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경화 전략이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국가급 지도자들의 얼토당토 않은 언행 때문에 이웃 나라인 한국과 중국은 불편하기 그지 없다. 특히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역사 인식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위안부 문제는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 부정과 책임 회피의 상징이 됐다. 35년 간 일본의 식민지로 살면서 침략과 수탈을 당해 온 우리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대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중국의 반식민지는 1840년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직후부터 시작됐다. 일본으로부터의 반식민지적 침탈은 이후 청일전쟁(1894-95), 만주 침략(1931), 중일전쟁(1937) 등을 거치면서 강화됐다. 중국인들은 일본 침략의 상징을 몇 가지 사건으로 기억한다. 9․18사변이라고 부르는 만주 침략과 1․28사변으로 일컫는 상하이 침공(1932), 만주 지역 731부대에서의 생체실험, 난징에서의 대학살 등이 그것이다.
일본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들도 이전부터 자주 만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난징 대학살을 다룬 영화는 시대의 필요가 있을 때마다 반복됐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줄잡아 7편 이상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제목들도 처음에는 <난징 1937>처럼 평이하다가 <흑태양: 난징대학살>이나 <난징의 강간>처럼 노골화하고 있다. 1995년을 전후해서 집중됐던 중국 영화의 ‘난징 이야기’는 2007년을 기점으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우리는 어쩌면 영화를 통해 과거를 보지만 그것이 상영되는 스크린 위에서 오늘의 모습을 확인하고, 영화관을 나서면서는 끝내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미래를 경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최근 중일 관계는 그만큼 빠른 속도로 냉랭해지고 있는 것이다.
루촨 감독의 <난징! 난징!>은 난징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내려고 했다. 영화는 역시 난징에서 자행됐던 끔찍한 비극을 다룬다. 1937년 7월 중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한 일본은 그해 12월 난징을 점령한다. 난징은 당시 국민당의 수도로 상징적인 도시였다. 일본은 중일전쟁 초반부터 무차별 폭격을 서슴지 않으면서 난징 공략에 전력을 다했다. 마침내 난징을 점령한 일본은 아직 도시에 머무르고 있던 중국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향해 학살의 총부리를 겨누었다. 학살은 해가 지나고 봄이 찾아올 무렵까지 6주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로 인한 민간인 피해자 수가 30만 명에 달하는 끔찍한 전쟁 범죄였다.
영화는 이런 참극의 현장을 바라보는 일본군 가토가와(角川)의 시선에 자주 초점을 맞춘다. 국민당 장교인 루젠슝(陸劍雄)도 이야기 전개의 또 다른 한 축을 맡는다. 그리고 난징을 탈출하기 위해 애쓰는 민간인들이 있다. 일본군과 국민당군, 민간인이라는, 당시 난징을 둘러싸고 있었던 세 부류의 인물들이 제각각의 입장에 서 있다. 루젠슝은 전우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격렬히 항전하다 비참히 죽어간다. 국민당군의 항전이 실패한 뒤 난징에서는 무자비한 살육이 진행된다. 민간인들은 탈출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일부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도시 안에서 죽음을 맞는다. 민간인들의 탈출을 위해 진링(金陵)여자대학에 마련된 ‘안전지대’에서는 이 학교의 교사 지앙수윈(姜淑雲)과 여자 댄서 샤오지앙(小江), 안전지역의 국제위원회 의장 비서인 탕(唐) 선생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끝까지 저항한다.
한편 가토가와는 위안부로 끌려온 일본 여성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괴로워하다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많은 관객들은 그의 자살을 두고 일본이 결국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하고 말리라는 영화적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또 비극적 학살의 현장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은 아이, 샤오더우쯔(小豆子)는 중국의 희망을 보여준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일본군을 다소 유약하게 그렸고, 국민당군의 저항 노력을 부각시켰다는 점 때문에 개봉 당시 중국 내에서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되면서(2009년) 많은 관객들의 반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침략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암흑기’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중일관계는 사회주의 중국 수립 이후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차츰 대화와 교류의 폭을 넓혀 왔다. 하지만 최근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 등이 거듭되면서 40년이 넘는 국교 관계 수립 기간 중 최악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유명세 탓도 있겠지만, 이같은 중일 관계라는 민감한 소재 탓에 끊임없는 논쟁을 몰고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동안 일관되게 각을 세우며 대립적 틀에만 머물러 있던 중국과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조정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지금처럼 안하무인과 후안무치함으로 계속된다면, 그런 조정의 틈새가 열릴 기회는 영원히 봉쇄되고 말 것이다.
루촨은…
신장 지역에서 태어난 루촨은 다섯 살에 작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건너와 자랐다. 난징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베이징영화대학에서 연출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텔레비전 드라마 시나리오를 썼다.
2002년, 총을 잃어버린 경찰의 이야기를 그린 데뷔작 <총을 찾아서>가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등 호평을 받으며 입봉했다. 서부 고원 지역에서 영양 밀렵꾼들과 이들을 제지하기 위한 순찰대원 사이의 추격을 그린 차기작 <커커시리>가 주목을 받으면서 도쿄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고, 미국의 전문잡지 버라이어티(Variety) 세계 10대 젊은 감독에 뽑히기도 했다. 뒤이어 <난징! 난징!>, <가장 사랑해>, <왕의 성찬> 등을 연출했다. 상업성과 대중성, 적절한 문제의식을 갖추고 있어 중국 영화계를 이끌 차기 감독 중 하나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