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 중국의 여성들은 과연 ‘하늘의 반쪽’을 차지했는가?

장이머우(張藝謀)는 애초부터 여성에 관심이 많았다. 베이징영화대학(北京電影學院)의 동기였던 천카이거를 도와 촬영했던 첫 영화, <황토지>(黃土地)는 궁벽한 깡촌 소녀가 바깥 세상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렸다.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기 시작한 이후에도 ‘여성 편력’은 계속됐다. 감독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粱)은 1920년대 농촌에서 매매혼 풍습으로 팔려간 새색시가 일본군에 저항하는 ‘민병대’가 되는 운명적 사건을 다룬다. <국두>(菊豆) 역시 돈에 팔려온 신부가 시조카와의 불륜을 통해 아이까지 낳고 기르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이야기다. <귀주이야기>, <인생>, <집으로 가는 길>, <책상서랍 속의 동화>, <연인>, <황후화>, <진링 13소녀> 등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주 성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남성들이 등장한다.

장이머우의 영화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서양인이 보고 싶어 하는 동양의 모습을 그렸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특히 초기 영화들에 꼭 등장하는 통과의례, 그러니까 출산이나 장례 같은 중국적 관습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솜씨는 그런 비판에 딱 어울리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거기에 한 마디를 더하고 싶어진다. 여성을 보는 남성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사실 말이다. 결국 장이머우의 영화는 이중의 시선, 동양을 보는 서양의 시선과 여성을 보는 남성의 시선이 교묘한 방식으로 교차된다.

그 중에서도 꼭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홍등>이다. 영화는 아내를 넷이나 두고 사는 가부장과 그 아내들 사이에 벌어지는 질투와 음모를 그린다. 폐쇄적인 구조의 전통 가옥과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가부장은 그 공간의 막강한 권력을 암시한다. 밤마다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권리를 얻는 아내들의 침소에는 붉은 등이 내걸린다. 그리고 바로 그녀들의 몸을 이완시키려는 사전 준비, 발안마가 시행된다. 몸종이 무릎을 꿇고 이제 막 팔려서 시집을 온 넷째 부인의 발을 두드리는 장면은 기묘한 성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국 문화에서 여성의 발은 거의 즉각적으로 성적 코드와 연결된다. 여성의 발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전족’(纏足)이 떠오른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전족을 만들었다는 통설은 어쩌다 지어낸 말일 뿐이다. 당(唐) 왕조부터 시작됐다고 하는 전족은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세 살이 되기 전에 천으로 발을 꽁꽁 감싸 매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풍습이었다. 전족을 한 여성들은 성인이 되도 발길이가 최대 15cm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전족을 하게 되면 발 자체가 오므라들어 삼각형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오늘날 하이힐을 신는 것 같은 효과가 있었다. 척추가 곧아져서 가슴이 앞으로 나오고, 대퇴부 근육이 발달하면서 생식기 기능을 좋게 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 남성들은 이런 작은 발에 성적 흥분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전족을 이용하는 성적 행위가 수백 가지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오감을 모두 만족하는 성행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작은 발로 큰 몸을 지탱하면서 뒤뚱뒤뚱 걷는 뒷모습은 시각적이었다. ‘연보’(蓮步)라고 이름 지어진 걸음걸이에서 들을 수 있는 또각또각 소리는 청각적이었다. 손과 몸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면서 느꼈을 촉각적 효과도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주로 저녁에는 묶은 천을 풀었다가 다시 묶곤 했는데, 그러면 바람이 통하지 않은 발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남자들은 발을 코에 대고 그 냄새를 맡으면서 후각적으로 흥분했다. 심지어는 짓물러진 발가락 아래에 견과류, 건포도 등을 박아 놓았다가 섹스 중에 꺼내먹으면서 미각적 쾌락도 즐기곤 했다.

전족은 너무도 당연하고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겨져 왔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대면 누구라도 알만한 유명한 문인들이 너도나도 전족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우리가 그렇게 떠받드는 유학자 주희도 전족을 천하의 기본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영국 선교사 리드 부인이 그 비참한 실상을 알리면서, 하늘이 내려준 발을 지키자는 ‘천족’(天足) 운동을 제창할 때까지 전족은 계속됐다. 1902년 청 왕조가 전족 금지령을 선포한 이후에야 천년을 넘게 이어온 풍습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여성의 운명은 ‘하늘의 반쪽’(半邊天)으로 여겨지면서 수직 상승했다.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도 매우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나 일상생활의 남녀 관계도 매우 균형 잡힌 의식과 실천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만민이 평등하다고 외치는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얻어낸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그 평등은 여전히 여성 자신들만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남성화된 여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결과라는 예리한 비판도 있다.

사회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전족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풍습이 됐다. 하지만 요새도 농촌과 산촌에서는 심심찮게 매매혼이 이뤄지고 있다. 사람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의식이 아직까지 완전히 타파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중국에서 여성의 권익이 실제로 얼마나 신장됐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인간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여성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장이머우와 또 다른 방식으로, 그의 후배 감독들이 영화화하고 있는 중이다.

장이머우는…

장이머우张艺谋, 출처news.youth.cn

세계적 거장으로까지 받들어지고 있는 영화감독 장이머우도 그 시작은 초라했다.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1978년 다시 문을 연 베이징영화대학에서 연령 초과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자 “문화대혁명으로 잃어버린 나의 10년을 되돌려 달라”며 당시 문화부장관에게 탄원서를 쓴 일화는 유명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시작된 영화 인생은 졸업 이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영화제작소에 배치 받아 영화를 만들면서 뒤바뀌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찍는 영화가 기존의 중국영화와는 뼛속까지도 달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결과 태어난 영화들은 중국보다는 서구 영화제들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그렇게 한 편씩 이력과 명성을 쌓아올린 그는 1990년대 말 ‘조국’으로 귀환하여 당과 국가의 구미에 꼭 맞는 영화들을 찍어내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두고 미학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까닭이다. 베이징올림픽 전후부터는 <투란도트>나 <인상> 시리즈 등 각종 대형 야외공연을 제작하는데도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