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 북 같은 꾀꼬리鶯梭/송宋 유극장劉克莊
擲柳遷喬太有情 베틀 북인가 훌쩍훌쩍 정이 넘치는데
交交時作弄機聲 화응해 우는 소리 베 짜는 소리 같네
洛陽三月花如錦 낙양의 삼월은 꽃이 비단같이 고우니
多少工夫織得成 얼마나 공들여야 그런 비단을 짜낼까
‘사(梭)’는 베틀의 ‘북’을 말한다. 오늘날은 화학 섬유가 나와 실을 사용하지 않고 천을 만들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모든 천이 그 재료만 다를 뿐 만드는 방식은 동일했다. 즉 세로로 먼저 실을 촘촘히 걸어 놓고 가로로 실을 하나씩 어긋나게 끼워 넣은 뒤에 그것을 밀착시키면 된다. 이런 과정을 정교하게 무한 반복하는 것이 ‘베 짜기’이다.
베를 짜는 기구를 ‘베틀’이라고 한다. 이 기계는 상당히 많은 소도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실을 짜는데 필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 북이 아주 흥미롭다. ‘날실’이라고 부르는 세로로 미리 걸어 놓은 실을 서로 엮이게 틈을 만들어 그 틈 사이로 ‘씨실’을 집어넣는다. 이 때 그 날실 사이의 틈 사이로 한 번은 왼쪽에서, 한 번은 오른 쪽에서 씨실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그 씨실을 매 가닥을 잘라 집어넣는 게 아니라 실꾸리를 넣은 날렵한 배처럼 조각한 나무로 깎은 기구를 좌우로 번갈아 집어넣는다. 그 기구가 바로 ‘북[梭]’이다.
이 북의 크기나 날아다니는 모양이 꾀꼬리의 크기와 행동을 닮았기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을 ‘꾀꼬리 북[鶯梭]’이라 하였고 1구에 그런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또 베를 짤 때 나무 도구들이 서로 부비면서 나는 소리는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이 시의 2행에서 비유한 것이다. 결국 1구와 2구는 꾀꼬리의 행동과 울음을 베틀의 북과 베를 짤 때 나는 소리로 비유한 것이다. 비유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주변에 흔히 있는 사물을 동원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이 누구나 아는 베틀의 북과 베 짤 때 나는 소리로 비유한 것인데 지금 우리는 그런 모습이나 소리를 들을 기회가 귀하니 오히려 이런 비유가 생소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거꾸로 이런 비유를 통해 오히려 예전 사람의 일상 모습과 사고를 이해할 수도 있으니 이 역시 시를 읽는 이유이다.
정원 대보름에 하는 윷놀이를 한자로 쓰면 ‘척사대회(擲柶大會)’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쉬운 한글 이름을 놔두고 왜 이런 해괴한 짓을 하는가라고 꾸짖기도 한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보통 척사대회는 시장이라든가 마을이라든가 동호인 등 비교적 규모가 있는 경우에 많다. 이는 그 발음상 ‘척사(斥邪)’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초에 액을 쫒는 의미에서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 시에 쓰인 ‘척류(擲柳)’는 바로 윳을 던지듯이 버들가지로 훌쩍 몸을 날리는 것을 말한다. ‘천교(遷喬)’는 ‘천교(遷橋)’의 의미로 <<시경>> <벌목(伐木)>에 나오는 말인데 깊은 골짜기에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동을 옛사람은 꾀꼬리가 친구를 찾는 행동으로 보았다.
교교(交交)는 《시경》 <황조(黃鳥)>에 나오는 것으로 정현(鄭玄)은 꾀꼬리의 작은 모습으로, 주희(朱熹)는 꾀꼬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즉 의태어로 보았는데 청나라 때 마서진(馬瑞辰)은 이를 ‘교교(咬咬)’로 보아 의성어로 보고 있다. 이 시의 문맥으로도 의성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경전의 주석과 달리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당나라 때 소철(蘇轍)이 지은 《시집전(詩集傳)》 등을 보면 이미 ‘교교하게 서로 화응하여 운다[交交其和鳴]’는 주석을 달아 의성어로 풀고 있다. 이 후의 여러 문헌에도 그렇게 풀이하고 있으니 결국 마서진은 종래의 설을 고증하여 확인한 데에 불과하다.
낙양은 한당송을 거치는 동안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살아 명원(名園)이 발달하고 모란 등 꽃들이 유명하다. 그래서 3월의 낙양은 아름다운 수놓은 비단, 즉 ‘금(錦)’과 같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 부분을 두고 이 시가 북송이 망한지 두 세대 이상 지난 사실을 근거로 고토 회복에 대한 마음이 담겼다고 하는 해석도 있는데 작가가 유민시인으로 평가 받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감상을 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으로 보인다.
가령 북송 때 장택단이 개봉 풍경을 그린 <청명상하도>를 명나라 때 구영 등이 그릴 때는 실제 소주의 풍경으로 바꿔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본래의 그림 이름이나 개봉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즉 태호의 돌, 소주의 원림처럼 명산지나 명성이 난 것을 예로 들어 사물에 대한 인상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시의 실제 풍경은 강남의 봄 경치이지만 꽃에 대한 비유만큼은 명산지인 낙양을 인용한 셈이다.
꾀꼬리가 나무 아래로 풀쩍 뛰어내렸다가 다시 풀쩍 위로 오르고 하는 광경은 마치 베틀의 북이 바삐 오가는 것 같다. 또 꾀꼬리가 때때로 울어대는 소리는 베틀에서 베를 짜는 것과 같다. 낙양의 삼월 꽃은 비단같이 고운데 저 꾀꼬리가 그런 비단을 짜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3월이 되면 낙양의 꽃은 수놓은 비단과 같고 그 비단은 베 짜기가 연상되고 베 짜기는 다시 꾀꼬리를 연상하게 하는 일종의 정교한 순환 구조로 이 시가 짜여 있다.
이 시를 쓴 유극장(劉克莊, 1187~1259)은 남송 시대의 시인이다. 복건성 보전(莆田) 사람으로 자가 잠부(潛夫)이고 호가 후촌(後村)인 것을 보면 은거풍의 시인으로 보인다. 강소, 절강, 복건, 광동 일대를 장기간 유람하였고 시로는 강서 시파의 영향을 받았고 사로는 남송 시기 호방사의 대가로 주목받고 있다.
이 시는 비유나 구조가 매우 정교한 만큼 정교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처럼 촘촘하게 짠 시는 읽을 때도 촘촘하게 읽어주어야 하는 것이 저자와 독서인의 상호 도리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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