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뭘 해야 하나

이제 어떻게 될까, ?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더 유명한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는 “이제 어떻게 될까, 응?”(What’s it going to be then, eh?)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중국어에서 이 구절은 “이제 무슨 짓을 벌여 볼까, 응?”, 혹은 “이어서 우리 뭐 하고 놀까, 응?”(接着我们玩什么花样,嗯?) 정도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소설가 아이(阿乙)는 한동안 이 문장을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下面,我该干些什么)로 인용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발표할 당시의 노골적이면서도 평범한 《쥐와 고양이》 대신 잘못 기억한 이 질문을 자신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제, 뭘 해야 하나》라는 제목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문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질문의 대답으로 이 소설이 시작되는지, 사건을 벌인 후 허무함의 표현인지부터 분명치 않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는 밤에 “뭐라도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주인공이므로 다음 차례에 무슨 일을 벌일지 자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살인, 도주, 체포의 전 과정을 계획대로 추진해 가며 절차를 되새기는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어찌할 바를 몰라 속으로 벌벌 떨면서 중얼거린 내면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该干些’로 조합할 수 있는 말뭉치들 중에 어떤 정조를 담아 내는가에 따라 한국어 문장은 미묘하게 달라지게 된다. 이 때문인지 안나 홈우드(Anna Holmwood)에 의해 영역될 때, 영어 제목은 《완전범죄》(A Perfect Crime, London: Oneworld Publications, 2015)로 바뀌어 출간되었다. 원제가 가진 복합적인 함의를 밋밋하게 만드는 제목이지만, 이처럼 익숙한 장르의 외피를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좀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도 저자와의 상의 끝에 《도망자》라는 제목이 선택되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쥐와 고양이》에 보다 가까워진 평범한 제목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원제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조금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 사실 《시계태엽 오렌지》와의 관련은 제목의 해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이의 이 소설을 읽는 누구나 카뮈의 《이방인》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 또한 굳이 그것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죄와 벌》을 모방하려 하였으나, 능력이 충분하지 않아 《이방인》의 경로를 따라 써내려갔다”고 밝히고 있다. 아이는 소설계의 ‘샤오미’가 되려고 하는 걸까? 어쨌든 용광로처럼 녹여내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중국식 모방의 긍정적인 측면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 한정하자면, 구조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표절이 아닌 현시대 중국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는 창작으로 읽을 점은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참고한 이런 고전들과 다르게 《시계태엽 오렌지》의 경우 《도망자》와 명시적인 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원제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무척 궁금하므로, 애초의 그 질문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이제 어떻게 될까, 응?”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총 14차례 사용된다. 무엇보다 1부, 2부, 3부의 첫 문단과 제3부 마지막 장(7)의 첫 문단을 모두 소설 속 화자인 알렉스의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이 14차례의 질문이 끌고 간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한 단계 성숙한 알렉스의 선택을 예고하는 “그게 바로 앞으로 벌어질 일이지.”(That’s what it’s going to be then)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이 질문은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힘이 되어 각 파트의 초반에 반복하여 언급되며, 일단 이야기가 본 궤도에 오르면 뒤로 물러선다. 이러한 반복적 사용은 알렉스의 폭력적 행동들이 ‘그 자신의 의지의 신중한 선택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추재욱,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폭력기계 알렉스: 들뢰즈적 관점에서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읽기」, 《현대영미소설》(21권 2호, 2014), 160쪽 재인용.) 그 선택의 결과가 언제나 악행으로 이어지더라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박시영 옮김, 183)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자기결정권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알렉스는 이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잃었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국가 시스템의 입장에서는 악행을 제거하여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박시영 옮김, 114)

‘선택’은 ‘망설임’이기도 하다. 기계적인 일처리가 가장 효율적임에도, 주저하며 고민하는 순간에 인간의 모습이 언뜻 드러난다. 자동적으로 흘러가게 두지 않고 그 상황을 돌아보며 사유가 시작된다. “인간이 선만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기만 한다면, 그땐 인간은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라는 작가의 말마따나 내면의 힘을 아무 제어 없이 실제 폭력으로 분출하는 악의 방향도,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된 선의 방향도, 머뭇거리거나 고민하지 않고 정해진 경로대로 움직인다면 시계태엽 기계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순수한 악인을 창조하였다.”

개인 대 국가라는 식으로 작품을 도식화하면 의미가 반감하겠지만, 《시계태엽 오렌지》가 겨누는 칼끝은 분명 개인의 악행보다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을 겨누고 있다. 그에 반해 외견상 《도망자》에서는 개인의 ‘묻지 마 살인’만 등장할 뿐 국가에 의한 폭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맞서려 한 것은 국가와 같이 거대한 무엇이 아닌 자신의 무료함과 무의미였다.

그런데 그 무료함을 ‘루도비코 실험’ 이후의 알렉스와 같은 상태였다고 볼 수 없을까?

1960년대 냉전 시기처럼 국가는 노골적이지 않다. 개인을 특정한 방향대로 움직이게 하는 국가권력은 함부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며, ‘루도비코 실험’과 같은 게 필요 없을 정도로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애초부터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만리장성과도 같은 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악행과 타락을 옵션에서 지운 선택이 자기결정권에 의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도망자》의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 작품에서는 그려지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선택의 주도권을 넘기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처음으로 의미있는 선택을 한 셈이다.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선택하도록 모두 넘기자.”

알렉스가 다시 악행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했을 때 비로소 “치유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도망자》의 주인공은 살인을 선택함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자기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상태에서 도망 다니며 비로소 어떤 충만감, 생명의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찰에서 작가로

삼촌이 군사학교 교무처 처장이라는 이유로 취향이나 적성에 상관없이 군사학교 입학이 내정된 《도망자》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아이궈주(艾國柱)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대학에 입학할 성적이 되었음에도) 경찰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불확정적인 미래를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안정에 머무를 것을 요구한 것이다.

흔히 그렇듯 개인에게 체제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거대한 체제로 투신하는 길밖에 없는 것으로 상상된다. 중국의 시골에서 벗어나려면 대학에 입학하거나, 농민공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자본의 하청 노동자가 되거나, 대도시로 시집을 가는 등의 방식이 안전한 선택이다. 아이궈주는 경찰학교에 남음으로써 대도시에 계속 머무르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호구(戶口) 때문에 결국 시골로 발령 났다.

깡촌의 민가 2층에 자리 잡은 파출소에 배정된 청년경찰 아이궈주의 매일 일과는 선임들과 마작을 하는 것이었다. 직위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앉아 마작을 치는데, 가끔 누군가 운이 나쁘면 자리를 바꿔 앉곤 했다. 이때의 경험을 아이는 몇몇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20대의 직원이 30대의 부주임이 되고, 30대의 부주임이 40대의 주임이 되고, 40대의 주임이 50대의 줄 끊어진 간부가 되었다. 머리숱이 적어지고 주름이 늘어났으며 사람이 갈수록 더 쩨쩨해졌다.”

그렇게 정해진 인생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은 “극도로 무료한 영생”이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가닿게 될 자신의 10년 후, 20년 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절망에 빠졌다. 체제 안에서 인정받고 승진하여 도시로 발령받는 것으로 안전하게 탈출하려던 그의 계획은 애초부터 한계가 정해진 것이었다.

이후 ‘나라의 기둥’이라는 무거운 이름과 안정된 경찰 직위를 버리고 성을 변용한 필명인 아이(阿乙)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탈출인지는 아직 속단하기 이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시골과 경찰 경험은 그에게 여전히 창작의 원천이 되는 배경이자 원경험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이의 소설은 자장커(賈樟柯)의 영화만큼이나 중국의 소외된 소도시와 시골 풍경을 날것의 속살까지 잘 그려내고 있다. 시골은 도시인이 꿈꾸는 고향이나 평온한 정원 같은 곳이 아니다. 개혁개방의 모토였던 ‘선부론’의 전제는 어느 단계에 이른 후에는 혜택을 나눈다는 것이겠지만, 한계를 모르는 자본의 특성상 그 시기는 한없이 유예되며 도시-시골의 위계를 영속화할 것이다. 개인의 호적지가 어디인지가 그의 신분을 결정짓고 삶의 선택들을 제한한다. 중국의 시골은 이미 연안 대도시의 식민지가 되어 있다. 단순히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고 경제적 발전에서 소외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가 지닌 온갖 폐해가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대도시와는 다른 방식의 야만이 살아 있다. 익명의 도시에서라면 어쨌든 숨 쉴 곳이 있겠지만, 전통의 속박에 여전히 매인 시골의 동성애자에게는 자폭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발렌타인데이 자폭 테러」)

「양촌의 저주」는 21세기 중국의 시골이 어떤 곳인지를 잘 그려낸 단편이다. 한 시골 아낙이 닭을 훔쳐 갔다고 의심한 이웃에게 저주를 날린다. “만약 댁이 훔쳐 갔다면 올해 댁네 아들이 죽을 것이야. 만약 훔치지 않았으면 내 아들이 죽을 것이네.” 다음날 닭은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 그해 설이 되자 이웃네 아들은 차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남방의 대도시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아낙의 아들은 설 전날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서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 농민공 신분으로 일하던 공장의 환경이 열악하여 몸을 망쳤던 것이다. 인권변호사가 도와주겠다고 찾아와도 아낙은 거절했다. 글로벌 자본의 하청기업이 아니라 자신의 저주가 아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소설은 비욘세의 팝송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전지구적 자본의 야만적 원시 축적인가, 아니면 계몽의 손길이 닿지 않은 초자연적 미신인가.

아이의 소설집은 하나의 탈출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벗어남’, ‘탈출’, ‘도망’은 아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지만, 탈출이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제한적인 자유의 대가는 산업재해로 죽음에 이르거나, “집도 없고, 차도 없고, 결혼도 할 수 없는, 없는 것 투성이”(《모범청년》)의 생활이다. 탈출에 실패한 자, 탈출한 뒤 곤경에 처하여 돌아갈 곳 없게 된 자들의 경험을 통해 아이는 저층사회의 청년들이 처한 불안한 현실과 비극적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 중 아이는 작품의 구조와 언어에 많은 공을 들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수공예품을 빚어내듯 정확하고 잘 다듬어낸 문장을 고심하여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작가이다. 한 인터뷰에서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만약 글자 하나가 벽돌이라고 했을 때, 그 벽돌로 성벽을 쌓는 것이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어떻게 쓸 것이가’의 문제를 고민하며, 여러 대가의 기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학생의 태도를 고수한다. 특히 타이완 작가 뤄이쥔(駱以軍)이 ‘동사의 지배자’라 칭할 정도로 아이의 동사 사용은 창의적이며 엄밀하다. 흔히 시를 평가할 때 사용된 ‘절차탁마’나 ‘퇴고’ 같은 말이 아이의 소설에 따라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공예로 빚어낸 그 문장들은 독자로 읽을 때의 쾌감과 함께 번역자에게 상당한 시련을 안겨 줬다. 원문이 가진 긴장감은 한국어로 옮겨지는 순간 너무 과하거나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 되어갔다. 중국어 문장으로 구워낸 도자기를 깨뜨려 한국어 본드로 이어붙이는 정도로는 애초에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깨진 조각들을 들여다보며 그 재질과 표면의 문양과 가마의 온도를 생각하며 새로운 항아리를 구웠다 깨트리기를 반복했다. 뭔가 거창해 보일 수 있지만, 깨진 원작을 이어붙인 진열품이 아니라 독자들이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항아리를 만들어내는 게 번역자의 역할일 것이다. 내가 사용한 흙과 온도가 원래의 도자기가 가진 강도에 다가갔기를 바라면서.

* 이 글은 《도망자》의 역자서문으로 작성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