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성곽 내의 변화 1

성벽의 형태

당시 성벽에 관해 한마디 해 두겠다. 당시에 이미 성벽은 구축물인 동시에 도시를 방어하는 방어장치로서 고도의 기술로 건설되었다. 성벽에는 거대한 성문이 있고, 그 위에는 거대한 망루(櫓)가 있었다. 그리고 희장(姬墻)이 그 위에 늘어서 있고, 성벽에는 마면(馬面)이 돌출해 있었다. 마면이라는 것은 성벽에 설치된 방어 설비이다. 같은 간격으로 나란히 성벽으로부터 직각으로 돌출해 세웠는데, 마면과 마면의 사이로 들어오는 적을 협공하는 것도 가능했다. 성벽의 높이도 높았다. 당당한 성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심리에 내몰려 성벽을 장식한 것도 있다. 오대 십국(五代十國) 시대, 쓰촨의 후촉(後蜀)의 왕인 멍창(孟昶)은 높게 우뚝 솟은 성벽 위에 부용(芙蓉)을 심었다. 청두성(成都城)의 아명(雅名)인 진관청(錦官城)에 걸맞은 경관이 출현했던 것이다. 이런 시도는 1년뿐이었던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대한 청두성의 성벽 위에 흙을 쌓고 부용을 심겠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발상이었을까? 때가 되어 허공에 거대한 부용의 고리(環)가 생겼을 때, 그것을 우러러 봤던 사람들의 놀라움을 상상할 수 있을까? 멍창은 무슨 생각으로 주위 25리, 약 14킬로미터의 꽃 고리(花環)을 가진 허공의 성이 나타나게 했던 것일까? 실로 놀랄 만한 발상이었다.

쓰촨성에서는 당의 문화가 보존되었고, 이것을 송에 전하는 역할을 완수했다고 한다. 전촉(前蜀)의 궁정에서는 비밀스러운 성을 대담하게 노래한 화예부인(花蕊夫人)도 있었다. 독특한 미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 성벽이 완성되었던 송대의 도시 모습을 오늘날까지 전해준 것이 《송평강도(宋平江圖)》이다. 《송평강도》에 묘사된 도시, 곧 쑤저우는 당시의 도시의 최첨단의 설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제3부 성곽 내의 변화

당대(唐代)의 성 안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송대의 도시는 그 내부가 어떻게 생겼을까?

여기에도 새로운 송이라는 시대의 특색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성안을 구획한 가로와 벽의 문제이다.

당대에는 가로를 직선적으로 배치하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방형의 구획을 방(坊)이라 칭했다. 방은 방어의 방(防)과 의미가 통하며, 도시 정비뿐만 아니라, 성내의 감시와 치안 유지에도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방의 주위에는 흙벽이 둘러져 있었다. 이른바 방벽인 것이다. 당의 도시에서는 궁전은 물론이고 사원이나 상점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벽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방은 사람들을 가두고 둘러싼 거주구였다. 그 주위에는 대체로 동서남북의 문이 나 있고, 거기에서 출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주위의 큰 가로를 향해 문이 내는 것은 황족이나 귀족 등 유력자나 사원과 같은 곳뿐이었다. 곧 가로로 향한 문을 내는 것은 엘리트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방의 문에는 방정(坊正)이라 부르는 관리자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300의 태고(太鼓), 곧 격고(擊鼓), 또는 가고(街鼓)라 불렸던 큰 북소리를 신호로 문을 열고 닫았다. 방의 문에 여닫는 시간 이 있었다는 것은 야간 외출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간에는 긴급한 환자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방 바깥으로 외출할 수 없었다. 지배자가 지정한 시간 이외에는 성내를 걸을 수 없었다.

창안(長安)의 도시 공간(세오 다츠히코(妹尾達彦), <당대 후반기의 창안과 전기소설>에서)

함부로 다른 방으로 나가면 안 되었다. 오후에 약간 떨어져 있는 방에 가려면 자고 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 늦게 귀가 길에 올랐을 때와 같은 경우에는 주의해야 했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었던 것이다. 가고(街鼓)가 울리고 나면, 곧 가까운 방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의 일각에서 가고가 울리기 시작하면 수백 미터를 전력 질주했다. 함부로 술도 마실 수 없었던 것일까?

방은 거대했다. 실측에 의하면, 창안의 경우, 가장 작은 것이 동서가 550미터에서 700미터였고, 남북은 500미터에서 590미터였다. 큰 것의 경우, 동서가 1,020미터에서 1,125미터에, 남북이 660미터에서 838미터 정도였다. 아주 거대한 거주구였다.

이 거주구야말로 창안의 세포이다. 여기에는 사원과 시장, 서민의 집 등 온갖 것들로 가득차 있었다.

안은 동서남북으로 구획되었고, 다시 하나하나를 네 개로 나누었다. 전체를 16등분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거대한 건물은 그 구획에 맞지 않았지만, 서민의 집 등은 충분하다. 여러 작은 구획에 다닥다닥 붙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창안의 경관

그런 창안의 경관은 당연히 시각적으로도 현재의 도시 경관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내었다. 큰 가로에 서서 보이는 것은 벽뿐이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벽의 높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기저부가 2.5미터에서 3미터 정도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높이가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지방의 오래된 주택가를 걸으면 높은 토담에 둘러싸여 내부의 낌새조차 느낄 수 없는데, 대체로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이것은 또 한 걸음 나아간 의미로, 도시의 경관에 큰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거대한 건물이라면 몰라도 일반 서민의 작은 집 등은 지붕조차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집의 분위기는커녕, 그 안의 분위기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머나먼 창안에 겨우 도착해 대도시 중심도로에 섰던 일본에서 온 여행자가 본 광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테면, 때때로 소개된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의 입체 복원상 정도 등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똑바로 뻗은 가로는 종횡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 가로의 주변에 죽 늘어서 있는 것이 방(坊) 벽이다. 대도시 중심도로에 섰다고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곧바로 녹아 들어갔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방(坊)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대도시 중심도로였기에 사람들이 활발히 오갔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행렬도 보였을 것이다. 궁정의 행렬, 황족과 귀족의 행렬, 그뿐만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온 사자와 은 안장과 백마를 타고 활보하는 귀공자, 양귀비의 일족이 화칭츠(華淸池)에 갈 때의 아름다운 행렬, 오가합대(五家合隊)도 통과했다.

비참한 광경도 보였다. 신임 재상이 궁전에 오를 때에는 하얀 모래를 길에 깔았다. 모래는 황허(黃河)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 모래를 운반하는 소의 머리에 멍에가 씌워지고, 점점이 붉은 피가 떨어졌다고 한다.

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서민도 빈번하게 오갔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행려병자도 있었다는 것이 소설 등에 나와 있다. 저택 안은 환락이 넘쳤던 반면, 그 바깥에는 굶어 쓰러진 이가 있었던 것이다. 대저 역사는 현종과 양귀비의 영화가 대다수 서민의 희생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큰 길에서는 많은 경관을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큰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생활의 장까지는 결코 볼 수 없었다. 방의 벽이 방해를 했던 것이다. 아득히 멀리서 궁전과 사원의 용마루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거대한 도시였으니 상당히 가까워져서야 간신히 어떤 건물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빛나는 용마루도 거대하고 장대한 가로와 방벽에 가려져 아득히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었다는 게 실상이었을 것이다.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의 《창안의 봄》에 있는 경관은 장소가 한정되어 있고, 일반적인 성내에서 보이는 것 같은 풍경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도나미 마모루(礪波護, 1937~ )도 지적한 바 있다.

방(坊)의 안쪽에 관해서 한마디 해두겠다. 작은 거주구에는 집들이 밀집해 있었다. 길은 좁고 뒤엉켜 있었다. 최소 단위의 길을 곡(曲)이라 한다. 아마도 구불구불(曲)했던 듯하다. 거기에 행상인이 찾아 왔다. 그런 경관이 서민의 생활 경관이었다. 사람들은 억지로 쑤셔 처넣어져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강요당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