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문학 2

이제 중국 고대의 문집(文集)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 고대의 문집은 매우 많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들의 저작과 달리 이것들은 사상 체계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문(诗文)은 문집이 될 수 있었다.

중국 고대에는 각 조대마다 유명한 문학가와 그들의 저명한 작품, 그리고 중요한 문집들이 있다.

먼저 한위문(汉魏文)이 있는데 이것은 후대 사람들이 편찬한 것이다. 한위대에 가장 중요한 문학가는 쓰마샹루(司马相如)․차이융(蔡邕)․장헝(张衡) 등이다.

쓰마샹루는 한부(汉赋)의 가장 뛰어난 작가다. 그의 부에는 《자허부(子虚赋)》 《상림부(上林赋)》 등의 작품이 있다. 장헝은 한대의 천문학가며 문학가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이경부(二京赋)》라는 명작이 있다.

다음으로는 삼국 시대의 문집이다. 삼국 시대 최대의 문학가로는 ‘건안칠자(建安七子)’가 있다. ‘건안’은 한 헌제(汉献帝) 때의 연호(196~220)며 ‘칠자’는 쿵룽(孔融)․왕찬(王粲)․류전(劉桢)․롼위(阮瑀)․쉬간(徐干)․천린(陈琳)․잉양(应玚)을 말한다.

건안칠자는 대부분 차오차오(曹操)의 주변 인물들로서 ‘삼조(三曹)’ 막부의 사람들이었다. ‘삼조’는 대문학가인 차오차오․차오피(曹丕)․차오즈(曹植)를 말한다. ‘삼조’는 시와 부 모두에 뛰어났다.

차오차오의 명작으로는 《귀수수(龜虽寿)》 《고리행(篙里行)》 등이 있다. 차오즈는 《백마편(白马篇)》 《송응씨이수(送应氏二首)》 같은 명저를 남겼다. 왕찬의 명작으로는 《칠애시(七哀诗)》가 있다. 천린의 명작으로는 《음마장성굴행(飮马长城窟行)》이 있다. 완위는 《가출북곽문행(驾出北郭门行)》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건안칠자와 삼조의 문학 작품은 한대 이후부터 삼국 시대까지의 문예중흥을 이루었으니, 건안문학은 나름대로 이채를 내뿜고 있었다.

세 번째는 진대(晋代)의 문학이다. 이때에는 시문에 뛰어난,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이들 칠현을 죽림이라고 이름 붙이는가?

원래 이 시기에는 청담풍(淸谈风)이 유행했다. 그리고 이 칠현들은 모두 청담가였다. 당시는 정국이 혼란했기에, 이러한 청담지사(淸谈之士)들은 현실도피를 위해 가만히 앉아서 현학(玄学)을 논하고 노장철학(老庄哲学)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다만 ‘무위(无为)’만을 주장했으며 ‘마음(心)’은 ‘산림(山林)’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선과 같이 되기를 바라게 만들었으며(望若神仙)’ ‘청고(淸高)’와 ‘대범함(旷达)’을 표방하여 생활이 매우 방탕했다. 류링(劉伶)이라는 사람은 매일 술을 마시고 취해서 옷을 벗은 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는 천지(天地)로 집을 삼고 집으로 옷을 삼는다고 말하며 종일토록 취해서 옷을 벗고 있는 것을 즐거워했다.

이러한 청담가들 가운데 주요 인물로는 지캉(稽康)․롼지(阮籍)․산타오(山涛)․롼셴(阮咸)․샹슈(向秀)․왕룽(王戎)․류링(劉伶) 등이 있다. 이들의 시문은 몹시 뛰어나 한때는 문학적으로 크게 흥성했다.

진대(晋代) 사람 타오쳰(陶潜)의 시는 매우 뛰어났다. 타오쳰은 쉰양(浔阳) 차이쌍(柴桑) 사람으로, 이곳은 지금의 쥬장(九江) 지방이다. 그는 현령의 관직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그는 전원시(田园诗)만을 씀으로써 중국 고대 전원시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유명한 《도화원기(桃花源记)》는 그가 만년에 지은 것으로 이상적인 낙원을 묘사한 것이다.

또 셰링윈(谢灵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산수(山水)를 시로 묘사해 냈다. 한편 이 시대의 유명한 문학 작품으로 《공작동남비(孔雀东南飞)》가 있는데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네 번째는 남․북조(南北朝)의 문학이다. 남조의 문학가로는 쉬링(徐陵)․위신(庾信)․양 원제(元帝)․바오자오(鲍照)․쟝옌(江淹)․양 간문제(简文帝)․자오밍태자(昭明太子)인 샤오퉁(萧统) 등이 있었다. 그들의 변문과 시는 매우 뛰어나긴 했으나, 이 시기의 시문은 극히 미려하고 정교한 데에만 치중했다.

자오밍태자 샤오퉁은 뛰어난 사람들의 작품을 많이 읽었으며 시를 특히 중시하여 고대의 시문선집인 《소명문선(昭明文选)》을 편찬했다. 이것은 당․송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까지도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시기에는 또 하나의 대 저작이 나왔는데, 바로 《문심조룡(文心雕龙)》이다. 작자는 산둥(山东) 사람 류셰(劉勰)다. 이 책은 문학창작을 전문적으로 논한 것으로 모두 50편이다. 여기에서는 각종 문체와 문학 작품에 대해 계통적이고 깊이 있게 분석, 평론하고 있으며 특히 변문(騈文)에 대해 크게 논평을 하고 있다. 류셰는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용이 좋아야 하며 문체의 화려함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서주(西周) 이래의 문학 작품에 전체적인 논평을 가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져 그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작가 류셰는 만년에 화상(和尙)이 되었다.

다섯 번째는 수대(隋代)의 문학 작품이다. 수 양제(炀帝)는 시를 지을 줄 알았지만, 그의 시작(诗作)에는 별다른 창조성이 없었다.

여섯 번째는 당인(唐人)의 문학이다. 이때의 문인들은 능히 자신의 문집을 편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대의 문학은 큰 성취와 발전을 가져왔다.

王明明 《李白诗意图》

처음에는 대 시인 리보(李白)․두푸(杜甫)와 바이쥐이(白居易)의 시작(诗作)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 산문가 한위․류쭝위안 등의 문장 개혁이 있었다. 리보는 자가 타이보(太白)로 당 왕조의 경내인 쑤이예(碎叶), 발하시 호의 남쪽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 지방은 중국의 영역이 아니다. 그는 다섯 살 때 부친을 따라 쓰촨(四川)으로 갔다.

이 낭만주의 시인 역시 일찍이 관직에 오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큰 웃음 지으며 문을 나서니, 나 같은 무리가 어찌 야인으로 있으랴!(仰天大笑出门去 我辈岂是蓬蒿人!)’ 하지만 결과는 좌절이었다. 그는 사방을 유람할 때,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유명한 시편들을 대량으로 썼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허의 물이 천상에서 내려와,
세차게 흐르다가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가지 못함을!
君不见黄河之水天上来 奔流到海不復回

또 루산(廬山)의 폭포를 노래한 것으로 이런 시가 있다. ‘흩날려 곧장 삼천 척을 떨어지니, 은하가 구천으로 떨어지는 듯하여라.(飞流直下三千尺 疑是银河落九天)’. 또 ‘촉나라 길의 어려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네.(蜀道之难难于上靑天)’와 같은 명시들이 있다.

또 사상을 편 시도 있다.

요, 순의 일은 놀라기에 부족하여라. 尧舜之子不足惊
송백은 본래 외롭고 곧나니, 松柏本孤直
복숭아와 오얏의 얼굴 되기 어렵구나. 难为桃李顔
어찌 눈썹을 찡그리고 허리를 굽혀 세도가를 섬길 것인가, 安能摧眉折腰事权贵
나로 하여금 환한 얼굴이 되지 못하게 하는구나. 使我不得开心顔

또한 서정시도 있다.

리보가 배를 타고 떠나려 하니, 李白乘舟将欲行
홀연히 들리는 강가의 답가행, 忽闻岸上踏歌声
도화담의 수심은 천 자나 되지만, 桃花潭水深千尺
왕룬이 나를 배웅하는 정에는 못 미치지 不及汪伦送我情

이것은 우정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도 있다.

침상 앞에 밝은 달빛 床前明月光
땅 위에 내린 서리인가 싶은데 疑是地上霜
고개 들어 명월을 바라보고 擧头望明月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低头思故乡

이 시는 천고의 절창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다. 이 백은 시선(诗仙)이라고 칭해졌으며 그의 시는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지금까지 전하는 시만도 1000여 수나 된다.

欧豪年 《杜甫诗意图》

대시인 두푸(杜甫)는 시성(诗圣)이라고 불렸다. 그의 시는 바로 시의 역사(诗史)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허난(河南) 지방에서 태어났다. 두푸가 타이산(泰山)을 보고 읊은 시구가 있다.

정상에 올라
한 번 둘러본다면
뭇 산이 작게 보이리니
会当凌絶顶 一览衆山小

이 시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큰 뜻을 세우도록 격려하는 데 인용되고 있다. 두푸 자신은 오랜 기간 빈곤과 전란 속에서 수없이 많은 훌륭한 시를 썼다.

아침에 부잣집 문 두드리고, 朝叩富儿门
저녁에 살찐 말 먼지를 따르네 暮随肥马尘
남은 술잔과 식은 고기 안주, 残杯与冷炙
도처에 비애와 신고가 잠겨 있나니 到处潜悲辛

부잣집 문앞에는 술과 고기 냄새 朱门酒肉臭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들의 뼈 路有冻死骨

나라는 깨어져도 산천은 남아 国破山河在
성에는 봄이라고 초목 우거졌나니 城春草木深

책을 읽되 만 권을 독파하고 读书破万卷
붓놀림 귀신이라도 있는 듯 下笔如有神

위인의 성벽이 아름다운 구절 탐하노니 为人性癖耽佳句
말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게 아니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니 语不惊人死不休

이렇듯 유명한 시구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가 시성(诗圣)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리고 그의 시가 시사(诗史)라고 여겨지는 까닭은 당대의 전란 중에 백성들의 질고를 반영한 시들을 썼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삼리(三吏)’, ‘삼별(三别)’ 등이 있는데,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关吏)」 「신안리(新安吏)」와 「신혼별(新婚别)」 「수로별(垂老别)」 「무가별(无家别)」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그의 일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며, 고금의 시단에서도 불후의 걸작들이다. 두푸는 모두 14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이제 바이쥐이(白居易)를 이야기해 보자. 그는 자가 러톈(乐天)으로 산시(山西) 사람이다. 이 대 시인도 사회 생활과 백성들의 고통을 묘사해 냈다. 그의 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장편 서사시인 「장한가(长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이다. 그는 십 오륙 세 때 이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암송되고 있는 훌륭한 시를 썼다.

언덕 위에 더북더북 무성한 풀은 離離塬上草
한 해에 한 번씩 시들고 우거지네 一岁一枯荣
들 불이 다 태우지 못하니 野火烧不尽
봄 바람 불어 또 살아나는구나 春风吹又生

그의 「매탄옹(卖炭翁)」 같은 작품도 매우 뛰어나다. 바이쥐이의 시는 깊이 파고들면서도 평범하고 통속적이므로 비교적 쉽게 이해된다.

당대의 수많은 유명한 시인들과 그들의 시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뿐만 아니라 학습되고 있다.

한편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로는 한위와 류쭝위안을 들 수 있다.

이번에는 천쯔양(陈子昻)이라는 사람을 얘기해 보자. 천쯔양은 남북조 시대의 퇴폐적인 음과 궁정 문학을 반대하고, 자신의 사상과 언어를 쓸 것을 주장하여 시문을 창작하는 데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또한 ‘자신의 견해를 그대로 펼칠 것(直抒己见)’을 주장했으며, 지나치게 갈고 다듬는 것은 필요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천쯔양 이후부터 문학 창작상의 대변화와 대혁신이 일어났다. 즉 사대부 문학이 궁정 문학을 대체했던 것이다.

한위와 류쭝위안의 문장도 천쯔양과 같이 변혁과 혁신을 꾀했다. 그러나 당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리상인(李商隐)같은 시인들이 나오자 예전의 퇴폐적인 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글자를 다듬고 꾸미는 데만 진력했다.

그러나 산문에는 이러한 변화가 없이 전국 시대의 ‘고문(古文)’이 성행했다. 이를테면 《맹자(孟子)》같은 고서들이 바로 이 시기의 산문가들이 모방할 것을 주장한 문체였다. 당대는 중국 고대문학의 최 전성기로서 시와 문이 함께 성행했다.

일곱 번째는 송대의 시(诗)․사(词)․문(文)으로 모두 새로운 진전을 보였다. 이 시기에는 문장을 쓰는 데에도 계속 ‘고문’을 장려하여 어우양슈(欧阳修) 같은 대학자가 한위․류쭝위안의 문풍(文风)을 계승했다. 뿐만 아니라 시에도 변화가 있었으며, 특히 쑤스(苏轼)․황팅졘(黄庭坚)․왕안스(王安石) 등이 시를 잘 지었다.

陶义美 《苏东坡赏砚图》

북송․남송 때에는 뛰어난 문학가들이 매우 많았으며 특히 당송팔대가 중에는 송나라 사람이 여섯 명이나 된다.

어우양슈(欧阳修)는 쟝시(江西) 사람으로, 그의 문장에는 거침이 없으며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가 지은 《취옹정기(醉翁亭记)》와 《추성부(秋声赋)》는 후인들이 암송하는 작품이 되었다.

송대에는 사(词)가 생겨났다. 신치지(辛弃疾)․리칭자오(李淸照) 같은 유명한 사인(词人)들이 있었는데, 이 두 사인은 모두 산둥의 지난(济南) 사람이었다. 리칭자오는 고대의 여성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학가로서 온화하고 솔직한 그녀의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루유(陸游)는 자가 팡웡(放翁)으로 사오싱(绍兴) 사람이다. 그는 남송의 유명한 대시인이었으며 또한 애국 시인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시아(示儿)」라는 시를 썼다.

죽으면 만사가 허무한 줄 알지만 死去塬知万事空
다만 슬프기로는 천하의 통일을 못 보는 것 但悲不见九州同
나랏님 군사가 북쪽 중원 되찾는 날 王师北定中塬日
잊지 말고 제사 지내며 네 아비에게 알려다오 家祭无忘告乃翁

송대는 소설 문학에서도 단편 백화소설이 처음으로 나온 시기였다.

여덟 번째는 원대(元代)다. 원대의 문학에서 주요한 것은 잡극(杂剧)이다. 그러나 원의 잡극은 원나라 사람들의 말로 씌어졌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 잡극은 반드시 4절(折)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원곡은 잡극으로 원대의 잡극에는 가사와 반주 악기, 그리고 무용과 이야기가 있다.

희극은 당대에 이미 생겼는데, 송대에는 여러 지방에서 공연되었다. 원대의 잡극은 송(宋)와 금(金)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궁조(宫调)를 흡수하여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홉 번째는 명대(明代)다. 명대의 문학 역시 복고(復古)를 내세웠는데 리판룽(李攀龙)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돌아가려 했던 옛것이라 함은 한위 등이 돌아가려 했던 것보다 더 옛것이었다. 문장은 마땅히 주대(周代)의 것을 배워야 하며, 선진 제자의 것을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그 이래로 문장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명대의 시는 여전히 당대나 송대 시의 격조를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원대의 잡극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전기(传奇)로 바뀌었다. 전기는 잡극보다 절수(折数)가 더욱 많아 이십 절이나 되었으며 사십 절로 된 것도 있었다.

명 초에는 뤄관중(羅贯中)이라는 사람이 만당(晩唐) 이후로 민간에 전해져 오던 삼국 고사(三国故事)와 삼국의 역사, 그리고 《삼국지(三国志)》 속의 「주(注)」에 의거하여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를 창작했다. 또한 명대에는 스나이안(施耐庵)이 쓴 쑹쟝(宋江) 고사 《수호전(水浒传)》과 쟝쑤(江苏) 사람 우청언(吴承恩)이 쓴 장편 신화소설 《서유기(西游记)》가 있다. 《서유기》는 《삼국연의》, 《수호전》과 같이 송대 이후 오랜 기간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사에 근거한 것으로, 당승(唐僧)이 불경을 구해 온다는 이야기다. 이 외에도 《금병매(金甁梅)》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명대 문학의 특징은 몇 부의 장편 백화소설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명대 이전의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즉 중국인들이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명대부터인 것이다.

열 번째로는 청대(淸代)의 문학 작품이다.

청대의 문장은 고증학적인 문장이 가장 뛰어났다. 학문을 연구하는 데는 고증하는 문장이 좋다. 문장 속의 말에는 모두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쿵상런(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과 훙성(洪昇)의 《장생전(长生殿)》 같은 작품들이 있다.

장편소설로는 차오쉐친(曹雪芹)의 《홍루몽(红楼梦)》과 우징쯔(吴敬梓)의 《유림외사(儒林外史)》가 있다. 이 두 소설 중 특히 《홍루몽》은 영향력이 대단히 커서 건륭(乾隆) 이래로 이 책을 연구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 이 책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학문을 ‘홍학(红学)’이라고 했는데, 심지어 외국에도 ‘홍학’이 있다.

이밖에도 푸쑹링(蒲松龄)이 문언으로 쓴 단편소설 《요재지이(聊斋志异)》가 있다. 한편 청 말에는 「견책소설(谴责小说)」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이러한 소설들은 매일매일 세상에 알리려고 급히 쓴 것이기 때문에 문장과 구조 면에서는 그다지 치밀하지 못하다. 그 중에서도 《얼해화(孼海花)》가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청대의 문장은 퉁청파(桐城派) 고문의 영향이 가장 컸다. 퉁청파를 주도한 인물로는 팡바오(方苞)․류다쿠이(劉大櫆)․야오나이(姚鼐) 등이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안후이(安徽)의 퉁청(桐城) 사람들로서 모두 산문가였으며 팔고문(八股文)을 반대하고 한위(韩愈) 등 팔대가의 고문을 제창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장은 매우 깔끔하고 간결하다. 청 말에는 고문과 백화문의 중간에 위치하는 량치차오(梁啓超)의 문장이 잠시 유행되었다. 그의 문장은 읽기가 쉽고 이해하기도 쉬운 데다 생동감이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청대의 시로는 황쭌셴(黄遵宪)의 시가 읽을 만하다. 그는 애국 시인으로서 아편 전쟁 이후 그 당시의 일들을 생생하게 시로 읊음으로써 매우 특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