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이백李白 신평루에 올라登新平樓

신평루에 올라 登新平樓/당唐 이백李白

去國登茲樓 국도 떠나 이 성루에 오르니
懷歸傷暮秋 늦가을 집 생각에 슬퍼지네
天長落日遠 하늘 넓어 떨어지는 해 멀고
水淨寒波流 물 맑아 차가운 물결 흐르네
秦雲起嶺樹 진의 구름 재의 숲에서 일고
胡雁飛沙洲 호의 기러기 모래톱에 내리네
蒼蒼幾萬里 아득히 펼쳐진 몇만 리 산하
目極令人愁 모든 풍경이 근심을 자아내네

신평루(新平樓)는 신평현(新平縣)의 성루(城樓)를 말한다. 신평현은 지금 서안의 서북방에 있는 섬서의 빈현(彬縣)에 해당한다. 이백(701~762)이 730년 30세 때 장안에 처음으로 갔다가 실의에 빠져 빈주(邠州)에 왔는데 그때 신평현의 성루에 올라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이해 여름에 이백은 장안에 와서 재상 장열(張說)도 만나보고 종남산에 있는 옥진공주(玉眞公主) 별관에 살면서 노력했지만 벼슬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실의에 빠져 늦가을에 빈주(邠州)로 온 것이다. 마침 해거름에 성루에 올라보니 아득히 멀리 해가 떨어지고 옆에선 맑고 차가운 물이 흘러간다. 그리고 아득히 멀리 펼쳐진 산하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풍경을 보노라니 장안에 가서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 것과 종남산에 두고 온 은거지가 절로 생각난다.

이 시에 나오는 거국(去國)을 고향을 떠난 것으로 이해하고 회귀(懷歸)를 고향 생각으로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이 시를 잘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백이 신평으로 오기 전에 있었던 처소가 종남산 옥진 공주 별관인데 이 은거의 초가를 이백은 송룡구은(松龍舊隱)이라고 자신의 시 <춘귀종남산송룡구은(春歸終南山松龍舊隱)>에서 밝히고 있다. 송룡은 송감(松龕)으로 된 판본도 있다. 이 시는 바로 신평에서 방주(坊州)를 거쳐 이듬해에 돌아와 썼는데 은거지에 대해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옥진공주는 바로 현종의 친동생으로 이백을 추천한 인물이다. 이백은 이 당시 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13세에 도교에 입문한 옥진공주가 이백의 재능을 아껴 돌봐주고 있었다. 내가 전에 안휘성 선성(宣城)의 경정산(敬亭山)에 가서 옥진공주의 무덤과 묘비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백과의 관계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옥진공주는 이백이 조정에서 떠났을 때 경정산으로 갔고 이백도 7번이나 경정산을 찾은 것은 그런 사연이 있었다. 지금 이백이 장안을 떠나 신평에 갔는데 객지 생활의 고단함 때문에 자연히 옥진 공주가 돌보아주는 자신의 은거처 송룡(松龍)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진나라 구름과 호지(胡地) 등의 말을 쓴 것은 이 지역이 예전 진나라 땅이고 호지와 가깝기 때문이다.

시에서 사용한 하늘과 물, 진나라 구름과 호지의 기러기 등은 매우 범위가 큰 말들이다. 그리고 제 2구의 상(傷) 자와 마지막 구의 수(愁) 자가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여 비감한 정조가 웅장하게 다가온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아득한 몇만 리’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괄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풍경이 자신을 시름에 빠지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이백의 고향이 있는 사천성 청련(靑蓮)과는 무관하고 자신이 벼슬을 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적어도 이백이 볼 때는 자신과 같은 인재가 등용되어 뜻을 펴지 못하는 이 나라 이 산하의 앞날이 걱정되는 것이다.

이런 정조를 이해하고 본다면, 시 전편에 걸쳐 경물을 빌려 자신의 우울한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포착된다. 범위가 큰 말들을 기세 있게 사용한 것은 바로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곤궁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우울한 심정이 그만큼 억눌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백의 이러한 우울한 정서는 만추의 풍광과 잘 어울려 깊이감을 주며 성루에 올라가 쓴 시답게 호쾌한 기상 역시 잘 어울리고 있다.

丰子恺, <想得故园今夜月,几人相忆在江楼>, 출처 搜狐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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