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양신楊愼 교외에 나가서出郊

교외에 나가서出郊 /명明 양신楊愼

高田如樓梯 다락 논은 계단 같고
平田如棋局 평지 논은 바둑판 같네 
白鷺忽飛來 갑자기 백로가 날아와 
點破秧針綠 파란 모에 흰 점을 찍네

양신(楊愼, 1488~1559)은 우리나라에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 <바이두>에 들어가서 살펴보면 명나라 최고 수준의 박학다재한 학자이자 문인인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경학, 역사, 시와 사, 문장뿐만이 아니라 음악, 서화, 천문, 지리 등, 이런 걸 한 사람이 다 했나 싶을 정도의 저술을 남긴 사람이다.

《삼국지연의》 첫 장을 펴면 “출렁출렁 동쪽으로 흘러가는 장강의 물결, 그 성난 물보라 영웅들을 모두 쓸어가 버렸네. [滾滾長江東逝水. 浪花淘盡英雄.]”라고 시작하는 멋진 사(詞)가 나온다. 이 시를 쓴 사람이 바로 양신이다.

이 사람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1524년에 명 세종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진노를 사 운남 영창(永昌)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가서 36년 만에 그 곳에서 72세로 죽는데, 그동안 많은 저술을 하였다.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그 영창 유배기에 지은 시이다.

운남성의 계단식 논은 지금도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에도 8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계단식 논이 많이 있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미국 쌀이 들어오면서 그 계단식 논을 밀어 대부분 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경남 상주 가천 같은 데나 가야지 있을 정도이다. 우리 시골만 해도 골짜기마다 계단식 논이 있어 가을이 되면 참으로 볼만 했다. 어떤 논은 너무 작은데 그 논둑을 보면 큰 돌과 작은 돌을 촘촘히 쌓아 만든 것이라 옛날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평생을 바친 눈물의 논임을 절로 느끼게 된다.

운남으로 유배를 와서 보니 이 계단식 논이 장관이다. 위로 까마득히 쳐다보면 마치 누각에 올라가는 계단과 같고 또 평지의 논은 나름대로 정리되어 바둑판처럼 질서 정연하다. 그런데 백로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저만치 논에 앉는다. 바늘처럼 한 뼘 정도 간격으로 질서 있게 서 있던 모의 행렬이 순간 깨지며 흰 점이 하나 생긴다.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어는 역시 ‘점파(點破)’이다. ‘점파’는 점처럼 작은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온통 파란 모로 가득한 논에 백로라는 하나의 흰 점이 내려와 그 파란 질서를 깨트린다. 드넓은 녹색의 공간에 일어난 흰 점의 균열이다.

이 시를 중국 사이트 <고시문망(古詩文網)>에서는 고대의 시인과 화가들이 백로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기 때문에 이 대목은 진한 향수를 표백한 것이라는 해설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점파는 시인의 내면에 이는 향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시경》과 《초사》를 위시한 중국 고대 시에서 백로로 향수를 흥기하거나 비유한 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명대 이전의 시에서도 그런 것은 보지 못했고 우리나라 시에서도 그런 것은 안 보인다.

백로가 ‘사향(思鄕)’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가 있어야 한다. 이 시 이전에 다른 사람의 시문에서 그런 이미지로 사용한 전례가 있거나 아니면 이 시 자체의 문맥으로 그런 의미를 구성해 내야 한다. 이 시는 그 두 가지 요건 중 어느 것도 없다.

《패문재영물시선(佩文齋詠物詩選)》(청, 장옥서(張玉書) 奉命撰)에 이 시를 ‘로류(鷺類)’에 수록해 놓고 있다. 왕유(王維)의 <장마철에 망천장에서 짓다[積雨輞川莊作]> 시에 “드넓은 논에는 백로가 날고 그늘진 여름철 나무에는 꾀꼬리가 우네 [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囀黃鸝]”라는 표현이 있어 논에 서 있는 백로가 일종의 한적한 전원 풍경을 드러내는 기원이 된다.

이 시는 이런 전원의 아름다움이나 영물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사향의 관점은 무리해 보인다. 혹시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면 필자에게 누구든지 가르침을 주기 바란다.

이 시는 향토색 짙은 계단식 논과 녹색의 장관을 이룬 봄에 백로 한 마리가 날아와 돌연 연출하는 경이로운 풍경과 함께 담담하고 명랑한 한 유배인의 내면 풍경도 아울러 보여준다.

사진 출처 Baidu

365일 한시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