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백거이白居易 봄바람春風

봄바람春風/당唐 백거이白居易

春風先發苑中梅 봄바람에 궁원 매화 젤 먼저 피고
櫻杏桃梨次第開 앵두 살구 복사 배꽃 차례로 피네
薺花榆莢深村裏 두메산골 냉이 꽃 느릅나무 열매도
亦道春風爲我來 봄바람이 날 위해 왔다고 말하네요\

76번 시에서 원매(袁枚)의 춘풍에 이어 두 번째 동일 제목의 시를 본다. 재미 삼아 그동안 소개한 시에서 시어로 등장한 춘풍을 헤아려 보니 제목을 제하고도 모두 11번이나 된다. 그만큼 봄 시에서 봄바람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번 원매(袁枚)의 <봄바람>에서 춘국(春國)의 원대한 규모를 조망하였다면, 백거이의 이 시는 자연에 재현된 대동세상(大同世上)의 섬세함이라 할 만하다. 이 시는 매화에 봄이 먼저 오는 것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점에 착안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글자는 ‘원(苑)’과 ‘심촌(深村)’이다. ‘원’은 궁궐에 딸린 후원으로 당나라 장안의 상림원(上林苑) 같은 국가 최고 수준의 후원을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창덕궁 후원 같은 곳이다. 즉 봄바람이 불면 황제와 황후 등 귀족을 위해 조경한 궁궐 후원에 있는 조매(早梅)가 먼저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시간대에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앵두, 살구, 복숭아, 배는 꽃을 피운다. 각득기소(各得其所)라 할 만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작은 꽃을 촘촘히 달고 있는 냉이나 동전 같은 열매를 무수히 달고 있는 느릅나무가 사는 아주 깊은 산골, 백석의 갈매나무가 있는 그런 산골에도 봄은 찾아오고, 그 곳에 사는 수많은 꽃과 나무와 풀들도 저마다 억눌리지 않은 밝은 목소리로 “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찾아 왔답니다!”라고 남에게 자랑한다는 점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봐도 웃음이 나오는 세상, 세상의 봄빛은 그렇게 저마다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향우지탄(向隅之歎)이 없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이렇게 28자의 절구 한 수로 체현해 내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 시는 831년 백거이 나이 60세 때 낙양에서 하남윤(河南尹)으로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지난 73회 <한가하게 집을 나서며[閑出]>을 지은 지 3년 후인데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백거이가 이런 시를 썼다는 것 자체가 그가 만년에 세상을 얼마나 원융하게 보고 있나 하는 것을 여실히 증언한다. 그것도 아주 천근한 언어로 이렇게 깊은 세계를 표현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며 탄복한다.

사진 : 5월 상순의 비술나무 열매. 《한국의 나무》 저자 김태영 선생 제공. 이 시의 소재로 나온 유협(楡莢)이 실제론 비술나무 열매라고 한다. 이 시의 배경이 되는 3월 말~4월 초는 열매가 더 푸르다.

비술나무 열매, 사진 출처 김태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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