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 제8권 2

제8권 오장군은 밥 한 끼 은혜도 꼭 보답하고
진대랑 등 세 사람이 다시 모이다
烏將軍一飯必酬 陳大郎三人重會

왕생은 이틀 길을 가서 또다시 양자강 한복판에 이르렀다. 이날은 마침 순풍이 불어 마치 말을 타고 질주하듯 먼 길을 지나 곧장 용강관(龍江關)1 어귀에 도착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미처 뭍에 오르지는 못하고 그냥 정박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두 번씩이나 강도를 만나 크게 놀랬던 까닭에 순찰선 옆에 배를 바짝 대고 잘 묶어두었다. 자기들 딴에는 절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는 안심하고 잠을 잤다. 그런데 삼경이 되자 별안간 바라 소리가 울리고 일제히 횃불들이 불을 밝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황급히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또 한 무리의 강도떼가 배위로 뛰어올라 지난번처럼 몽땅 털어 가버리는 것이었다. 배의 위치를 살펴보니 본래 정박해있던 곳에 있지 않고 이미 강 한복판으로 옮겨져 있었다. 불빛 속에서 그들이 약탈하는 것을 똑똑히 보니 전에 두 번이나 만났던 바로 그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왕생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에 그에게 보따리 하나를 돌려주었던 등치 큰 강도를 붙잡고는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나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우리는 맹세코 사람의 목숨은 해치지 않으니 넌 그냥 가면 그만인데 왜 도리어 귀찮게 구는 거냐?”

왕생은 다시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리는 모르십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안 계셨기로 오로지 작은어머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나와서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세 번 장사하러 나왔다가 전생에 나리께 무슨 빚을 졌는지 세 번 모두 나리를 만나 뺏기고 말았으니, 도대체 제가 무슨 낯으로 작은어머니를 뵐 것이며, 또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갚아드리겠습니까? 나리께서 저를 죽이지 않으시더라도 강물 속에 뛰어들어 죽을 겁니다. 결코 다시 돌아가서 작은어머니를 뵐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왕생은 더욱 마음이 아파 그칠 줄 모르고 통곡을 하였다. 그 강도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를 가엽게 여기고 이렇게 말했다.

“난 너를 죽이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돈을 돌려줄 수도 없다. 하지만 내게 방법이 있다. 내가 어제 밤에 객선 하나를 털었는데 뜻밖에도 모두 묶여진 모시풀이더군. 헌데 양이 적지 않아. 그런 건 나한테는 쓸모가 없는데 내가 네 돈을 빼앗았으니 그것들을 너한테 줘서 본전으로 삼게 한다면 그럭저럭 값어치는 충분히 될 거야.”

왕생에게는 뜻밖의 말이라 감사해 마지않았다. 그 무리들은 모시풀을 배에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왕생과 뱃사람은 그것을 황급히 쌓았는데, 미처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대략 이삼 백 단은 됨직했다. 강도들은 모시풀을 다 던져놓고는 벌써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배를 돌려 사라져버렸다. 뱃사람은 근처에 작은 나루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배를 저어 그곳으로 가서 숙박을 하였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왕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인심이 있는 강도였어. 모르긴 해도 이 정도 모시풀이라면 아마 천 냥쯤은 될 거야. 그자도 뺏어놓고 보니 처리하기가 뭣하니까 나에게 준 게지. 그런데 내가 지금 이 길로 내놓고 팔다가 누군가 눈치 챈다면 도리어 재미없게 되겠지. 차라리 일단은 그냥 집으로 싣고 돌아갔다가 다시 묶어서 모양새를 바꾼 다음 다른 곳으로 가서 파는 게 났겠어.’

그리고는 다시 배를 저어 나아갔는데, 배가 강물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터라 매우 빨라 얼마 안가서 경구갑(京口閘)에 도착하였다. 곧장 집으로 가서 작은어머니를 뵙고는 앞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양씨는

“비록 돈을 잃어버렸다 해도 이렇게 많은 모시풀을 얻었으니 크게 손해본 건 아니구나.”

하고는 곧 그 중 한 다발을 펼쳐보았다. 안쪽까지 한 켜 한 켜 풀어 보는데, 다발 속에 딱딱한 덩어리 하나가 단단히 묶여있는 것이었다. 조심조심 풀어보니 얇은 종이 몇 겹으로 싼 백금 덩이였다. 계속해서 다발들을 펼쳐보니 하나같이 마찬가지였다. 배에 싣고 온 모시풀에 모두 오천 냥이 넘는 금덩이가 들어 있던 것이었다. 노련한 대상인이 뱃길에 출몰하는 강도를 예방하기 위해 단순히 모시풀인 것처럼 가장해서 다발 속에 몰래 숨겨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강도들이 마구잡이로 약탈했던 것이 결국 오늘 왕생을 부자로 만들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양씨와 왕생은 소리쳤다.

“세상에나!”

비록 두어 번 놀라고 두려움에 떨긴 했지만 거저 이런 횡재를 하여 본전의 몇 배가 되니 더할 수 없이 기뻤다. 이로부터는 나가서 장사를 할 때마다 매번 잘 풀려 몇 년 되지 않아 결국 대부호가 되었다. 이는 왕생의 복이기도 하지만 그 강도의 보기 드문 한 가닥 자비로운 마음 덕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강도들 중에도 좋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해 보면, 역시 소주 사람인데 무심코 한 호걸과 사귀었다가 후에 그로 인해 집안을 일으키고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걸 증명하는 이런 시가 있다.

협기 충천한 사내대장부 이야기
듣고 나니 기이한 얘기 고금에 으뜸이구나
세상사람 누구나가 의롭다면야
탐천2 샘물 마셔도 맑은 마음 드러나리

각설하고 경태(景泰) 연간에 소주부 오강현(吳江縣)에 구양(歐陽)이라는 복성을 가진 상인이 있었다. 어머니는 소주부 숭명현(崇明縣)의 증씨(曾氏)로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나이가 열여섯 살로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고, 딸은 스무 살이었는데 비록 서민 집안이지만 어느 정도 자색을 갖추고 있어 같은 마을의 진대랑(陳大郞)을 데릴사위로 맞아들였다. 가세는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아 대문 앞에 작은 잡화점을 열고 왕래하며 장사를 하였다. 진대랑과 처남 두 사람이 관리했는데, 그들 다섯 식구는 서로서로 공경하고 아끼면서 장사를 하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진대랑이 물건을 사러 소주(蘇州)로 가고 있는데 도중에 눈이 흩날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잘 말해 주는 옛 시가 있다.

모두들 풍년의 징조라지만
풍년설이면 무엇하나
장안에 가난뱅이들 있으니
눈도 많이 오면 안 된다네

진대랑은 눈이 오는 것을 무릅쓰고 가다가 마침 주점을 찾아 술 한 잔 하고 몸을 좀 녹이려던 참이었다. 그 때 멀리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이러했다.

몸에는 푸른 옷 꽉 껴입고 허리춤 안으로는 칼을 숨겼네. 그 모습엔 위엄이 있고, 얼굴엔 살점 하나 보이지 않는구나. 양쪽 볼에 모두 수염 길었고 온몸이 온통 털투성이네

그 사람은 키가 7척쯤 되고 가슴둘레는 보통사람의 세 배 정도며 얼굴도 큼직한데 반은 긴 수염에 덮여 있었으니 정말 특이한 생김새였다. 수염이 없는 부분에도 털이 한 치 가량 자라서 눈을 제외하고는 입이고 얼굴이고 모두 빈틈없이 가려져있었다. 옛날 우스갯소리로 수염은 어질지 못해 끊임없이 주변을 침략한다는 말처럼 얼굴에는 남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진대랑이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 정말 괴상하게도 생겼군! 헌데 밥 먹을 때는 저놈의 수염을 어떻게 해서 입을 내놓나?’

그리고는 또 속으로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돈을 좀 써서 그를 술집으로 청해 그가 하는 것을 보는 거야.’

라고 생각했다. 진대랑은 그가 이상하게 생긴 것을 보고는 장난을 치려고 서둘러 몸을 굽히고 다가가 인사를 하자, 그 사람도 연방 인사를 하였다. 진대랑은 이렇게 말을 건넸다.

“소인이 어르신을 주점으로 모셔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먼 곳에서 온 데다 눈까지 내리고 춥고 배도 고팠던 터라, 그 말을 듣고는 희색이 만면해져서는 곧바로

“평생 만난 적도 없는데 어찌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다. 진대랑은 꾀를 내어

“어르신께서 체격이 비범하신 것을 보니 틀림없이 호걸이실 거라 생각하여 감히 말씀을 여쭌 것입니다.”

“당치 않습니다.”

그 사람은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양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술집에 도착하자 진대랑은 하인을 불러 술 몇 병과 양다리 하나를 시키고, 또 닭고기와 생선 등의 요리를 주문하였다. 진대랑은 그가 어떻게 먹는지를 보려고 잔을 들어 권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술잔을 받아서 탁자 위에 놓고는 소매 속에서 은으로 만든 작은 집게 한 쌍을 꺼내더니 양쪽 귀에 걸고 수염을 양쪽으로 갈라 맸다. 그리고는 칼을 뽑아 고기를 썰어 마구 먹는 것이었다. 또 술잔이 작다고 하인더러 큰 사발을 가져오라고 하여 연거푸 몇 병을 마시고, 또 밥을 시켜 열 몇 그릇을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진대랑이 보고는 입이 떡 벌어져 있는데 그 사람이 일어나 공수를 하며 말했다.

“노형의 은혜 정말 감사하오. 성함과 계신 곳을 알고 싶소.”

“저는 진 아무개라고 하고, 이곳 오강현(吳江縣) 사람입니다.”

진대랑이 말하자 그 사람은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 진대랑도 그에게 이름을 묻자 그 사람은 확실히 대답하지 않고 그저

“제 성은 오(烏)가이고 절강(浙江) 사람입니다. 나중에 노형께서 일이 생겨 저희 지방으로 오시면 혹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오. 노형의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겠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진대랑은 연신

“무슨 말씀을.”

하면서 곧 술값을 계산하였다. 그 사람은 재삼 감사하고는 그곳을 나와 작별을 하고 떠났다. 진대랑도 별말 아니라 생각하여 새겨듣지 않았다. 진대랑이 돌아와서 집안사람들에게 말하니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일로 인해 그렇게 모두들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다시 두 해 남짓 시간이 흘렀다. 진대랑은 결혼을 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하여 두 부부가 남해(南海)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의 관음대사(觀音大士)가 있는 곳에 가서 향불을 올리고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려고 마음먹었다. 아직 계획을 정하지 않은 어느 날 문득 구공(歐公)이 일이 있어 밖에 나간 후 바깥에서 한 사람이 들어와

“구어른 댁에 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진대랑이 황급히 나가 맞아보니 다름 아닌 숭명현(崇明縣)의 저경교(褚敬橋)였다. 인사를 마치자 손님은

“댁의 빙장 어른이 계신지요?”

하고 물었다.

“잠깐 나가셨습니다.”

“댁의 마님 친정어머니 육(陸)씨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특별히 저에게 서신을 보내라 하시면서 댁의 장모님께서 잠깐 같이 계셔주기를 청하십니다.”

대랑이 그 말을 듣고 들어가 증(曾)씨에게 알렸다.

“나는 지금이라도 갈 수 있지만, 자네 장인이 안 계시니 당장은 어쩔 수가 없네.”

증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곧 아들딸을 불러 분부하였다.

“외조모께서 병환이 나셨으니 너희 남매가 숭명으로 가서 며칠 시중을 들어드려라.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내가 곧 너희들과 교대를 해주마.”

그리고 나서 계획을 정하고 저경교를 만류하여 점심식사를 하게 하고는 먼저 돌아가 그렇게 알리도록 부탁하였다. 이틀 후 두 남매가 짐을 꾸리고 배를 불러 출발하였다. 증씨는

“내 대신 외조모님께 문안 올리고 잘 보살펴드려야 한다. 또 내가 곧 올 것이라고 말씀드리거라. 며칠 안 되는 길이지만 너희 둘은 나이가 어리니 모두 조심해야 한다.”

하고 당부하였다. 두 사람은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숭명을 향해 떠났다. 이렇게 떠남으로 인해 이런 말이 있게 되었다.

녹림의 강도가 이날 미녀를 만나니
아리따운 규수 이로부터 위험에 빠지네

1 용강관(龍江關) :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위봉문(威鳳門) 외곽에 위치해 있다. 명대에는 세관이 설치되어 상선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2 탐천(貪泉): 광동성(廣東省) 남해현(南海縣)에 있는 샘으로, 그 물을 마시면 탐욕스워진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