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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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아시아고대사 수업에서 오랫동안 우려먹고 있는 책이 두 권 있다. 그 첫 번째가 약 15년 동안 읽힌 리쉐친/심재훈 옮김 [중국 청동기의 신비] (학고재, 2005)인데, 최근에야 초판 2000부가 다 소진되었다. 출판사에서 Ebook 형태로 재판을 내고 싶어 했는데, 중국 출판사 측의 무리한 판권 요구 때문에 무산되었다. 당장 내년부터는 이를 대체할 다른 책을 찾아야 한다.

두 번째는 10년 이상 써온 김한규, [요동사](문학과지성사, 2004)다. 이 책은 분량도 많고(742쪽), 지루하기도 해서, 김한규 교수가 그 내용을 요약한 “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이: 요동과 티베트 역사공동체의 역사적 위상”(임지현 편,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휴머니스트 2004, 수록)을 읽게 한다. 이와 함께 [요동사]에 대한 꽤 많은 서평 중 조법종의 “요동사의 입장에서 본 고구려사의 문제점”([내일을 여는 역사] 2007년 봄호 수록)과 김한규 교수가 그 서평들에 대한 반론으로 쓴 “나의 책을 말한다: [요동사]” ([한국사시민강좌] 48, 2008, 수록)도 추가로 제공한다.

두 책 모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대체하는 글쓰기 과제의 주 자료다. 전자는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서평의 형식을 요구하고, 후자는 자유롭게 비평글을 쓰게 한다. 학생들이 이 과제의 결과물로 제출하는 글에 이구동성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놀라움과 그동안 받은 역사교육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이다.

[중국 청동기의 신비]가 비파형동검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던 기존 지식 체계에 대한 실망감이라면, [요동사]는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 동북공정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강한 반감에 대한 곤혹감과 요동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한국 고대사의 선험적 인식 체계에 대한 당혹감을 표출한다. 한국사의 체계를 옹호하는 관점에서 [요동사] 자체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경우도 있으며, 역사공동체 개념에 대한 논리적 비판도 자주 등장한다. 이번 학기말 학생들이 써낸 글을 읽으면서 다양한 비평이 가능한 팔색조같은 주제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학생들과의 토론을 통해 논리를 가다듬으며 2017년에 당시까지 [요동사]를 둘러싼 여러 논의를 망라하여 “‘요동사’와 그 이후: 참여자의 관찰자의 시각”이라는 제목의 비평논문을 쓴 적이 있다([역사학보] 234집). 이어지는 내용은 주로 이 논문을 토대로 한다.

[요동사]의 핵심 논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바로 “근대 국가 성립 전의 중국①”과 “청나라의 강역을 바탕으로 세워진 거대한 근대국가의 국호로서 중국②”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김한규는 장기에 걸친 전근대 역사에서 상당히 유동적이었던 ①의 중국 개념을 “역사공동체로서의 중국”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틀로 중국사를 바라보면 오늘날의 국경을 기준으로 그려진 ②의 거대 중국사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진한 제국을 영위했던 역사공동체로서의 중국인들이 오늘날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흉노를 자신들과 같은 족속으로 보았을 리 만무하고, 수당 제국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흉노나 고구려처럼 오늘날 ②의 중국 영역에 포함된, 그래서 중국사의 일부로 서술되기도 하는, 고대 이래 무수한 변경의 족속이나 정치체들을 모두 ①의 역사공동체로서 중국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요동 혹은 북방에서 발흥하여 중원이나 중국 전역을 지배한 정복왕조인 요, 금, 원, 청을 ①의 중국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당위성이 있는가? 따라서 요동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하기도 한 요, 금, 원, 청을 ①의 역사공동체로서의 중국과는 별개인 “요동 역사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국 고대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김한규는 삼한에서 유래한 韓國이라는 용어를 고려시대 이래로 세계가 공인하는 한국인의 자의식을 표현한 고유의 이름으로 본다. 그것은 ①의 역사공동체로서 중국과 유사한 개념이다. 중화민국 성립 이후 중국이 국호로 사용되었듯이,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한국도 국호의 반열에 올랐다. 고대 이래 중국인들이 주목한 韓國(삼한)이 요동 및 ①의 중국과 구별되는 별개의 역사공동체로 병존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는?

물론 김한규 역시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요동에서 발생해 요동의 대부분과 한국의 일부를 아울러 지배한 통합국가로서 한국사의 초기 국면에 기여한 요소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역사가들이 현재 자신들의 영역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서술할 수 있듯이, 한국의 역사가들 역시 당연히 이들을 한국사의 일부로 연구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들 국가들이 주로 요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고 한국에서는 부수적 주변적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요동이라는 제3의 역사공동체의 일부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나아가 고대국가 체제가 완비된 것으로 보는 고조선에서 그보다 낮은 단계인 성읍들로 구성된 삼한으로의 역사 이행이라는 한국의 정통사관은 상당히 어색한 비논리적 역사관인 만큼, 한국사의 핵심은 “삼한, 삼국(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 포함), 신라, 고려, 조선”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손씨의 요동국(2-3세기)과 모용 선비, 요, 금, 원, 청을 “요동 역사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로 요동과 대동강 이북에 존재했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역시 이들 요동 국가들과 함께 자리하게 하는 게 순리적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발흥한 역사공동체가 요동을 점유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고대 이래의 요동을 독자적 지역 개념 이상의 역사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지 여부다. 김한규 역시 현재까지의 연구로 요동에 단일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춘 독립 문화영역으로서 공동체를 설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추후 문화적 측면의 연구를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요동 역사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지속적인 융합의 과정에 주목한다. 어떤 군소 역사공동체가 다른 역사공동체들과 융합, 흥기하여 요동을 점유하다 그 통치가 소멸하는 순간 다른 공동체들이 또 다른 융합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로 창출되는 과정이 반복되며 요동 역사공동체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한규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 그가 주목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래로 “만주중심적 관점”으로 청대사를 이해하자는 이른바 ‘신청사’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신청사’의 논리를 요동에서 발흥하여 중원까지 차지한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 학자들이 [요동사]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지만, [요동사]는 중국과 한국 모두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요동 역사공동체를 중국 역사공동체로부터 분리시켜 거대 중국사를 해체하려는 김한규의 야심찬 기획은 그 자체에 내재한 문제점 못지않게 한국고대사학계에 안긴 영역 축소라는 폭탄 때문에라도 도저히 수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동사]에 호응하며 “고구려사를 고구려인들에게 돌려주자”는 슬로건을 내건 임지현이 그 폭탄을 “한국의 ‘지리적 신체’(Geo-body)에서 고구려를 떼어 내야 하는 아픔”으로 묘사했듯이, 강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다음 회에서 살펴볼 여러 학자들의 반론은 오히려 고조선에서 시작되는 한국고대사 체계의 취약성을 부각하며 [요동사]의 논리를 강화해주는 경향이 있다. 21세기가 20년 넘게 경과한 현 시점에 나와 함께 [요동사]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도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요동사]에 공감을 표명한다. 시대의 변화를 실감한다(지난 10년 동안 학생들의 인식 변화가 뚜렷하다. 특히 이번 학기 말 30여명이 쓴 비평글에서 한국 학계의 논리만 옹호하는 학생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대부분 중립적 입장에서 [요동사]의 장단점을 지적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구려와 요금원청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요동사]가 태생적으로 처한 주인 없는 역사라는 비극적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보다 감정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역사라는 학문의 근본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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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창은 다양하다. 같은 창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고, 내어다 볼 수도 있다. 그 창에 선글라스처럼 다양한 색깔이 들어갈 수 있고, 창의 크기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 지난 세기의 한국사 연구는 대체로 최대한 키워진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요즘은 그 창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내어다보기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나는 20년 전쯤 동북공정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일 때 중국 측의 논리가 좀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당시 한국의 경우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동원된 반면, 중국 측은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 위주였다는 점이다. 지방 학자들을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고, 중국의 다양성도 인정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북경대학 같은 중앙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었다. 내가 만나본 중국학자 대부분은 동북공정이 뭔지도 몰랐다. 요즘까지도 한국에서 동북공정 운운하는 걸 보며 동북지방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중국학자들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어쨌든 당시 논쟁에서 중국학자들이 동북공정의 중요한 논거로 든 것 중 하나가 고구려는 중국 왕조의 지방 정권이라는 주장이었다. 당연히 한국 측에서는 그에 대한 강한 반론을 제기했고, 결국 이를 둘러싼 논쟁 자체는 내가 보기에도 한국 측의 판정승이었다. 나는 그때 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의 유적을 비롯한 주요 활동 영역이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지 의아했다. 미국 땅을 무대로 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가 미국사의 일부이듯, 현재 중국 강역 내에 있는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속인주의’와 ‘속지주의’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영토를 확장해간 나라에서 속인주의 역사 인식을 고수하기는 어렵다. 한국처럼 영토에 수세적인 나라는 대체로 속인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럼에도 고구려 지방정권 운운한 중국학자들은 속인주의 측면을 중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보는 창은 다양한데도 말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배경에는 당연히 속지주의 인식이 있었을 테니, 속인주의에 입각한 한국 측과의 논쟁(역사전쟁으로까지 불리었다)은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축구선수와 야구선수를 한 운동장에 집어넣고 싸우게 하는 우스꽝스런 경쟁에 불과했다.

그래서 김한규 교수가 [요동사]라는 절충적인 안을 제시한 것이지만, 내가 이 문제를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까닭이 있다. 한국 학계에서 [요동사]를 비판한 논리 역시 고구려 지방 정권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지난 6-70년 동안 한국인의 뇌리를 장악해온 거대한 고조선에서 삼국통일까지의 속인주의적 지배 서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상식적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고조선처럼 장기간 존속한 국가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는가? 고조선의 2000년 이상 존재를 수용하는 연구자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구자들의 인식과 교육현장의 현실 사이에 괴리 크다. 둘째, 한국 학계의 속인주의식 관점에 따른다면 오늘날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한 연나라 출신 위만은 중국계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한민족의 초기 국가로 중시되는 위만조선이 연과 조(趙), 제(齊) 등 중국계 유이민을 주축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점은 한민족의 원류와 관련하여 어떤 타협이 가능한가? 셋째, 한의 4군 중 당시 동북아시아의 가장 선진 지역이었을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400년 이상 존속한 낙랑군과 이후 공손씨(公孫氏)에 의해 그 남쪽에 설치된 대방군은 한국고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최근 들어 호구부목간과 분묘 등 새로운 자료의 출현으로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하고 있는 낙랑 연구는 한국고대사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넷째,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만주의 한민족 선조 국가 계보는 구체적 근거가 있나? 다섯째, 한반도 남쪽에 존재한 삼한과 백제 및 신라는 주로 만주에 위치한 위의 국가들과 속인주의적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나?

이러한 의문이 김한규가 [요동사]를 쓴 주요한 원인의 일부였지만, 국내 학자들이 [요동사]에 대해 제기한 비판 중 “요동 역사공동체” 개념의 모호함을 제외하면, 영양가 있는 건 별로 없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요동사』에 대한 국내 학계의 가장 충실한 서평은 저자 김한규도 인정한 조법종 교수의 “학문적으로 창작된 제3의 역사공동체”론([내일을 여는 역사] 2007년 봄호 수록)이다. 국내 연구자들의 요동 인식을 대변하는 듯한 조 교수의 주장은 [요동사]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 이상으로 재반박의 여지도 크다.

첫째, 요동과 한반도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고인돌과 비파형동검 등과 같은 고고학적 문화를 공유하는 동일 문화권이었고, 우리민족을 표현한 종족 명칭인 예, 맥, 한은 이러한 동일 청동기 문화와 계통을 지닌 종족이 지역적으로 분화하여 중국인들에 의해 달리 표현된 것이지 이질적 종족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 요동과 한반도를 이어주는 공통분모라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설사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문화요소의 분포를 통해 동일한 정치체나 민족을 상정하기는 곤란하다. 예, 맥, 한의 민족적 연관성에 대한 주장도,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기 어려울뿐더러, 원래 한민족이라는 큰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선험적 인식에 기댄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둘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동일종족공동체라는 인식이다. 고구려인들이 중국과 구별되는 백제와 신라까지 포괄하는 별도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광개토대왕묘비의 수묘인 집단에 포함된 한예(韓濊) 집단을 종족적 일체감을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로 본다. 백제와 고구려가 부여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는 사실 역시 강조한다.

하지만 중국의 천하관에서 운위되는 사이(四夷), 즉 만이융적은 확실히 중국과는 구분되는 존재였다.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천하관의 근거로 활용되는 충주(중원)고구려비에서 이(夷)로 명시된 신라 역시 고구려와는 이질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증거로 보는 게 맞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명시된 수묘인들(舊民 110家와 韓濊 220家) 중 한예는 왕이 무력으로 복속시킨 족속이라고 나온다. 수묘라는 직역 자체가 자유보다는 인신의 구속을 전제로 한 것이듯, 이들 모두는 매매의 대상으로 명기되어 있다. 한예의 수묘인 차출은 오히려 이들이 고구려인들과는 이질적인 포로 같은 존재라는 점을 강화해준다.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 기원설 역시 정치적 필요에 따른 연결이라는 마크 바잉턴의 해석이 있고, 설사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위만의 고조선 왕위 찬탈처럼 일부 지배계층의 이동에 불과하다.

셋째,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동일한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으로, 일부 문헌에 이들 사이의 대화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 실제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어떤 언어학자도 백제/신라와 고구려의 언어가 소통 가능할 정도로 유사했다고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문헌에 나타나는 그러한 소통 사례들이 특수한 상황일 가능성—소통이 가능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였거나 통역의 누락, 혹은 문헌의 저자가 그렇게 가정하고 서술—을 열어놓고 생각해야 한다. 『춘주촤전』이나 『국어』 같은 중국 고대 문헌에도 북방의 진(晉)나라와 남방의 초(楚)나라 사람들이 통역 없이 직접 대화한 사례들이 많지만, 이들의 언어가 같았으리라 보는 학자들은 아무도 없다.

넷째, 고구려의 부여 계승성 및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부각과 함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가 『삼국사기』에서 정리되어 1100년 동안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이들의 계승성을 부인하기 어렵고 고려시대 이래 고조선과 고구려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간주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계승성은 『금사(金史)』에 여진족 금나라의 선조가 말갈과 고구려, 발해와 모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언급된 것처럼 요동에 존재했던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한반도와의 연관성 못지않게 요동 역사공동체설을 강화해주는 측면도 있다.

조 교수의 반박이 거대한 한국사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좀 더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위에서 지적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동사]가 역사 공동체라는 논리로 요동에서 명멸했던 정치체들을 모호하게 하나로 묶듯이, 한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고조선에서 통일신라까지의 단선적 서사에도 많은 자의적 매듭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좋겠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역사가 그런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인들, 특히 고대사 종사자들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한국 고대사의 틀을 만들어준 일연 및 김부식과 그 편찬자들께 깊이 감사드려야 한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당시로서는 새로웠을 그 틀이 없었더라면 [요동사]와 같은 도전에 쉽게 대항할 수 있었을까?

한 사회를 주도하는 지배적 역사 서사는 그 사회의 주류와 다수의 지지를 얻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결국 시대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서사를 토대로 구성된 굳건한 학술 생태계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디게 일어난다. 그래도 내가 사학과의 수업 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김한규의 과감한 도전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준다. 지배 서사에 대한 도전은, 역사가들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도전으로 인해 역사의식이 성장하고 진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