼위안 개인만의 공로가 아니라, 청 이래 100여 년 간에 걸친 수많은 유가들의 공로다. 이 책은 참고로 읽을 만한 것이다.

이 시기에 상주학파(常州学派)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좡춘위(庄存与)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학을 모호하게 언급해서는 안되며 고문학파와 금문학파, 이 두 파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 명의 경학가로 공양학가(公羊学家)인 류펑루(劉逢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좌씨춘추고증(左氏春秋考证)》을 지었는데 그는 여기서 고증을 통하여 바로 《좌전》이 쭤츄밍의 저작이 아니라고 최초로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좌전》이 《국어》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좌전》이 《춘추》와 서로 부합되지 않는 부분을 많이 제기했다.

원래 《춘추》는 동주(东周)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국어》에는 동주에 관한 역사가 아주 적게 실려 있다. 그것은 쭤츄밍이 동주 후기의 역사 이외에는 몰랐던 데에서 연유한다. 그 결과 《좌전》의 후반부는 《춘추》와 서로 부합하게 된 반면, 그 전반부는 《춘추》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동주 초엽의 노 은공(魯隐公)․환공(桓公)․장공(庄公) 시기의 사실(史实) 기록은 경문(经文)이 ‘전’의 견해와 완전히 달라 각각의 설을 펴고 있어 들어맞지 않는다. 류신의 《좌전》은 이런 것들에 대해 경서에 대략적인 부연만을 해놓았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경문과 전 사이에 겉모양은 일치하지만 그 정신은 괴리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청대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한학이 발전했으며, 청대 후기에 이르러서도 청대의 대유가들이 계속 공헌을 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궁쯔전(龚自珍)․웨이위안(魏源)․왕카이윈(王闿运)․랴오핑(廖平)․캉유웨이(康有为)․피시루이(皮锡瑞)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금문파의 경학가들이다. 그들은 힘을 다해 한대 금문학파를 다시금 진흥시키고, 한대의 고문학파를 배척하고자 했다. 그들은 한대의 금문학파 사람들이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었음을 알고 모두 새로운 사상으로 변법(变法)을 주장했다.

魏源

궁쯔전은 류펑루의 영향을 받았으며, ‘공양학(公羊学)’가들의 사상에도 변혁을 주장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궁쯔전은 ‘공양학’이치 천명하고 있는 ‘미언대의(微言大义)’를 빌어, 청대 사회는 스스로에 대해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궁쯔전은 호가 딩안(定庵)으로 어려서부터 외조부인 한학가 돤위차이(段玉裁)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경(五经)》과 《사서(四书)》를 그저 외우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과거 시험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청조의 침체된 분위기를 타파하려고 했는데, 그의 유명한 시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온 세상의 생기(生气)는 바람과 우레에 의지하나니
만마(万马)는 일제히 울음을 그치고 하냥 애통해 하노라
나는 하늘을 달래어 다시 활기를 불어넣으리니
조금도 격식에 얽매임 없이 인재를 내리시다
(九州生气恃风雷 万马齐喑究可哀)
(我劝天公重抖擞 不拘一格降人才)

그는 한학을 운용하여 혁신과 치세를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웨이위안(魏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궁쯔전의 사상과 비슷한 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 역시 일찍이 ‘공양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청대의 장서들을 많이 읽었다. 또한 아편전쟁을 겪는 동안에 몸소 서구 세계의 침략을 체험함으로써 청대 황제의 무능함을 보았던 그는 곧 변법으로 강대국이 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랑캐의 앞선 기술을 배워 오랑캐를 제압해야 한다(师夷长技以制夷)’는 의견을 내놓음으로써, 서양의 뛰어난 면을 도입해서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는 데 써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선거 제도의 도입 및 실행을 제창하기도 했다.

왜 공양학가 및 공양학의 영향을 받은 궁쯔전이나 웨이위안 같은 인물들이 변혁의 새로운 사상을 풍부하게 갖고 있었을까? 그것은 청조 도광(道光) 연간(서기 1821~1850년)에 이르러 중국이 외세로부터 수모를 받자, 사람들을 일깨워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는 데 공양학가의 사상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금문학가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좡춘위는 첫 번째로 《공양전》을 전심전력 연구했다. 《공양전》은 《좌전》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좌전》은 기사(记事)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종 사료 및 자료도 아주 많이 들어 있으나 《공양전》은 의론(议论) 위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주로 공자의 의론을 천명했는데, 이는 곧 ‘춘추의 대의(大义)’를 말한다. 여기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 하는 고대의 사상이 항상 언급되었다. 이것은 단결하여 외세에 대항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공양전》의 대의에는 ‘삼세(三世)’의 설도 들어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1) 거란세(据乱世) : ‘그 나라는 중히 여기고 다른 제후국들은 가벼이 여긴다(内其国而外诸夏).’ 이것은 곧 춘추 동주 시기에 노(魯)를 중히 여기고 그 밖의 다른 제후국들은 경시한 것을 말한다.

2) 승평세(升平世) : ‘다른 제후국들은 중히 여기고 이적(夷狄)들은 가벼이 여긴다(内其国而外夷狄).’

3) 태평세(太平世) : ‘다른 제후국들과 이적이 하나가 된다(诸夏与夷狄为一).’

공양은 “제후국이라 할지라도 이적화(夷狄化)하면 그들은 이적으로 대한다(诸夏而夷狄也, 则夷狄之)”고 말했다. 그 의미는, 만약 제후국일지라도 이적과 같이 행동하면, 노나라는 제후국(노 이외의 각 제후국들)을 이인(夷人)이나 적인(狄人:더 먼 곳에 있는 외국)과 마찬가지로 대한다는 것이다.

공양은 또 “이적들이라도 제후국화하면 그들을 제후국과 같이 대해준다((夷狄而诸夏也, 则诸夏之))”고 말했다. 그 의미는 만약 먼 곳에 있는 이인과 적인, 각각의 외국들의 행위가 노나라 부근의 주(周)가 봉(封)한 국가들과 같을 때에는 노나라가 그들을 응대하되 잘 봐준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모두 공양학가가 갖고 있는 오래된 이론과 이상들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청대 도광(道光) 연간에 이르러 외국으로부터 수모를 받게 되자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경학가들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키고 일정한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되 한대 사람들의 ‘삼세’의 설을 빌어 변법을 주장했다.

이것으로 청대 초기에는 문인과 유자(儒者)들이 문자옥의 빈번함과 가혹함으로 인해 모두 고문서(古文书) 더미 속에 파묻혀 숨어 버림으로써 단순한 지식만 강구할 뿐 실제적인 응용은 강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조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지식을 실제적인 응용에 연계시켜서 한대 금문학가의 제도개혁 사상을 빌어 청대의 변법을 제창하고 이끌어 나갔다. 이 시기에는 경서에 근거하여 변법을 논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앞선 기술을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师夷长技以制夷)’는 웨이위안의 주장과 연관하여 ‘중국의 학문을 주체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이용한다(中学为体, 西学为用)’는 설이 뒤이어 나왔다. ‘중국의 학문을 주체로 삼는다’고 말할 때의 이른바 ‘체(体)’는 근본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주장을 첫 번째로 분명하게 내놓은 사람은 장즈둥(张之洞)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문화가 세계에서 제일 훌륭하고 서양은 단지 강한 군사력만 갖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땅히 중국의 예의로 그들을 교육시키고 서양의 강한 군사 기술로 중국을 무장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에 랴오핑(廖平)은 아주 많은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한대의 경학가 쉬선(许愼)이 지은 《오경이의(五经异义)》를 읽고 그 책에서 말하는 금문학가와 고문학가의 ‘예제(禮制)’에 대한 담론이 다르다는 것에 근거하여 《금고학고(今古学考)》를 지었다. 이 책 속에서 랴오핑은 이른바 고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주공(周公)이 제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주례(周礼)’가 주공이 제정한 것이라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주례’는 주 왕조의 예제가 아니라 춘추 시대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상상했던 것으로 전국 시대에 쓰여졌을 따름이다.

랴오핑은 또 경학은 모두 공자의 것이며, 《지성편(知圣篇)》이라는 책을 통하여 ‘육경(六经)’은 모두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예수교의 교리에 의거하여 공자는 곧 중국의 예수라고 말했다.

구 선생은 “우리는 예수교의 성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교에서는 예수를 상제(하나님)라고 여기고 신교에서는 예수를 상제의 아들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랴오핑은 공자를 중국의 구세주라고 말하며 공자 이전에는 문화적인 저작 활동이 없었지만 공자가 나온 뒤에 비로소 문화적 저서가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장즈둥이 양광 총독(兩广总督)으로 있을 때 그는 랴오핑을 막빈(幕宾)으로 청했다. 랴오핑은 그때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캉유웨이(康有为)를 만났는데, 랴오핑과 캉유웨이는 단번에 말이 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두 권의 책을 지었다. 그 하나는 《신학위경고(新学僞经考)》로 이른바 ‘신(新)’이란 왕망(王莽)의 국호를 가리키며 랴오핑의 《금고학고》에 근거하여 지은 것이다. 캉유웨이는 한대 고문학파의 경서가 전부 ‘신(新)’ 왕조의 왕망이 위조한 가짜 경서들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로 캉유웨이가 랴오핑의 《지성편》에 근거하여 지은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공자가 육경을 지은 까닭이 바로 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데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무술정변(戊戌政变)으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변법을 주장했던 시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는 사람들이 옛 경서를 존중해 왔으나, 캉유웨이가 그것을 뒤집어엎고 공자를 개혁가로 만들어 버리는 동시에 캉유웨이 스스로 당대의 공자가 되어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康有為

당시의 수많은 대관(大官)들과 대유(大儒)들은 일제히 캉유웨이를 비난했고, 청의 광서(光緖)제는 그 두 권의 책을 불태워 버리고 두 차례에 걸쳐 그 책을 금했다. 하지만 현재 이 두 권의 책은 이미 중화서국에서 출판되어 나와 있다.

이 두 권의 책이 지니는 커다란 가치는 고문학파의 경서 가운데 일부가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 데 있다. 물론 전부 위조된 것은 아니지만 류신이 위조했다는 사실은 확실하며, 그의 위조는 옛것에 의탁해서 그 자신에 대한 신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캉유웨이는 공자가 개혁을 하려 했다는 주장을 했으나 실제로 그런 일들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제도의 개혁은 공자 이후 전국 시대의 일로 여러 사상가들(诸子)이 한 일이었다. 그들 사상가 중에는 유가도 있었는데, 전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가에서도 제도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확실히 일어났었다. 그 예로 맹자가 공자에 의탁해서 제도를 개혁하려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옛것에 의탁하여 제도를 개혁하려는 것(托古改制)이다. 예를 들어 전국 시대에는 부모가 죽으면 삼년상(三年丧)을 지냈는데, 이것은 춘추 시대에는 없었던 일이다. 춘추 시대에는 상을 치르되, 주(周)의 왕이 죽으면 7개월, 제후가 죽으면 5개월, 그리고 대부(大夫), 곧 정사(政事)를 책임진 관리가 죽으면 3개월 동안 복상(服丧)을 했다. 그리고 정사에 대한 책임은 없고 다만 자격만 갖춘 사람, 즉 사(士)가 죽으면 1개월 간 복상했다.

전국 시대에는 효를 중히 여겼기 때문에 복상하는 시간을 늘렸던 것이다. 맹자는,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삼 대가 모두 그러했다(三年之丧, 自天子达于庶人, 三代共之)”고 말했다. ‘삼대(三代)’는 곧 하대(夏代)․상대(商代)․주대(周代)를 말하며, 이 세 조대에는 모두 삼년상을 지켰다. 사실 맹자의 이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등문공(滕文公)은 맹자의 말을 듣고 삼년상을 지켰다. 《맹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등(滕)의 부형들과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반대해 말하기를, “이런 일은 우리나라 선대에서도 행한 적이 없고, 우리의 종국(宗国)인 노나라의 선대에서도 역시 행한 적이 없습니다.(滕父兄百官皆不欲, 曰, “吾先君, 莫之行, 吾宗国, ,鲁先君, 亦莫之行也.)”

곧 등문공 이전의 조상들은 삼년상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장했던 삼년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에서 곡만 하게 하고 문밖에 나가 생업에 힘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유가의 제도 개혁은 주공(周公)이나 공자에 의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듯 옛 사람들을 우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캉유웨이는 매우 대담했으므로 이러한 옛 유가의 폐단을 힐난했다. 그러나 그가 공자를 개혁가로 만들어 버린 결과, 명목상으로는 공자를 추켜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공자를 깎아 내린 것이 되어 버렸다.

청대 후기에는 옛것에 의탁하여 개혁과 변법을 강구했다. 이것은 고경학(古经学)에 근거하여 자기의 신사상을 펼치고 변법과 유신 사상을 주장했던 것을 말한다.

그 후 청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쟁론이 일어났다. 청대 말기의 위웨(兪樾)은 한학과 송학을 혼합했다. 한학이나 송학은 모두 훌륭한 학문이기 때문에 본래 이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리는 부분도 있었다. 따라서 위웨의 제자들은 장빙린(章炳麟)과 같이 고문파만 믿는 사람과, 추이스(崔适)와 같이 금문파만 신봉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두 파가 갈라져 나오게 된 것이었다.

장빙린은 호가 타이옌(太炎)으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편에 속했다. 그는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캉유웨이의 보황사상(保皇思想)과 서로 대립되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학문에서는 장타이옌이 보수적이고 캉유웨이는 진보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이 서로 비방하는 것을 보고도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장타이옌과 캉유웨이의 문장을 본 경학가인 쳰쉬안퉁(钱玄同)은 장타이옌의 고문파가 캉유웨이의 금문파를 공격한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금문파의 주장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쳰쉬안퉁은 고문파와 금문파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문학파와 고문학파, 그리고 한학과 송학은 모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취할 만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배척해야 할 부분도 있다.

청대 초기에는 한학과 송학의 다툼이 있었던 반면에 청대 말기에는 고문파와 금문파의 쟁론만 있었다. 그러나 청조가 멸망하자 금문파와 고문파의 다툼 역시 없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청대 후기의 경학가, 이를테면 궁쯔전(龚自珍; 定庵)․웨이위안(魏源)으로부터 랴오핑(廖平)․캉유웨이에 이르기까지는 경서에 근거하여 변법을 논하고 옛것을 바탕으로 삼아, 또는 공자에 의탁하여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며 유신을 주장하되 경서에 의거했었다. 그러나 그들 이후에는 경서를 읽지 않고 변법과 유신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민국 시기에 이르러 경학은 일반적으로 경서를 읽지 않고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이 고서를 읽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경서를 연구한 사람으로는 랴오핑의 제자였던 멍원퉁(蒙文通)이 있고, 이와 별도로 경서를 연구한 학자로는 위웨의 제자였던 쳰쉬안퉁(钱玄同)이 있다. 위웨는 두 명의 경학 제자를 두었는데, 한 명은 추이스(崔适)로 금문학(今文学)을 배웠고, 다른 한 명은 장빙린으로 고문학(古文学)을 숭상했다. 그러나 쳰쉬안퉁은 이들 추이․장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고문학파와 금문학파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고루 갖출 수 있었다.

쳰쉬안퉁은 한학, 곧 한대의 옛 경서에 대해 연구했다. 경학은 고문학과 금문학 두 파로 나뉘어 몹시 혼란스러워졌으며, 이 때문에 청대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쪽이 정통성을 지니는가에 대해 200여 년에 걸쳐 연구했다. 쳰쉬안퉁이 그 뒤를 이어 그것을 연구하다가, 구 선생을 만난 뒤에는 구 선생으로 하여금 자기 대신 그 연구를 완성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수많은 한학상의 큰 문제를 주제로 삼아 구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쳰쉬안퉁은 당대의 과학자 쳰싼챵(钱三强)의 부친으로서 고혈압으로 50여 세에 중풍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경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있지만 스무 명을 넘지 않는다. 현재는 상하이 푸단대학(復旦大学)의 장톈수(蒋天枢)와 구 선생 등이 있으며, 모두 60여 명 정도다. 경학에 관한 새로운 저작으로는 《시경신의(诗经新义)》 《좌전선(左传选)》 《상서(尙书)》의 번역만이 있을 뿐이다.

이어서 구졔강 선생은 또 유관한 단어의 개념에 관해 몇 가지 말했다.

‘국학(国学)’이란 중국 고대의 문학(文学)․역사학(史学)․철학(哲学) 등 각종 학문에 대한 총칭이고, ‘한학(汉学)’이란 단지 한대인들의 경학에 대한 학문을 가리킨다.

경학은 한(汉)으로부터 진(晋)․당(唐)․송(宋)․원(元)․명(明)․ 청조(淸朝)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발전해 왔다. 이것은 고대 경서에 대한 해석이며 고대 사서에 기록된 사료의 정리로서 매우 의미 있는 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