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2-신장서 완성된 만주·몽골 북방동맹, 동귀서천의 역사드라마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바인부루커 초원을 흐르는 사행천 카이두하의 석양.

신장의 동부 하미 부근에서 시작하여 서로 달리는 톈산(天山) 산맥은 해발 평균 4천여 미터이고 남북으로 폭이 250~350킬로미터나 된다. 우리의 통상적인 지리 관념에서는 실감나지 않는 광대한 산지다. 톈산은 우루무치 부근을 지나면서 주간과 남맥 북맥, 세 갈래로 갈라진다. 넓게 퍼져가는 톈산은 설산 아래로 계곡과 산록을 펼치면서 곳곳에 푸른 초원을 들여앉혔다.

바인부루커(巴音布魯克) 초원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다. 구릉에 구릉이 이어지면서 진하지만 부드러운 녹색의 유채화를 펼쳐준다. 먼 곳에 시선을 던지면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설봉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눈 녹은 물은 지표를 적시고 흘러나와 강으로 모여 흐른다. 남천(藍天)과 설산과 초원과 강물의 조합이 환상적이다.

백조의 호수 톈어호(天鵝湖)도 바인부루커 초원에 있다. 설산이 되비치는 호수 수며에 백조 무리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진저리 치는 뱀처럼 제 몸뚱이를 이리 휘고 저리 틀면서 장관을 이루는 사행천은 여행객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당긴다. 그 위에 석양이 붉은 빛을 쏟아 부으면 그야말로 환상이다. 잠시 후에 깨어나면 이번에는 별들의 대합창이 불곷놀이처럼 퍼진다. 신장 사람들은 유라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이라고 한다. 나는 흔쾌히 동의한다.

자연의 매혹만 있을 것 같은 초원이다. 그러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주 바인궈렁(巴音郭楞) 몽골자치주 허징현(和靜縣)이란 주소가 그곳에 쌓인 역사를 말해준다. 바인부루커 초원은 현재는 중국의 영토이고 과거에는 몽골 사람들의 역사가 쌓인 곳이다. 몽골에서도 오이라트라고도 하는 서몽골의 토르구트(중국어로 土爾扈特) 사람들의 땅이다.

토르구트족의 동귀, 시보족의 서천

1771년, 지금으로부터 247년 전 어느 여름날, 당시 청나라의 국경지대인 이리하(伊犁河)의 강변. 청나라 군대의 한 장수가 8~9만(4만3천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명에 이르는 부중을 맞이했다. 장수는 석백영 총관 이창아(伊昌阿), 이창아가 맞이한 부중은 우바시가 이끄는 토르구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몽골 오이라트의 내전을 피해 3천여 킬로미터나 서천했다가 143년 후에 다시 조상의 땅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7개월에 걸쳐 러시아 추격군을 떨쳐내는 고난의 행군에 지친 이들에게, 청나라는 식량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 아름다운 바인부루커 초원을 그들의 목양지로 내준 것이다. 이들은 왜 떠났고, 청나라는 왜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받아들였는가. 그 배면에는 만주족과 몽골이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거대한 북방의 역사가 있다.

청나라는 이전의 명나라나 지금의 신중국보다 훨씬 넓은 판도를 이룬 동아시아 최대의 제국이었다. 서쪽으로는 신장을 넘어 카자흐스탄의 발하슈 호수까지, 북으로는 몽골공화국 영토를 모두 복속시켰다. 동으로는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광활한 땅도 전부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바깥에서 둘러쌌던 몽골 신장 티베트 등 변방을 전부 장악하면서 중원의 문명을 통째로 삼켜 제국을 세웠다. 명은 서북으로는 장성을 쌓고 동남으로는 정화의 방대한 항해기록을 태워 없애면서까지 쇄국을 했다. 명과는 달리 청나라는 광활한 영토에 서로 다른 민족과 체제와 문화가 공존하게 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제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야말로 대청제국이다.

대청제국은 민족의 구성과 연대란 측면에서 만주족이 몽골을 동맹으로 끌어들여서 이뤄낸 거대한 업적이다. 몽골은 광대한 지역에 여러 부로 나뉘어 있었다. 만주족은 이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켜 자신들의 팔기(八旗) 체제 안에 흡수했다. 그리고는 혼인과 교육과 회맹을 통해 동맹으로 촘촘하게 얽어맸다. 만주족 황제의 황후나 비빈들 가운데 상당수가 몽골 수장들의 직계가족 출신이다. 그러나 동맹으로 품어 들이지 못한 나머지 몽골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17세기 몽골은 남몽골 서몽골 북몽골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와 신장, 몽골공화국에 해당한다. 청나라가 흥기하던 17세기 전반 남몽골과 북몽골은 이미 만주족의 리더쉽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서몽골 곧 오이라트부는 쉽게 복속되지 않았다. 오이라트는 준가르 호쇼트 호이트 그리고 토르구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준가르를 주력으로 하는 유목국가를 세워 그 위세가 당당했다.

청나라와 준가르는 1690년 베이징에서 300여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츠펑(赤峰) 인근에서 첫 전투를 벌인 이후 1758년까지 70년 가까이 상쟁했다. 최후의 결과는 청나라의 승리였다. 청나라는 최후의 순간 준가르에 대해 가혹했다. 60만 인구의 90%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준가르를 절멸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광대한 서역 땅을 통괄하여 신장(新疆)이란 새로운 명칭을 부여했다. 그래서 지금도 신장이다. 만주-몽골 동맹에 편입되지 않았던 서몽골에 대한 불가역적 승리를 선언한 셈이다.

준가르가 청나라와 본격적으로 상쟁하기 전, 지금 신장의 서북부 타청(塔城) 지역에 살던 토르구트는 준가르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1628년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카자흐 초원을 지나 우랄강을 넘어, 볼가강 하구에 자리를 잡았다. 3천 킬로미터에 가까운 대이동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가 동진해왔다. 정치적 협력과 군사적 갈등이 교차했으나 러시아의 간섭은 갈수록 심하고 거칠어졌다. 토르구트는 결국 러시아의 간섭에서 탈출하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771년 1월 초 다시 고난의 행군에 나섰던 것이다.

청나라 입장에서 토르구트의 귀순은 커다란 정치적 선물이었다. 몽골의 마지막 유목국가 준가르를 힘으로 정복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 서몽골 오이라트의 일파였던 토르구트가 자발적으로 귀순해온 것 아닌가. 귀순해온 사람들을 구휼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신장은 이제 완전한 청나라의 땅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재확인한 셈이었다.

건륭제는 토르구트의 수장인 우바시를 열하(지금의 청더)의 피서산장으로 불렀다. 우바시는 호위병들과 함께 3천여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달려 건륭제를 알현해야 했다. 피서산장은 애당초 청나라 황제가 변방의 제민족의 수장들과 회동하고 친견하는 북방 통치의 중심지였다. 건륭제는 손수 토르구트 전부족 귀순기와 구휼기 두 편을 글을 썼고 이를 비석에 새기게 했다. 두 개의 비석은 피서산장의 외팔묘(外八廟)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보타종승지묘 앞에 세워졌다. 비문은 만문 한문 몽골문 티베트문 등 네 개의 문자로 새겼다. 이것은 청의 황제는 “만주의 한이자 몽골의 대칸이고, 티베트의 차크라바르틴(극락정토의 불법을 현세에 구현하는 존재)이자 중원의 황제”[이 부분은 이훈 저 <만주족 이야기>에서 인용한 것임]라는 화려한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리하에서 펼쳐진 토르구트의 귀순 장면에는 또 하나의 드라마가 삽입돼 있다. 토르구트를 맞이한 석백영(錫伯營 總管) 총관 이창아가 그 주인공이다. 석백은 신장의 정반대편인 동북에 살던 시보족의 한문 표기다. 시보족은 대개 몽골계로 분류된다. 남천하지 않고 남은 선비족의 한 갈래인 실위(室韋)의 후손으로 추청하기도 한다.

1758년 청나라가 준가르를 멸망시킨 결과, 이리하 일대는 사람이 없는 빈 땅이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몽골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청나라는 성채를 건설하면서 이곳에 영구 주둔시킬 병사들을 차출했다. 이때 시보족도 선발대상이 됐다.

시보족 가운데 20~40세의 병사 1,020명과 가족 3,275명이 차출되었다. 이들은 1764년 4월 18일 선양의 가묘에 집결하여 제사를 지내고 친인척들과 작별을 했다. 15개월 동안 몽골초원을 가로질러 알타이산을 넘어 이리 지역까지 장장 4천 킬로미터 가까이 이동했다. 시보족의 서천(西遷)이라고 한다.

시보족은 신장에 도착해서 병사로서의 의무를 다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도 해야 했다. 석백영은 이들 시보족들로 조직된 청나라 군대다. 이들의 후손은 지금도 이리 카자흐 자치주의 차부차얼(察布查爾) 시보족 자치현에 많이 살고 있다. 매년 4월 18일을 서천절이라 하여 민족의 중요한 기념일로 삼는다. 선양의 시보족과 신장의 시보족이 상호방문을 하기도 한다.

신장의 여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토르구트의 동귀를 묘사한 그림의 하나. 우측 중간에 토르구트의 수장인 우바시가 있다

잠시 이리하 강변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3천여 킬로미터 고난의 행군으로 동귀해온 토르구트를, 4천여 킬로미터를 서천해온 시보족 장군이 맞이하는 광경, 그 자체는 각론이다. 총론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만주와 몽골의 북방동맹이랄 수 있다.

이 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누구나 각자의 발상법을 발동할 수 있다. 나는 그 무대와 그 거리를 음미한다. 우리의 육로는 자동차로 네댓 시간이면 바다나 DMZ에 막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큰 나라에 기대어 안온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갇힌 사고에 갇혀있을 수도 있다. 우리 역사는 동아시아의 북방 또는 변방과 맥을 같이해 온 게 많다.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의 삼국시대, 고려 발해의 남북국 시대가 그랬다. 그러다가 조선에 와서는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반도의 나라로 굳어진 것 같다. 우리는 동귀 서천의 대하드라마를 보면서 굳어진 우리의 상상력을 더 넓힐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동귀영웅도, 출처 바이두

끝으로, 토르구트의 동귀에 합류하지 못했던 잔류자들이 살던 볼가강 서안은 지금 러시아 연방의 칼미크 공화국이다. 칼미크란 말은 투르크어에서 ‘남은 자’를 의미하는 칼막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