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 감독의 영화 ‘색/계’를 두고 말들도 많고 탈도 많았다. 새롭게 창조된 체위, 배우들 노출로 인한 ‘실제 상황’ 여부, 90년대 이후 중국 대중문화의 코드로 재평가된 원작 소설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 40년대 상하이를 재현해내는 노스탤지어 같은 여러 논란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목을 끌었던 것은 역시 창조적인 체위와 노출 문제였다. 창조적인 체위를 모방하려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는 미확인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겨울 노출과 섹스는 중국 대륙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키워드였다.
아직 ‘사회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중국에서 과감한 노출이나 섹스 신은 금기 대상 중 하나다. 영화에 대해 여전히 사전 심사제를 고수하고 있는 중국의 ‘영화관리조례’는 ‘음란을 조장하는’내용을 담아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실제로 그런 기준 때문에 상영허가가 나지 않는 영화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리안의 이 영화도 중국에선 10분 가량이 삭제된 뒤 개봉될 수 있었다. 10여 분 정도면 논란이 되는 섹스 신 중 여전히 많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국 내 감독들에게처럼 매우 엄격한 잣대를 해외파 ‘화인(華人)’ 감독에게는 적용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무삭제를 보지 못할 중국 사람들이 아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것은 이미 어둠의 경로를 통해 유통되는 DVD가 제 역할을 다 했다는 뜻이다.
물론 중국에서 그나마 이 영화의 삭제판이 내걸릴 수 있었던 데는 어떻게든 안팎으로 중국 영화를 키워보고 싶은 당국의 노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할리우드에 맞설 기량이 아쉬운 상황에서 일부를 제외하고 국내 감독들은 그다지 신통한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까지 거머쥔 ‘동포’ 감독의 영화를 못 본 척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부의 성과가 미미하면 유사한 외부를 끌어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중국의 특성을 보여준다.
영화가 개봉된 후 리안은 중국 여기저기에 초청되고,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쁜 눈치다. ‘색/계’의 중국 개봉 이면에는 끊이지 않는 대중들 호기심과 당국의 고육지책이 뒤섞여 있다.
1940년대 홍콩과 상하이로 우리를 끌고 가는 영화 ‘색/계’는 좀 더 표면적으로 사적 서사(敍事)와 공적 서사를 뒤얽어 놓는다. 민족의 미래에 대한 청년 학생들의 투쟁 사이에서 자라나는 사적인 사랑 얘기를 통해 이율배반적인 중국 현실을 그린다.
흔히들 중국이 유교국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중국은 유가와 도가가 교묘하게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다. 거친 구분이 될 수 있겠지만 유가가 사회적이고 공적 영역을 대변한다면, 도가는 자유스러운 개인적이고 사적인 욕망을 대변한다. 외면적으로는 공적인 민족이나 사회를 강조하지만, 내면에서는 사적으로 은밀하게 섹스와 욕망을 추구하는 게 중국 특성이다.
‘색/계’에서 ‘색(色)’은 빛(깔)이고 ‘밝힘’이다. 공적 서사에서 보면 색은 세상을 밝힌다(유가)는 얘기지만, 사적 서사에서 보면 색은 자신의 욕망을 밝힌다(도가)는 뜻이다. ‘계(戒)’는 ‘지킴’이다. 공적 서사에서 계는 나라와 민족을 지킨다(유가)는 얘기지만, 사적 서사에서 계는 자신의 안위를 지킨다(도가).
이 네 개의 색과 계가 기묘하게 얽히면서 적절한 변증법을 형성할 때, 다시 말하면 아주 불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상황이 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마작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장이머우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리안 역시 중국의 민속을 과대 선전하려는 얄팍한 의도에서 마작 장면을 등장시킨 게 아니다. 그 보다는 에드워드 양의 ‘마작’이 보여주듯이 색과 계, 공(유가)과 사(도가)로 뒤얽힌 마작 판과도 같은 중국 특유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마작 판은 그런 세상을 보여주는, 어떤 신뢰할 수 없는 원리의 상징이다. 앳된 마이(麥) 부인(탕웨이 분)의 표정을 훔치듯 바라보는 마작 판의 다른 부인들의 눈빛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여러 번 삽입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마작 패처럼 너무 쉽게 흥분하거나 오르가즘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이(易) 대장(량차오웨이 분)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새디스트가 된다. 상대의 몸에 ‘뱀처럼 스며 들어가고’, ‘피가 흐르고 고통스러워 해야만’ 겨우 도착하게 되는 그의 절정은 색과 계의 불안한 균형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유가와 도가의 균형이 깨지는 건 중국사회가 아니듯이 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대장의 관저를 지키는 경비견의 클로즈업 숏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지킴’의 세계가 등장한다. 하지만 냉혈한과 같은 이 대장은 자신의 손으로 마이 부인, 아니 왕지아즈(王佳芝)의 사형 집행을 서명한 뒤, 불도 들어오지 않은 마이 부인의 침대 위에 앉아 까닭을 묻는 자신의 부인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누가 마이 부인을 찾거든 잠시 홍콩에 갔다고 말해 둬.” 그렇게 사적 지킴의 세계는 무너진다.
물론 영화는 도대체 공적 지킴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 관객을 염두에 둘 경우 그런 이야기는 군더더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관객들은 영화의 전체 비중이 지나치게 사적인 통로로 흘러가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전략은 오히려 이야기의 보편성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왕지아즈는 공적으로 세상을 밝히기 위해 , 즉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처녀성까지도 버리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밝힘’에는 공적인 영역(유가)만이 아닌 사적인 영역(도가)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는다. 공적 밝힘을 위한 결단 이후, 두 번째 섹스 학습에서 여성 상위를 선보인 그녀는 “오늘은 좀 뭔가 느끼는 것 같은데”라는 평가를 듣는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그렇게 ‘공적 밝힘’과 ‘사적 밝힘’이 혼란스러워질 것으론 생각하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노련하게 스며드는 이 대장의 뱀 같은 몸은 그녀의 지킴을 해체해 버린다. 그리곤 결국 사적 밝힘의 세계로 인도한다. 결국 여자는 공적 밝힘과 사적 밝힘, 그리고 사적 지킴 모두를 잃었다. 남자는 사적 밝힘과 사적 지킴을 잃었으나 공적 지킴만은 지켰다.
여자와 남자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반지였다. 반지라는 말은 중국어로 ‘손가락을 지킨다’는 뜻의 ‘계지(戒指)’다. 그러므로 반지를 맞추러 가는 시퀀스는 다만 허무맹랑한 신파가 아니다. 물론 이수일과 심순애 류의 신파와도 같이 과잉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작 판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반지에 관한 담론은 결국 이 영화의 끝을 장식한다. ‘계지’를 선물하는 이 대장과 직접 자신의 손에 이를 끼우는 마이 부인 사이에 아름다운 사적 사랑의 완성이 스치듯 지나간다. 어떤 징조를 보여주듯이 이 대장은 끼워달라는 마이 부인 부탁에도 불구하고, 직접 하라며 마다한다. 그 순간 마이 부인은 모든 걸 다 버리기로 작심한다. 자신이 사랑한 한 남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런 것이다.
반지는 그렇게 그들 사랑의 완성을 뜻힌다. 실제 중국 풍속에서 반지는 그런 의미가 있다. 굳이 ‘색/계’라는 식으로 갈라놓지 않으면 ‘색계’라는 말은 ‘화려한 반지’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고 중국어로 읽는 ‘색계’, 즉 ‘써지에’는 그들이 구성하는 마작 판과도 같은 ‘세계(스지에)’와도 일종의 해운(諧韻)을 이룬다. 색계란 의미 자체가 다중적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