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예약豫約>

내 나이 벌써 칠십이다. 당장 언제 죽을 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저기 사방으로 떠도는 사람이라 여기에는 가족이나 종복들도 없다. 아침 저녁으로 의지하여 사는 사람이라고는 모두 이 절간의 승려들 뿐이다. 그러므로 미리 아래와 같이 규약을 정해 둔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모든 일의 책임이 나에게 있어, 사람들이 공경하든 무시하든 그 책임 역시 나에게 있다. 내게 만약 덕이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공경할 것이니, 설령 너희에게 덕이 없다 해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내게 만약 덕이 없으면 사람들은 나를 무시할 것이니, 설령 너희에게 정말 덕이 있다 해도 사람들은 역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내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나의 처신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에만 신경 쓸 따름이다.

내가 비록 옛날 숭고한 현인(賢人)과 같을 수는 없지만, 나의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은 마음은 다른 이들이 미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근처의 훌륭한 현인 군자들이 모두 나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내가 죽은 뒤라면 사람들은 모두 오직 너희만을 볼 것이다. 계속 지금과 같을 수 있겠는가?

또한 너희들은 지금도 여가가 없다. 한 해가 다 가도록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불상을 만들어 경을 읽고, 종을 주조하고 북을 치며, 아울러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노인을 섬긴다. 숨 한 번 쉴 때나 몸 한 번 움직일 때에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참으로 허둥지둥 잠시라도 여가가 없다.

이제 다행히도 모든 일을 대략이나마 마쳤고, 탑옥(塔屋)이 이미 완성되었다. 감탑(龕塔)[1]을 쌓아서 탑을 봉한 뒤에, 너희들은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탑을 지켜야 한다.[2] 내가 죽은 뒤에 사람들은 나를 보지 않고 오직 너희들을 볼 것이다. 너희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구차해서야 되겠느냐?

너희들이 만약 승려의 계율에 더욱 부지런히 힘쓰면, 사람들은 그런 너희들을 공경할 것이요, 아울러 나를 더욱 공경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단지 공경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겠느냐? 우리의 이 용호상원(龍湖上院)[3]의 승려들을 흥복사(興福寺) 등 다른 절의 승려들을 대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우할 것이다. 그렇게 산문(山門)에 욕을 주고 산문을 망치는 종자가 되느니, 차라리 이 절간을 비워두고, 이 탑도 아무도 지키는 사람 없이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주의하여 지켜야 할 규약을 내가 미리 정하여, 상융(常融)․상중(常中)․상수(常守)․회첩(懷捷)․회림(懷林)․회선(懷善)․회주(懷珠)․회옥(懷玉) 등에게 맡긴다. 나머지 몇몇 승려들은, 내가 죽은 뒤에는 관리할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으나, 강요할 필요는 없다. 대개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의 지도가 있어야 쓸 만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 내가 죽은 뒤에 형세가 더욱 안 좋아지면, 어린 사람들은 혹시 감당하기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내가 이렇게 미리 정한 규약을 듣고, 만약 배고픔을 참으면서 승려들이 화합하여 지낼 수 있다면, 시방(十方)의 현자들이라 할지라도 또한 여기에 남아 함께 모여 있을 수 있다. 하물며 여기의 몇몇 승려와 하원(下院)의 승려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너희들이 지키려고 하지 않거나 지키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참에 일찌감치 말해두는 것이다.

이 내용은 상원(上院)의 <약속책>(約束冊)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산문(山門)은 예전대로 닫아 잠근다. 수재나 화재와 같은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함부로 열지 않는다. 친한 객이나 시주(施主)가 향 피우고 예불하러 오는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열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경치를 구경하려고 오면, 좋은 경치는 호숫가의 산이나 연못 아래 냇물 같은 곳에 있어, 모두 상원의 산문 밖에 있으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하고, 공연히 문을 두드리거나 문을 열게 하지 않는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 밥을 지어 먹으려고 하면, 다리를 지나면 유당(柳塘)선생 사당이 있고, 사당을 지키는 승려가 있으니, 찾아온 객들은 그를 통해서 땔감과 쌀을 주선할 수 있으니, 심부름하는 사람을 시켜 그곳으로 가서 차를 끓이거나 밥을 짓게 하라고 알려준다. 그 곳에는 솥과 부뚜막이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역시 공연히 산문을 두드리지 않게 한다. 무엇 때문인가? 산문의 승려는 찾아온 손님을 공경하는 예의 절차를 잘 모르기 때문에, 혹시 죄를 짓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일 뿐이다.

물 긷고 쌀 찧고 업무 보는 일 등 일상적으로 할 일을 하는 이외에는 예불을 올리거나 정좌하고, 경문을 보거나 염불을 행한다. 승려의 의복과 접객하는 절차 등을 정돈해야 한다.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항상 제멋대로 있는 여염 마을 사람들의 행실을 어찌 본받을 수 있겠는가? 희희덕거리며 웃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끄러운 듯 조용히 있어야 한다. 이는 진실된 말이다.

앉아 있을 때는 산 같아야 하고, 다닐 때는 개미 같아야 하고, 서 있을 때는 기둥 같아야 하고, 멈출 때는 못 같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앉고 멈추고 다니고 서는 것이 법도에 맞게 될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 그 어느 누가 감히 나를 속이겠는가? 밥이 있으면 밥을 먹고, 밥이 없으면 죽을 먹고, 돈이 있으면 쌀을 사들이고, 돈이 없으면 구걸한다. 쌀을 구걸하지 못하면 밥을 구걸하고, 밥을 구걸하지 못하면 죽을 구걸하고, 죽을 구걸하지 못하면 채소를 구걸하고, 채소를 구걸하지 못하면 단정히 앉아서 굶어 죽는다. 이것이 석가의 계율이다. 석가를 본받지 않고 재물이나 먹을 것을 쌓아두는 속된 중을 본받으면 되겠는가? 이 때 굶어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훗날 또한 배불러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죽는 날이 있는 법이므로,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또한 종일토록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쫓아다닐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함부로 문을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찾아뵙고 인사하는 예절 같은 것은 승가(僧家)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을 나서서 바깥 세상을 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사부 혹은 사형이나 사제를 만나러 어느 암자 어느 곳에 가려 한다고 해도 절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사부가 잠시 여기까지 와서 만나는 것만은 허락하되, 멀리서 왔으면 하루 묵게 하고, 가까이서 왔으면 식사 한 끼 하고 나면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라. 속가(俗家)의 부모 형제라 할지라도, 불공을 드리러 오는 경우가 아니면, 경솔하게 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아무 까닭 없이 자주 휴가를 청하여 황백산(黃栢山)에 가려고 한다거나, 동산(東山)에 가려고 한다거나, 유마암(維摩庵) 등지에 가려고 하면, 당장 거기로 가버리라고 내쫓아 버리라.

차라리 탑을 지키는 사람이 없을지언정, 한 사람이라도 규약을 지키지 않는 승려가 있으면 안된다. 차라리 종신토록 너댓명만 있을지언정, 규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사부께서 계신 곳에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데, 하물며 속가(俗家)에 가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하면 하루 종일 문을 닫아 걸게 될 것이며, 문을 나서는 경우도 저절로 드물어질 것이다. 그러면 심신이 편안하고 안정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져서, 오래 되면 저절로 편안하게 느껴지고, 또한 번거롭게 세상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방(西方)의 어떤 곳인들 가보지 못하겠으며, 어떤 큰 일인들 훤히 알지 못하겠느냐?

세간의 중들이 날마다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한 번 볼라치면, 저절로 땀이 줄줄 흐를 만큼 수치를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내세(來世)를 담보로 돈과 쌀을 구걸하여 수치를 느낄 줄 모르는 중놈을 먹여 살리고, 관청과 여염집 문을 드나들면서 개처럼 비굴한 얼굴을 꾸미고 다니니, 아문(衙門)에서 입으로 알랑거리며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이렇게 중 노릇 하지만, 나는 그렇게 중 노릇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수행에 적절할 뿐 아니라 체면 또한 스스로 초월하여,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 일으킬텐데, 무엇이 고생스럽다고 문을 닫고 정좌하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냐?

종일토록 문을 닫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객이 없을 것이요, 만일 벼슬아치나 마을 선생이 찾아와서 문을 열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해도, 우리가 이렇게 수행하는 것을 그들이 본다면, 역시 자연스럽게 갈구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그런 경우에는 비록 만난다고 해도 무슨 방해되는 것이 있겠는가?

향사부(鄕士夫)를 만나면 노선생(老先生)이라고 부르고, ‘춘원’(春元) 이나 ‘문학’(文學)[4]을 만나면 선생(先生)이라고 부르라. 이는 그들을 귀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무슨 공(公)이니 어르신이니 하는 호칭으로 부른다면 도리어 가볍게 대하는 것이 된다. 이미 불자가 되었는데, 노예들이나 사용하는 호칭을 어찌 같이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스스로 나를 소중하게 여기면 사람들이 저절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가 스스로 나를 경시하면 사람들도 역시 나를 경시한다. 이는 필연적인 이치이다. 문을 닫고 정좌하여, 고요하게 아무 소리도 없어야 한다. 해가 다 가도록 이렇게 한다면, 귀신도 흠모하고 우러러보는데,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최상으로는 출세간하여 진짜 부처가 될 수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지 않아, 나의 바램으로는 족한 것이 된다.

내가 죽은 몸을 탑옥(塔屋)에 보관하기는 하지만, 지키는 사람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게 여길 만한 것인가? 만약 공무가 있어서 이 현(縣)을 지나다 들르는 행차가 있으면 하원(下院)의 사람들이 영접하면 될 것이요, 탑을 지키는 중이 꼭 상관해야 할 일이 아니다. 만약 진실로 기뻐서 탑 앞에 와서 참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불자요, 위대한 성인이다. 마땅히 급히 문을 열어 맞아들여서, 성인으로 대우하고, 차를 끓이고 좋은 향을 피우고, 부처를 섬기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걸맞게 대우했다고 할 수 있다. 영접하고 전송하는 데 예의를 다하도록 힘써야 한다.

불학(佛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호칭할 때는 ‘불야’(佛爺)라고 하고, 도학을 논하는 사람을 호칭할 때는 노선생(老先生)이라고 하고, 학문도 하지 않고 불학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다만 기개가 있어서 내 탑을 보려는 사람을 호칭할 때는 노대인(老大人)이라고 한다. 다섯 식구가 일제히 나가 예를 다 올리고, 세 식구는 물러나와 차를 준비하고, 오직 상융(常融)․회림(懷林) 둘만 배석하여 객의 자리를 편하게 보아주되, 상융은 구석에 앉고, 회림은 곁에 앉는데, 모두 무릎을 꿇고 앉을 것이며, 걸상에 앉아 객의 좌석에 배석해서는 안된다. 묻는 것이 있으면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묵묵히 있을 것이요, 편안하고 여유롭고 조용하게 응대하고, 감히 무시해서도 안될 것이요, 또한 공경해서도 안된다. 그들을 공경하면 필시 우리가 무언가 요구하려는 사항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이는 절대 안된다.

등(燈)이란 밤낮을 이어서 밝히는 것이요, 해와 달과 함께 밝히는 것이다. 해는 낮에 세상을 밝힐 수 있으되 그늘진 아래는 밝히지 못하고, 달은 밤에 세상을 밝힐 수 있으되 집안까지 밝히지는 못한다.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하는 것을 이어 밝히는 것이 등 아닌가? 그러므로 해와 달과 등이 부처를 밝힌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부처를 해와 달과 등에 비유한 것으로, 부처가 등과 같고 해와 달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등이 그것들을 비춘 뒤에야 비로소 비추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이 해와 달은 없어도 되고 등이 없으면 안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부처를 섬긴다는 자들이 너도나도 그 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항상 밝게 세상을 비출 수 있는 것은 오직 등불 뿐이라고 생각하고, 해와 달이 있는 것을 따지지 않아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등불을 밝힘으로써, 해와 달은 모두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달이 쓸모없는 빛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 또한 무익한 빛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밤에만 등불을 밝히고 낮에는 등불을 밝히지 말 것을 명한다. 부처는 언제나 해와 같기 때문이다. 그믐에만 등을 밝히고 보름 전후 10여 일 밤에는 등불을 밝히지 말 것을 명한다. 부처는 언제나 달과 같기 때문이다. 오직 그믐 및 초하루 전후 반 달여 동안만 새벽까지 등을 밝힐 것이니, 부처는 항상 등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와 달과 등이 부처를 밝힌다는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것이다.

산 속에서의 종과 북은 군대의 호령과 같고, 하늘의 천둥과 같다. 번개와 우뢰가 한 번 떨어지면 온갖 곡식과 초목의 껍질이 모두 갈라지고, 군대의 호령이 한 번 떨어지면 백만 대군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산천이 진동하며 끓어 오른다.

산 속의 종과 북도 이와 같다. 종과 북 소리가 울리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적막하고 온갖 생각이 모두 잠잠하게 멈추고 있다가, 한 번 울리면 나비가 꿈에서 깨어 장주(莊周)로 돌아오듯 귀와 눈이 번쩍 뜨여, 보고 듣던 것이 뒤바뀐다. 설령 잡념이 있어도 한 번 치면 잊혀지고, 설령 시름이 있어도 한 번 두드리면 사라지며, 설령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나 희열의 기색이 있다 해도 한 번 소리를 들으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너희들 산사(山寺)의 승려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든 가까이 있는 사람이든 그 누가 그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들으면 저절로 슬픔이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또한 마음속에 울려 퍼지기도 하고, 신세의 덧없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힘든 것이 이유없이 사라지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면 산 속의 종과 북이 가지는 의미는 적고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린 사미승들이 제멋대로 마구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 소리가 가볍고 무겁고 빠르고 느린 것에 원래 척도가 있어서, 가벼우면 사람들이 기뻐하게 할 수도 있고, 무거우면 두려워하게 할 수도 있고, 빠르면 달리게 할 수도 있고, 느리면 쉬게 할 수도 있어, 그야말로 군대의 호령이나 하늘의 우뢰와 똑같다.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원근에서 승려의 계율과 수행을 바라보고 공경한다지만, 소리의 도(道)는 원래 마음과 통하는 법이어서, 평소 계율과 수행이 탁월한 승려가 치는 종과 북 소리는 맑고 평화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먼저 계율과 수행을 통해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맑은 새벽이나 좋은 한밤중에 종과 북이 조화롭게 울리는 소리를 들려준다. 때때로 그 소리를 들으면 때때로 마음에 젖어들고, 아침 저녁으로 그 소리를 들으면 아침 저녁으로 감화되어 기뻐한다. 입문하여 예불을 올리거나 승려를 만나지 않아도 혼자 수도하여 문득 깨닫는 사람이 있다. 이는 종과 북의 소리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와 가치가 정말 사소하지 않다. 만약 아이가 장난하는 것처럼 종과 북을 치면, 사람들은 도리어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고, 귀가 따갑다고 화를 낼 것이며, 그들에게 거꾸로 조급한 마음만 생기게 하는 것이 된다.

탑을 봉한 뒤[5]에는 100일 동안만 위패에 제사를 지낸다. 아침 저녁 모두 향을 피우고, 점심 때는 밥 한 그릇, 맑은 차 한 사발, 약간의 된장을 공양하고, 위에 유리를 매단다.

나는 평생 동안, 사람들이 꺼이꺼이 곡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수심어린 눈썹으로 아녀자처럼 천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장부란, 기쁠 때는 맑은 바람이나 휘영청한 달과 같이 펄쩍펄쩍 뛰며 가무를 즐기고, 노할 때는 천둥이 몰아쳐 바람을 부르고 물결을 쳐올려 모래를 무너뜨리듯, 삼군 만마의 소리가 몇 리 밖까지 울리듯 해야 한다. 어찌 그런 아녀자같은 속된 티를 내겠는가? 하물며 출가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또한 인생이란 이 세상에 객으로 잠깐 있는 것이요, 죽는 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고향 집에 돌아가게 되면 기뻐하며 서로 축하해주고, 또한 자기 스스로도 있을 곳을 얻었다며 자축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떠난 지 칠팔십 년 뒤에 돌아가게 되니, 그 경축과 행복이 더욱 끝이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은 것을 슬퍼하고 마음아파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내가 있을 곳을 얻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찌 출가한 사람이 취할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염불로 전송을 했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성 밖까지 따라가서 시가를 읊으며 전송하여, 살아 있을 때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것과 똑같이 행하는 예가 있다. 객을 전송함으로써 슬픔이 돋아난다면, 더욱이 객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객이 즐겁지 않으면 주인 또한 어찌 좋겠는가?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 것을 재삼 간곡하게 부탁한다. 너희들이 곡을 하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객으로서의 내 마음이 상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만을 오직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였으니, 사시사철 제사할 때 내가 직접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편집하고 기록했던 책을 공양 탁자 오른쪽에 놓아두라. 평소 입던 옷을 공양 탁자 왼쪽에 놓아두고, 아침에 진설하고, 저녁이 되면 거두어라. 매년 도합 13차례 제사를 지내는데, 비록 명목상 제사라고는 하지만, 역시 그저 밥 한 그릇, 차 한 잔, 된장 조금이면 족하다. 그러나 나는 향을 좋아하니, 반드시 좋은 향을 피워야 한다. 나는 돈을 좋아하니, 반드시 좋은 지전(紙錢)을 태워야 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니, 나의 책을 단단히 잘 챙겨, 한 권이라도 사람들에게 함부로 빌려주지 말 것이며, 때때로 햇볕 날 때 내다놓아 볕을 쬐어 말린 뒤에 거두어라. 나의 사위 장순부(莊純夫)가 근래에 자식을 가르친다기에 책을 보는 것을 허락하기는 했는데, 중요한 책들은 절대 주면 안 된다. 소식을 알리지 않을 것이므로 그도 내가 죽은 것을 모를 것이지만, 설령 혹시 다른 곳에서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와도 내 책을 주면 안 된다.

만약 이사관(李四官)이 오면, 남들 보기 좋으라고 거짓으로 곡을 하게 하지 말라. 너희들 역시 나의 죽음을 알리라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지는 그 날 죽은 것이 아니다. 식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여기 남아 머리 깎고 중이 된 때부터 나는 죽은 사람이다. 이미 그들에게도 모두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더 이상 집에 조금이라도 보태준 것이 없다.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어서 집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나는 충신이 될 수 있다’고 말을 했었다. 이는 집안을 잊고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나의 실상을 보고 점쳐본 것이지, 결코 거짓으로 속이려고 큰 소리를 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고향 진강(晉江)이 비록 아무리 멀다 해도 3천여 리에 불과하니, 가서 금일봉을 전하라고 중 한 사람 보냈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 얼마 안 되는 비용을 내가 어찌 아까워했겠느냐?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라고 하였으니, 피차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을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출가함으로써 마음이 편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으로 살아 감으로써 마음이 편하다. 굳이 서로 왕래하느라고 먼 길에 노고와 비용을 들이며 강호의 풍파를 겪을 필요 없다. 이는 그들을 성취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나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내 마음 또한 따라서 시름에 잠기고 고통스럽고, 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 내 마음 또한 의혹과 두려움에 빠지며,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면 나 또한 그들이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필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을 보내 문안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끊어서 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장순부는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여전히 속세의 정으로 나에게 예를 차리면서, 지금까지 이미 세 번 이 곳에 왔었다. 그의 집이 가난하니, 올 때 필시 여비를 빌리고 집안 식구더러 그 대가로 임시 일을 하게 하여 식구들을 궁지에 빠뜨렸을 것이다. 40여 일 걸리지 않으면 여기 도착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여기서 한 달 정도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기 쉽지 않을 것이고, 또 40․50일 걸리지 않으면 집에 도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따져보면, 나는 그저 집에서 출가한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다. 왜 꼭 장순부에게 이렇게 해를 끼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매번 그가 이 곳에 올 때마다 나는 몹시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 역시 그가 감히 다시는 이 곳에 올 생각을 하지 말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곳에 오지 않게 했는데, 또 어떻게 사람을 그 곳에 보낼 수 있겠는가? 줄곧 사람을 그 곳에 보내지 않았었는데, 이제 와서 또 어떻게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사람을 그 곳에 보내겠는가? 왜냐 하면, 내가 죽은 것은 내 목숨이 끊어지는 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것이 이미 그때가 아닌데, 어찌 봉탑(封塔)을 하여 죽은 것으로 나를 대하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들도 마땅히 평일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를 평일처럼 대하고, 나를 생전처럼 섬기고, 말에 구애됨이 없고 하는 일에 구애됨이 없어, 예전보다 더욱 부지런하고 신중히 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여 ‘용호의 승려들이 이처럼 계율을 잘 지키는구나’, ‘용호의 승려들이 이처럼 한 치의 어김도 없이 탁오(卓吾)를 모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한다면, 나에게도 크나큰 기쁨이 될 것이다. 나를 다시 볼 수 없다 하여 왜 꼭 괴로워하고 슬퍼할 필요 있겠는가?

비록 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책을 펴면 그 안에 나의 마음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요, 정신적으로는 또한 형체를 벗어나 천만 배 가까이 만나는 것이니, 내 책 또한 그렇지 않은가? 하물며 이 <예약>(豫約)을 읽으면서 여기 담긴 규약을 지키면 탁오노자(卓吾老子)를 종일 대하는 것이 된다. 10개의 눈으로 보아도 그처럼 훤히 보이는 것이 없고, 열 손가락이 가리켜도 그처럼 가까운 것이 없으니, 왜 꼭 이 깡마른 뼈다귀와 장작같은 머리가 없어진 것에 연연하여, 탁오노자를 잊지 못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슬퍼할 필요 있겠는가? 노력해야 하느니라! 조심해야 하느니라!

내가 예전에 이곳 마성(麻城)에 왔을 때, 현(縣)의 성 밑에 위치한, 지금 건물을 증축하고 있는 유마암(維摩庵)이라는 곳을 증승암(曾承庵)[6]이 사들였지만, 이는 모두 주우산(周友山)의 것이다. 내가 이미 따로 <유마암창건시말>(維摩庵創建始末)을 기록하여, 북경의 주우산에게 보냈다. 시주와 관계된 모든 사항은 그 글에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아직 잘 모르겠다는 사항이 있으면 관련 장부를 다시 찾아서, 우선 사천(四川)에 있는 주우산에게 보내라. 두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유마암에 보시와 공덕을 베푼 사람들에 대한 모든 현황을 책상 앞에 앉아 하나도 빠짐없이 훤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마암창건시말> 기록은 아직 두 본이 남아 있는데, 한 본은 용호의 상원에 남겨두어 참고하게 하고, 한 본은, 누옥(樓屋)과 정실(靜室)을 굳게 지킬 만한 독실한 승려가 나타나면, 주우산이 보는 앞에서 전해주도록 하라.

세상의 풍속이 날로 각박해져 본분을 지키지 않아서, 일반 백성도 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출가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삼가 부지런히 맑은 원칙[淸規]을 지켜서, 마구잡이로 제자나 무리를 끌어모으는 것이 능력있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설령 나의 10분의 1이나 혹은 그 반 만큼을 배우지 못한다고 해도, 나의 100분의 1이나 100분의 2 만큼만 배우면 될 것이다. 괴롭도록 기를 쓰고 낑낑대며 밤낮으로 쉬지 않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집에 있는 사람들은 처자식과 친족 등이 있어, 입고 먹고 인정을 베푸는 문제에 있어서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같이 출가한 사람들은 일찍이 돈 한 푼이나 쌀 한 톨이라도 자기 한 몸 몫으로 세금을 낸 적이 없으니, 만약 분수를 지킬 줄 모른다면, 사람들이 화를 입힐 뿐 아니라, 하늘이 반드시 형벌을 내려서, 피하거나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주우산이 이 암자를 희사하고 떠난 것도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암자는 증(曾)․유(劉) 두 집안으로부터 은 72냥을 희사 받았으니, 경시할 수 있겠는가?

주우산이 나를 공경하는 이유는 그래도 내게는 조금 인간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다른 곳에도 가지 않는 것은 주우산이 나를 알아주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누구를 사귀는 일이 드물어서, 알고 어울리는 사람이 적었다. 조금 자라면서, 밖에서 미천한 관직에 있을 때는 비록 때로 나를 공경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역시 건성건성 피상적으로만 나를 보았을 뿐, 주우산만큼 나를 깊이 알아준 사람은 없었다.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벗을 찾으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역시 이 때문일 뿐이다. 또한 주우산은 단지 나를 알아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다. 무엇 때문인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일단 과거에 급제하면, 자기를 뽑아준 시험관의 장[座主]을 친부모로 여겨 종신토록 잊지 못하고, 제학관(提學官)이 자기를 수석으로 뽑으면, 제학관을 은사라고 생각하여 부형처럼 섬긴다. 그들이 자기를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글을 보고 알아주는 경우에도 이럴 정도인데, 하물며 마음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경우에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남이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정도면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나를 탓하고, 집안과 마을 사람들 또한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나를 탓한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당신들이 만약 나를 알아주어 내가 일등이라고 인정한다면 내가 스스로 돌아가리니, 굳이 힘들게 나더러 돌아가라고 권할 필요 있을까?”라고 자문자답할 뿐이다.

그러나 우산은 사실 나의 스승이다. 단지 나를 알아주는 것 뿐이 아니다.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물러나 은둔하는 수행법’[退藏之密][7]은 실로 노자 이후 유일한 사람이다. 나 스스로 발돋움하여 그를 우러러보고 있어, 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다. 너희들은 나의 탑을 잘 지키고 맑은 원칙을 오래 지켜야 한다. 주우산이 이 세상에 있으면 반드시 너희들을 지켜줄 것이다. 너희들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유근성(劉近城)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실로 양봉리[8]와 같다. 매담연[9]은 출세간한 장부이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남자도 그녀의 경지에 이르기 쉽지 않다. 도를 배워, 이제 나름의 확실한 견해가 세워졌으니,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비록 나를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았지만

― 그녀는 내가 남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 이제까지 때때로 사람을 보내 30리 길을 달려 와서 불법에 대해 묻고는 했다. 내가 답변하지 않으려고 해도 답변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스승을 대하는 예로 묵묵히 나를 섬겼다. 내가 비록 세상에서 반쪽의 제자도 거두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부탁에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가르침을 청한 글에 답장했다. 그녀는 나를 스승으로 호칭했고, 나 역시 답할 때 그녀를 ‘담연사’(澹然師)라고 호칭함으로써, 남의 스승이 되지 않는다는 계율을 끝내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오호! 서로 만나지도 않았는데 스승이라고 하고, 한쪽만 스승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 스승이라고 하다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로다!

담연을 스승이라고 호칭하는 이유는 담연이 이미 머리를 깎고 불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호칭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재가(在家)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담연 역시 원래는 보살이었다. 집안이 풍족하고 가문이 번성하여 친척들이 항상 예를 차려 왕래해서, 한가롭게 보낼 때가 없었는데, 때로 머리 맞대고 함께 불도를 논할 겨를이 어디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모여서 불도를 논할 겨를이 없으면, 물러나 불경을 통해 가르침을 보고, 때때로 물어서 모두 확실한 근거를 얻었으니, 이 어찌 이름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설사 이름을 좋아해서 그렇게 했더라도, 이는 이미 천하의 기이한 남자에게도 드문 것이다. 하물며 진실로 생과 사를 초월하기 위한 일념으로 아침 저녁으로 오직 불문(佛門)을 향하여 부지런히 참배하고 깨우침을 청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공경할지어다! 공경할지어다!

또한 출가하지 않은 여보살이었을 때는 친척들이 사랑하는 경우도 있고 투기하는 경우도 있어, 이런저런 쓸데없는 구구한 말들을 많이 하여, 귀로 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불도를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출세간한 사람이 되었다. 하물며 출가한 너희들은 별다른 일도 없는데 너희가 어찌 불심을 살피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염불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게 ‘서방결’[10]이 있어, 매우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하였으니, 염불하여 서방에서 살려는 사람은 이 요결(要訣)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변함없이 확고한 뜻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서방에 왕생(往生)할 수양을 닦는다 해도 또한 한 마디 상투적인 말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은 반드시 서방결을 보아 통달해야 바야흐로 서방에 왕생할 수양을 닦는 사람이 된다.

염불이란 서방의 아미타불을 보려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서방에서 사는 것이지, 가서 살 서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견성(見性)이란 자기의 본성이 아미타불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본성이 아미타불이라는 것을 보면 바로 성불하는 것이지, 또한 이룰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방에 왕생할 수양을 닦는다는 것은 결국 부처를 보려는 것일 뿐이다. 단지 저 아미타불만 볼 수 있다 해도 이미 항상 부처의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보지 못할 이치가 또 어디 있는가?

때때로 눈으로 보고, 때때로 귀로 듣고, 때때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뜻이 합치된다. 잡된 배움이 없고, 잡된 일이 없어서, 하루를 들으면 100일 동안 역시 듣게 되고, 1겁(劫)을 함께 하면 백만 겁도 역시 함께 한다. 심지(心志)가 하나로 모아지면 따로 어디 가서 살 생각이 더 이상 없게 된다. 이것이 성불이 아니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성불하는 길이 매우 많지만, 특히 염불하는 이것만큼 어긋남 없이 직접 이르게 하는 것도 없다.

대지의 중생은 이 한 가지 생각을 닦고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총명하고 똑똑하다는, 염불하는 사람에게 물으면, 이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끝내 하나도 없으니, 그러면 비록 염불한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성불할 생각은 하지 않고, 부처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면, 비록 서방에서 살게 된들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설령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해도, 또한 부처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요, 다른 생각이 또 저절로 생겨,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것이니, 그러면 부처를 보아도 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염불하며 서방에 왕생할 수양을 닦는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서방에서 산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천만에 만만에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하루에 백만 번 부처를 부르며,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오직 여기에만 전념한다 해도, 나는 그것이 왕생하는 길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서방에 왕생하여 부처를 보고자 한다는 것을 발원(發願)하여, 때때로 그 가르침을 듣고, 반 마디 말이라도 감히 불신하지 않고, 감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왕생을 추구하는 본원(本願)이요, 정경(正經)이요, 주의(主意)이다. 처음에 탑을 지키는 것에 대해 말하다가 서방 정토를 닦는 요결에 대한 말로 끝맺게 되었다. 이는 모두 이전 현인들이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것이므로 이렇게 자세히 늘어 놓았다. 이것을 아침 저녁 염불하는 출발점으로 삼게 한다.

내가 열반에 든 것을 알면, 선인(善因)[11] 등 여러 보살들은 필시 사람을 보내 와 조문할 것이다. 이들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보살들이다. 선인같은 경우는 혼자 몸으로 수많은 가산을 모두 관리하는데, 꼼꼼하고 세심하여 조금도 빠트리는 것이 없다. 맏며느리로서 여러 시누이들을 부양하고, 예에 어긋남이 없이 모두 시집을 보냈다. 시누이들이 각각 그녀를 이간하려고 나쁘게 말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그녀의 본성이 화평하고 진심으로 효성과 우애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듣자 하니 그녀의 재능과 식견이 대단히 범상치 않다는데, 선인 스스로는 굳이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긴다. 때때로 수불정사(繡佛精舍)에 가서 그녀의 동생 담연사(澹然師)와 참된 불도를 탐구했는데, 반드시 불성(佛性)을 발견한 뒤에야 마쳤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진심으로 공경하고 존중한다. 이는 너희들이 모두 익히 들었던 것이다. 천 리 밖의 사람도 아니요, 백 년 전의 오래 된 일도 아니건만, 혹시 전설인가 하여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너희들은 그저 “출가하면 곧 부처가 된다. 집에서 수도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한다. 지금 나도 역시 출가했다지만, 어디 남보다 나은 점이 있느냐? 나는 아주 부득이해서 출가했을 뿐이다. 출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뒤에 출가한 것도 아니요, 또한 반드시 출가해야 수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뒤에 출가한 것도 아니다. 집에 있으면 수도하기 좋지 않단 말이냐?

나는 평생 남에게 구속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 몸이 남에게 구속된다. 어릴 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배우고 스승을 섬길 때 또한 말할 필요도 없고, 자라서 학당에 들어가서도 사부와 제학종사(提學宗師)에게 구속되고, 관직에 들어가면 관직에 구속된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오면, 그 부(府)나 현(縣)의 고관대작들에게 구속된다. 오면 맞이하고, 가면 전송하고, 분금(分金)을 내어 술자리를 마련하고, 축금(軸金)을 내어 장수를 축하한다. 털끝 만큼이라도 조심하지 않아 그들의 환심을 잃으면 곧장 화가 닥친다. 그 구속은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 땅에 묻힐 때까지도 끝나지 않고 더욱 고통스럽게 구속한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바깥 사방으로 떠돌지언정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벗들을 방문하여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긴 했지만, 천하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이미 훤히 알았다. 그저 남의 구속 밑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한 가지 바램으로, 관직을 버렸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본심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믿기 어렵기 때문에 줄곧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출가하여 천하를 주유(周遊)해도, 그 주유하는 곳에 또 지방 장관이나 고관대작들이 있어, 내게 관심을 가져서 나를 구속했다. 등정석(鄧鼎石)[12]이 처음 현(縣)에 부임할 때, 비록 나 자신은 감히 그를 만나러 현의 관청에 찾아가지 않았지만, 그가 예를 갖추어 내게 물품과 서찰을 보내 왔다. 그러니 나로서도 아무 명함도 없이 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명함에 감히 ‘시생’(侍生)이라고 쓸 수가 없었으니, ‘시생’은 너무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요, 감히 ‘치생’(治生)이라고 쓸 수도 없었으니, ‘치생’은 스스로 속박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유우객자’(流寓客子)[13]라는 네 글자를 써서 회답했다.

‘유우’(流寓)라고 일컬은 경우가 고금에 때때로 있었다. 현재 군읍(郡邑)에서 각 지방의 지방지를 편찬할 때, ‘명환’(名宦)의 전기(傳記)를 수록하고 나서, 뒤이어 반드시 ‘유우’의 전기를 수록한다. ‘명환’은 현명한 지방 장관[公祖父母]을 말하고, ‘유우’는 현명한 은일(隱逸) 명사(名士)를 말한다. 현명한 지방 장관이 있으면 반드시 현명한 은일 명사가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유우’라고 서명을 한 것은 지방 장관도 그에 걸맞게 현명함을 뜻하는 것이다. 관리는 반드시 명성이 있어야 기록되고, 이름난 관리가 아니면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환’이라고 한다. ‘유우’ 같은 경우에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그가 현명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유우’라고 한다. 대개 세상에서 현명과 품격이 크고 높지 않으면서 ‘유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주회암(朱晦庵, 朱熹)은 무원(婺源) 사람인데, 종신토록 연평[14]에 있었고, 소씨 형제(蘇軾․蘇轍)는 미주(眉州) 사람인데, 하나는 겹현(郟縣)에 묻혔고, 하나는 영주(潁州)에 묻혔다. 그 뿐이 아니다. 소강절(邵康節, 邵雍)은 범양(范陽) 사람이고 사마광(司馬光)은 섬서(陝西) 하현(夏縣) 사람인데, 모두 종신토록 낙양(洛陽)에서 ‘유우’(流寓)했고, 백낙천(白樂天, 白居易)은 본래 태원(太原) 사람인데, 마찬가지로 낙양에서 ‘유우’(流寓)했다. 크고 높은 현자나 성인이 아니면, 그 누가 가는 곳마다 편히 여기며 있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굳이 따지지 않아도 그들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유우’라고만 쓰면 그만일 것 같은데, 게다가 또 ‘객자’(客子)라는 말을 덧붙여 서명하였으니, 군더더기가 아닐까? ‘흘러다니며[流] 묵는다[寓]’는 뜻의 ‘유우’(流寓)라는 말은 집을 짓고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땅을 갈고 씨 뿌려서 거기서 나는 것을 먹으면, 구속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객자’(客子)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여로에 잠시 머물 듯[旅寓]하는 것이지 정말로 ‘머물러 사는’[寓]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마광․소강절 등과 같은 것이다.

잠깐 있다 떠나는지, 오래 머물 것인지, 언제 떠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어, 현(縣) 장관이 비록 부모처럼 나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나에게 부모로서 다가오지 못하니, 부모가 아무리 높다 한들 나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네 글자를 모두 넣어 서명해야, 내가 객으로 이곳을 찾은 뜻과 구속을 바라지 않는 나의 심정이 훤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도 결국 삭발하고 출가하는 것만큼 낫지는 않다.

삭발하면 마성 본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부모의 구속을 받지 않을테니, 하물며 다른 성(省)의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혹자는 “이왕 그럴 바에야 본향에서 삭발해도 되는데, 왜 꼭 마성에서 삭발하셨습니까?”라고 말한다.

아! 나는 여기서 삭발하려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따져본 뒤에 머리에 칼을 댔다. 등정석은 내가 삭발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했고, 다음과 같은 그의 모친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내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는다고 네가 말씀드린다면, 밥을 차려 와도 입에 넣지 않는다고 말씀드린다면, 이(李) 어른은 머리를 깎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만약 이(李) 어른이 머리를 깎지 않으시도록 네가 설득할 수 있다면, 나는 네가 바로 진정한 효자요, 제일 좋은 관리라고 인정할 것이다.”

아아! 내가 삭발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나는 오직 남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으려고 삭발을 하기로 했지만, 또한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저절로 콧날이 시큰해진다. 너희들은 절대 삭발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지도 말 것이요, 남의 보시를 가볍게 받아들이지도 말라!

내게는 그동안 일도 또한 극도로 많았다. 나는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고난을 있는대로 다 겪었다. 일생 동안 우여곡절이 많아서, 대지를 먹 삼아 갈아 써도 다 쓰기 어려울 정도이다.

현박사(縣博士)로 있을 때는[15] 현령(縣令)․제학(提學) 등과 충돌했고, 태학박사(太學博士)로 있을 때는 좨주(祭酒)․사업(司業) 등과 충돌했다. 진(秦) 아무개․진(陳) 아무개․반(潘) 아무개․여(呂) 아무개 등,[16] 충돌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사례조무(司禮曹務)가 되어서는 고상서(高尙書, 高儀)․은상서(殷尙書, 殷士儋)․왕시랑(王侍郞, 王希烈)․만시랑(萬侍郞, 萬士和) 등과 모두 충돌했다. 후에 고(高)․은(殷) 모두 입각하고, 반(潘)․진(陳)․여(呂) 모두 입각했다. 젊은 나이의 유능하고 빼어난 유명 진사 출신들을 고의[17]가 무수히 쓸어 갔는데, 오직 나만 일찌감치 그와 충돌하여 멀어짐으로써 온전하게 되었으니, 고의는 역시 인걸이로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원외랑(員外郞)으로 있을 때, 상서(尙書) 사등지(謝登之)와 대리경(大理卿) 동(董)․왕(汪) 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다.[18] 사(謝)는 말할 것이 없고, 왕(汪)과 동(董)은 모두 바른 사람으로, 나와 어긋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모두 공명(功名)에 급급하여, 청렴결백한 것이 남보다 뛰어나지도 않은데, 스스로 열 배는 현명하다고 여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충돌을 면할 수 있으랴?

또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상서(尙書) 조금(趙錦)을 만난 것이다. 조(趙)는 도학(道學)으로 유명한데, 도학으로 유명할수록 나와 충돌이 더욱 심해질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오?

마지막으로 군수가 되어서는 왕순무(王巡撫, 王凝)와 충돌하고, 낙수도(駱守道, 駱問禮)와 충돌했다.[19] 왕응은 본래 하류여서, 말할 것이 없지만, 낙문례와는 서로를 가장 잘 알았다. 그 사람은 가장 능력이 있고, 지키는 것이 있고,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뛰어나다고 할 만 하다. 그러나 끝내 그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인가? 그는 지나치게 각박하고 사나워서, 결국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나를 청렴하고 각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아 공경했다가, 나중에는 거꾸로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보아, 해치려는 마음까지 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가 있는 것만 알고 남이 있는 것을 몰랐다. 고금을 통하여, 현인 군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왕왕 그랬다.

당시 내가 간절하게 낙문례를 설득했던 내용을 그대로 적어본다. “변방 지역에는 이족(夷族)과 한족(漢族)이 섞여 있어, 한족의 법을 모두 그대로 집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루하루 보내면서 한족의 군사와 이족이 함께 태평을 누리면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벼슬살이하는 사람들은 가족이 없으면 살기 힘듭니다. 그래서 가족을 데리고 오자니, 만 리 길을 고생고생하며 데리고 오다가, 낭패를 본 뒤에 떠나갑니다. 그러니 더욱 더 체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현자(賢者)가 되는 것뿐입니다.

어찌 모든 일을 완전무결하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고발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저 귀머거리 벙어리가 된 척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저것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청렴 근면 용감하게 일을 하며, 단지 자기만을 책할 수 있을 뿐, 남을 책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모든 일에 남을 책한다면, 나의 청렴과 능력도 역시 칭찬받을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그 많은 천하의 일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쯧쯧! 끝내 이 말 때문에 내가 그와 충돌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비록 서로 충돌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나에게 사람을 추천할 권한을 준다면, 반드시 낙문례를 가장 먼저 추천할 것이다.

이상이 내 평생의 대략이다. 깊은 산이 아닌 금마문(金馬門), 즉 궁중으로 피세(避世)하여, 만승(萬乘)의 황제를 동료나 친구로 삼아, 티끌을 머금고 치욕을 참으며 벼슬길에서 노닐었던 동방삭(東方朔)처럼 좋은 삶을 살지도 못했다. 중용의 도를 지켜 여섯 임금 밑에서 벼슬한 후한(後漢) 때 호광(胡廣)이나, 젊은 나이에 중용(重用)된 양(梁)나라 때 강총(江總), 그리고 네 왕조에 걸쳐 벼슬하면서 여섯 임금 밑에서 재상을 역임한 오대(五代) 때 풍도(馮道) 등과 같이 최상의 삶을 살지 못했다. 녹을 탐했으면서도 치욕은 참지 못했으니, 호구(虎口)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하늘이 내려준 행운일 뿐이다.

늙어빠진 몸이 되어,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책인가 생각해보고, 이렇게 출가를 했지만, 역시 최상책은 아니었다. 너희들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세상에서 세 가지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반드시 출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세 가지 부류가 아닌데 출가하는 것은 난을 피하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삶을 꾸려나갈 계책이 없어, 출가하여 한가하게 공양 밥을 얻어먹고 살면 그런대로 게으른 일생을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부류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말할 거리도 없다.

세 가지 부류란 무엇인가?

첫번째로, 세상에는 매복(梅福)[20]과 같은 부류가 있다. 인생이 자기에게는 가혹한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형체가 자기에게는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지혜가 자기에게는 독이라고 생각하고, 몸이 자기에게는 질곡이라고 생각하여, 확실히 자기 신세는 혹이나 사마귀처럼 쓸데없는 것이라고 보아, 부득불 관직을 버리고 저 홍애(洪崖)․옥사(玉笥) 사이에 숨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한 부류이다.

두번째로, 엄광(嚴光)․완적(阮籍)․진단(陳摶)․소옹(邵雍) 등과 같은 무리가 있다. 여상(呂尙)이 문왕(文王)을 만나고, 관중(管仲)이 제 환공(桓公)을 만나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선주(先主) 유비(劉備)를 만나고,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을 만나는 것 등에 견줄 수 있는 만남을 이루지 못하느니 차라리 숨고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평소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들을 하는데, 만약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논어》 <선진>, “居則曰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라고 말하기도 하고, “팔 것이다. 나는 제 값을 쳐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논어》 <자한>, “沽之哉! 我待價者也”]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공자는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은둔한 것이다. “세상에 도가 있으면 벼슬길에 나가고, 도가 없으면 재능을 감춘다”[《논어》 <위령공>, “有道則仕, 無道則懷”]라고 말한 것은 거백옥(蘧伯玉) 등을 칭찬한 말에 불과하다. 만약 공자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나 제 값을 쳐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비록 도가 있는 세상이라고 해도 자기를 팔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또한 한 부류이다. 천하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어찌 있을까? 하물며 천하를 다스리며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가 정말 있을까? 그래서 동굴․낚시터․소문산(蘇門山) 등에서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본디 그들이 있을 곳이었다.

세번째로,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무리가 있다. 부귀를 탐하기도 하고, 빈궁을 괴로워하기도 했다. 빈궁을 괴로워했기 때문에 걸식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걸식시>(乞食詩)에서 “문 두드리고 더듬더듬 말한다”고 했다. 부귀를 사랑했기 때문에 팽택(彭澤) 현령이 되었고, 그리하여 아들에게 하인을 한 사람 보내면서 “먹고 사는 데 힘든 너를 돕는다”고 했다. 그러나 허리를 굽히고 싶지 않은 바에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80일만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고 관직을 떠났다. 이 또한 한 부류이다.

마침 회림(懷林)이 옆에서 먹을 갈고 있었는데, “화상(和尙)께서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부류에 해당되시는지요?”라고 묻기에 나는 “매복․장주의 견해는 참으로 훌륭하다만, 내게는 그럴 자질이 없다. 또한 반드시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서 벼슬길에 나가려면, 반드시 세상을 뒤덮는 진정한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 아무래도 도공(陶公) 쪽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도연명은 천고의 맑은 바람인데, 내가 과연 어떠하길래, 감히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다만 오직 한 마음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의 구속을 받지 못하는 점이 우연히 같은 듯하여, 감히 그 경우에 가깝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이상 여섯 조항이다.[21]

마지막 조항을 보면서,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내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은 울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 내가 거듭 슬프게 말하는 것은 진실된 정이요 마음이니, 본디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슬퍼하지 않기를 원한다. 또한 너희들이 마음으로 슬퍼하기를 원한다.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이 진실로 슬퍼하는 것이다. 진실로 슬퍼하는 것은 스스로 그치기 어렵다. 누가 그칠 수 있을까?(권4)


[1] 승려를 화장한 뒤에 사리를 수습하여 보관하는 탑이다.

[2] 자신의 유골(사리)을 보관한 탑을 말한다.

[3] 용호(龍湖) 가에 있는 지불원(芝佛院)을 가리킨다.

[4] 춘원(春元)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인 듯하고, 문학(文學)은 말 그대로 글 잘하는 사람인 듯하다.

[5] 승려를 화장해서 나온 사리를 수습하여 감탑에 안치하고 탑을 봉하는 것을 말한다.

[6] 이지가 1585년 59세 때 초굉에게 쓴 편지(《분서》 증보 1 <與焦從吾> 및 《속분서》 권1 <與焦弱侯太史>)에서 “작년 10월 정주(亭州, 즉 麻城)에 한 번 왔었는데, 묵을 집도 없어 며칠만에 황안으로 돌아왔다가, 올해 3월 다시 여기(마성을 말하는 듯함) 와서, 무념(無念)이라는 초입지보살(初入地菩薩, 이제 막 보살의 경지에 들어가기 시작한 중) 및 증승암이라는 대승거사(大乘居士, 불도를 깨달으려고 수행하는 거사)를 꾀어, 함께 배를 띄워 남경(南京)에 가서 형과 함께 있었다”라고 쓴 것으로 추측할 때, 증승암은 만년의 이지를 모셨던 승려 무념과 친했던 재가(在家) 거사였으며 마성 사람이었던 것 같다.

[7] 퇴장지밀(退藏之密)은 《역경》 <계사상>에 ‘퇴장어밀’(退藏於密)이라는 말이 나온다. 재능․행적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하는 것을 일컫는 성어로 쓰인다.

[8] 양봉리(楊鳳里) 역시 무념․양정견․유근성 등과 마찬가지로 용호에서 이지와 함께 생활했던 사람일 것이다.

[9] 매담연(梅澹然)은 언니 선인(善因)과 더불어 자매가 매국정(梅國禎)의 딸이다. 자매가 출가하여 불도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속분서》 권1의 <매장공에게>[與梅長公]에서 매국정에게 딸 담연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고, 주우산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칭찬했다.

[10] 서방결(西方訣)은 ‘서방(西方)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요결(要訣)’을 뜻한다. 승려들이 나름대로 서방결을 터득한 요결을 밝힌 책을 저술하여, 수행의 교본으로 삼거나 세상에 유통시킨 사례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당나라 때 자은(慈恩)의 《서방요결》(西方要訣)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이지 본인이 만년에 저술한 이런 류의 책을 말하는 것 같다.

[11] 앞에 나온 매담연(梅澹然)과 자매 관계이다.

[12].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등정석이 관직에 있을 때 이지와 사귀었던 것으로 보인다.

[13] 유우(流寓)는 ‘거처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물 흐르듯 다니면서 어디에서든 마음 편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주로 은자(隱者)의 행적을 일컬을 때 많이 쓰는 말이다.

[14] 연평(延平)은 나예장(羅豫章, 羅從彦)의 문인으로 주자(朱子)~의 스승인 이동(李侗)을 말한다. 나예장은 정이천(程伊川)과 양구산(楊龜山, 楊時)의 제자이다. 정리하면 정이천 → 양구산 → 나예장 → 이연평 → 주자로 사승 관계가 이어진다.

[15] 1556년, 30세 때 이지는 휘현(輝縣)의 교유(敎諭)로 부임했다.

[16] 1564년(嘉靖 43년) 무렵, 이지 나이 38세 전후였다. 당시 국사감좨주(國士監祭酒)로 진명뇌(秦鳴雷)․진이근(陳以勤) 등이 있었고, 국사감사업(國士監司業)으로 반성(潘晟)․여조양(呂調陽) 등이 있었다.

[17] 고의(高儀)는 목종(穆宗) 때 예부(禮部)의 일을 관장하여 모든 예악제도가 그의 결정에 의해 행해졌을 정도였다. 목종이 죽은 뒤 장거정(張居正)이 권세를 잡게 되면서, 고의는 이미 병들었고, 그를 따르던 인재들은 거의 배척 당하였다.

[18] 1570년(隆慶 4년)~1576년(萬曆 4년), 이지가 44세부터 51세까지 남경형부원외랑(南京刑部員外郞)으로 있을 때이다. 당시 남경형부상서(南京刑部尙書)는 사등지(謝登之)․조금(趙錦)이었고, 대리경(大理卿)은 동전책(董傳策)․왕종이(汪宗伊)였다.

[19] 1577년(萬曆 5년), 51세 때 이후, 이지는 운남(雲南) 요안부(姚安府)에 지부(知府)로 부임하여 3년 동안 재직했다.

[20] 한대(漢代) 사람으로 성제(成帝)에게 왕봉(王鳳)의 폭정을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있던 중, 왕망(王莽)이 한나라 정권을 탈취하자 신선이 되어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21] 실제로는 일곱 조항이다. 아침저녁 공부[早晩功課]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여섯 조항이라고 한 것이다.

<豫約>

小引

余年已七十矣,旦暮死,皆不可知。然余四方之人也,無家屬僮仆於此,所賴以供朝夕者,皆本院之僧,是故豫爲之約。約曰:我在,則事體在我,人之敬慢亦在我。我若有德,人則敬我,汝等縱不德,人亦看不見也。我若無德,人則我慢,縱汝等眞實有德,人亦看不見也。所系皆在我,故我只管得我立身無愧耳。雖不能如古之高賢,但我青天白日心事,人亦難及,故此間大賢君子,皆能恕我而加禮我。若我死後,人皆唯爾輩之觀矣,可復如今日乎?且汝等今日亦自不暇:終年修理佛殿,塑像請經,鑄鐘鞔鼓,並早晚服事老人。一動一息,恐不得所,固忙忙然無有暇刻矣。今幸諸事粗具,塔屋已成,若封塔之後,汝等早晚必然守塔,人不見我,只看見汝,則汝等一言一動可茍乎哉!汝等若能加謹僧律,則人因汝敬,並益敬我,反思我矣。不然,則豈但不汝敬,將我此龍湖上院即同興溉寺應付僧一樣看了也,其爲辱門敗種,寧空此院,置此塔,無人守護可矣。吾爲此故,豫設戒約,付常融、常中、常守、懷捷、懷林、懷善、懷珠、懷玉等。若余幾眾,我死後無人管理,自宜遣之復還原處,不必強也。蓋年幼人須有本師管轄,方可成器;又我死後勢益淡薄,少年人或難當抵也。若能聽約忍饑和眾,則雖十方賢者,亦宜留與共聚,況此數眾與下院之眾乎?第恐其不肯或不能,是以趁早言之。一、早晚功課具上院《約束冊》中,不復再列。

一、早晚山門

山門照舊關鎖,非水火緊急,不得擅開,非熟客與檀樾爲燒香禮拜來者,不得擅開。若爲看境而來,境在湖上之山,潭下之水,盡在上院山門之外,任意請看,不勞敲門與開門也。

遠者欲做飯吃,則過橋即是柳塘先生祠,看祠有僧,來客可辦柴米,令跟隨人役燒茶煮飯,彼中自有鍋竈,亦不勞扣門矣。何也?山僧不知敬客禮數,恐致得罪耳。

一、早晚禮儀

除挑水舂米作務照常外,其徐非禮佛,即靜坐也,非看經,即經行念佛也。公是整頓僧衣與接客等矣,豈可效鄉間老以爲無事,便縱意自在乎?與其嬉笑,無寧恥,此實言也。其坐如山,其行如蟻,其立如柱,其止如釘,則坐止行立如法矣。我旣不自慢,人誰敢謾我?

有飯吃飯,無飯吃粥;有銀則糴,無銀則化。化不出米,則化出飯;化不出飯,則化出粥;化不出粥,則化出菜;化不出菜,則端坐而餓死。此釋迦律儀也。不法釋迦而法積攢俗僧可乎?此時不肯餓死,後日又不飽死不病死乎?總有一日死,不必怕餓死也。

旣不怕餓死,又胡爲終日馳逐乎?是故不許輕易出門。除人家拜望禮節與僧家無干,不必出門往看外,若稱要到某庵某處會我師父或師兄師弟者,皆不許,只許師父暫時到院相看,遠者留一宿,近者一飯即請回。若俗家父母兄弟,非辦齋不許輕易入門相見。若無故而時常請假,欲往黃柏山,欲往東山,欲往維摩庵等處者,即時驅遣之去。寧可無人守塔,不可容一不守戒約之僧,寧可終身只四五眾,不可妄添不受約一人。夫旣不許到師父住處矣,況俗家乎?如此則終日鎖門,出門亦自希矣。不但身心安閑,誌意專一,久則自覺便宜,亦不耐煩見世上人矣。有何西方不可到,大事不可明乎?試反而視世間僧日日邀遊街市,當自汗流羞恥之。化他日之錢米,養不惜羞之和尚,出入公私之門,妝飾狗臉之行,與衙門口積年奚殊也!彼爲僧如是,我爲僧不如是,不但修行所宜,體面亦自超越,起人敬畏,何苦而不肯閉門靜坐乎?旣終日閉門,亦自然無客,萬一有仕人或鄉先生來,不得不開門者,彼見我如此,亦自然生渴仰矣,雖相見何妨耶!接鄉士夫則稱老先生,接春元及文學則稱先生,此其持之者重矣。若稱之以老爹相公,反輕之耳。且旣爲佛子,又豈可與奴隸輩同口稱聲耶?我自重,人自重我;我自輕,人亦輕我:理之所必至也。閉門靜坐,寂然無聲,終年如此,神猶欽仰,何況於人?太上出世爲眞佛,其次亦不爲世人輕賤,我願足矣。區區藏屍塔屋,有守亦可,無守亦可,何足重乎!若本縣經過有公務者,自有下院眾人迎接,非守塔僧所當聞。

若其眞實有高興欲至塔前禮拜者,此佛子也,大聖人也,急宜開門延入,以聖人待之,烹茶而燒好香,與事佛等,始爲相稱。迎送務盡禮:談佛者呼之爲佛爺;講道學者呼之爲老先生;不講學不談佛,但其人有氣槪欲見我塔者,則呼之爲老大人。五眾齊出與施禮,三眾即退而辦茶,唯留常融、懷林二人安客坐而陪之:融隅坐,林傍坐,俱用漆椅,不可用凳陪客坐也。

有問乃答,不問即默,安閑自在,從容應對,不敢慢之,不可敬之。敬之則必以我爲有所求,甚不可也。

一、早晚佛燈

夫燈者所以繼明於晝夜,而並明於日月者也。故日能明於晝,而不能照重陰之下;月能明於夜,而不能照殿屋之中。所以繼日月之不照者,非燈乎?故謂之曰日月燈明佛,蓋以佛譬日月燈,稱佛之如燈如日月也。日月有所不照,唯燈繼之,然後無所不照,非謂日月可無而燈獨不可無也。今事佛者相沿而不知其義,以爲常明燈者,但是燈光,而不復論有日月,乃晝夜然燈不息,則日月俱廢矣。蓋但月爲無用之光,而日亦爲無益之明矣。故今只令然燈於夜,晝則不敢然,以佛常如日也。只令然燈於晦,望之前後十餘夜即不敢然,以佛之常如月也。唯鄰晦朔前後半余月,然燈徹旦,以佛之常如燈也。則允矣,足稱日月燈明佛矣。

一、早晚鐘鼓

夫山中之鐘鼓,即軍中之號令,天中之雷霆也,電雷一奮,則百谷草木皆甲坼;號令一宣,則百萬齊聲,山川震沸。山中鐘鼓,亦猶是也。未鳴之前,寂寥無聲,萬慮俱息;一鳴則蝶夢還周,耳目煥然,改觀易聽矣。縱有雜念,一擊遂忘;縱有愁思,一捶便廢;縱有狂誌悅色,一聞音聲,皆不知何處去矣。不但爾山寺僧眾然也,遠者近者孰不聞之?聞則自然悲仰,亦且回心易向,知身世之無幾,悟勞攘之無由矣。然則山中鐘鼓所系匪鮮淺也,可聽小沙彌輩任意亂敲乎?輕重疾徐,自有尺度:輕則令人喜,重能令人懼,疾能令人趨,徐能令人息,直與軍中號令、天中雷霆等耳,可輕乎哉!雖曰遠近之所望而敬者,僧之律行,然聲音之道原與心通,未有平素律行僧寶而鐘鼓之音不清越而和平也。旣以律行起人畏敬於先,又聽鐘鼓和鳴於清晨良霄(宵)之下。時時聞此,則時時熏心;朝朝暮暮聞此,則朝朝暮暮感悅。故有不待入門禮佛見僧而潛修頓改者,此鐘鼓之音爲之也,所系誠非細也。不然,我之撞鐘擊鼓,如同兒戲,彼反怒其驚我眠而聒我耳,反令其生噪心矣。

一、早晚守塔

封塔後即祀木主,以百日爲度,早晚俱燒香,唯中午供飯一盞,清茶一甌,豆豉少許,上懸琉璃。我平生不愛人哭哀哀,不愛人閉眼愁眉作婦人女子賤態。丈夫漢喜則清風朗月,跳躍歌舞,怒則迅雷呼風,鼓浪崩沙,加三軍萬馬,聲沸數里,安得有此俗氣,況出家人哉!

且人生以在世爲客,以死爲歸,歸家則喜而相慶,亦自謂得所而自慶也,又況至七八十而後歸,其爲慶幸,益以無涯,若復有傷感者,是不欲我得所也,豈出家人之所宜乎?古有死而念佛相送,即今人出郭作歌送客之禮,生死一例。茍送客而哀興,豈不重難爲客耶?客旣不樂,主人亦何好也?是以再四叮嚀,非怕汝等哭也,恐傷我歸客之心也。唯當思我所嗜者。

我愛書,四時祭祀必陳我所親校正批點與纂集抄錄之書於供卓之右,而置暢衣裳於供卓之左,早陳設,至晚便收。每年共十二次祭祀,雖名爲祭祀,亦只是一飯一茶一少許豆豉耳。公我愛香,須燒好香;我愛錢,須燒好紙錢;我愛書,須牢收我書,一卷莫輕借人,時時搬出日頭曬曬,幹便收訖。雖莊純甫近來以教子故,亦肯看書,要書,但決不可與之。且彼亦不知我死,縱或於別處聞知我死而來,亦不可與以我書。

李四官若來,叫他勿假哭作好看,汝等亦決不可遣人報我死,我死不在今日也。自我遣家眷回鄉,獨自在此落發爲僧時,即是死人了也,已欲他輩皆以死人待我了也,是以我至今再不曾遣一力到家者,以謂已死無所用顧家也。故我嘗自謂我能爲忠臣者,以此能忘家忘身之念卜之也,非欺誕說大話也。不然,晉江雖遠,不過三千餘里,遣一僧持一金即到矣,余豈惜此小費哉?不過以死自待,又欲他輩以死待我,則彼此兩無且:出家者安意出家,在家者安意做人家。免道途之勞費,省江湖之風波,不徒可以成就彼,是亦彼之所以成就我也。

何也?彼勞苦則我心亦自愁苦,彼驚懼則我心亦自疑懼;彼不得安意做人家,我亦必以爲使彼不得做人家者我陷之也。是以不願遣人往問之。其不肯遣人往問之者,正以絕之而使之不來也。莊純甫不曉我意,猶以世俗情禮待我,今已到此三次矣。其家旣窮,來時必假借路費,借倩家人,非四十餘日不得到此,非一月日不好遽回,又非四五十日未易抵家。審如此,則我只宜在家出家矣,何必如此以害莊純甫乎?故每每到此,則我不樂甚也,亦以使之不敢復來故也。旣不肯使之來此,又豈肯遣人往彼乎?一向旣不肯遣人往彼,今日又豈可遣人往彼報死乎?何者?總之,我死不在今日也。我死旣不在今日,何謂封塔而乃以死待我也?則汝等之當如平日又可知也,待我如平日,事我如生前,言語不茍,行事不茍,比舊更加謹慎,使人人咸曰龍湖僧之守禁戒也如此,龍湖僧之不謬爲卓吾侍者也又如此,其爲喜悅我也甚矣,又何必以不復見我爲苦而生悲愴也?我之形雖不可復見,而我心則開卷即在矣。讀其書,見其人,精神且千萬倍,若彼形骸外矣,又何如我書乎?況讀其豫約,守其戒禁,則卓吾老子終日對面,十目視之無有如其顯,十手指之無有如其親者,又何必悲戀此一具瘦骨柴頭,以爲能不忘老子也耶?勉之戒之!

我初至麻城,曾承庵創買縣城下今添蓋樓屋所謂維摩庵者,皆是周友山物,余已別有《維摩庵創建始未》一書寄北京與周友山矣。中間開載布施事頗詳悉,其未悉者又開具緣簿中,先寄周友山於川中。二項兼查,則維摩庵布施功德主,亦昭昭可案覆而審,不得沒其實也。《創建始末》尚有兩冊:一冊留龍湖上院爲照;一冊以待篤實僧能堅守樓屋靜室者,然後當友山面前給與之。世間風俗日以偷薄,不守本分,雖百姓亦難,何況出家之者。謹守清規,莫亂收徒眾以爲能!縱不能學我一分半分,亦當學我一厘兩厘,何苦勞勞碌碌,日夜不止也。在家之人,尚爲有妻兒親眷等,衣食人情,逼迫無措,我出家人,一身亦不曾出一丁銀米之差,若不知休,非但人禍,天必刑之,難逃免也。周友山旣舍此庵,不是小事。此庵見交銀七十二兩與曾、劉二家矣,可輕視之歟!

夫友山之所以敬我者,以我稍成一個人也。我之所以不回家,不他往者,以友山之知我也。我自幼寡交,少知遊。稍長,從薄宦於外,雖時時有敬我者,然亦皮膚粗淺視我耳;深知我者無如周友山。故我不還家,不復別往尋朋友也,想行遍天下,亦只如此已矣,且友山非但知我,亦甚重我。夫士爲知己死,何也?知己之難遇也。今士子得一科第,便以所取座主爲親爺娘,終身不能忘;捉學官取之爲案首,即以提學官爲恩師,事之如事父兄:以其知己也。以文相知,猶然如此,況心相知哉!故天下未有人而不喜人知己者,則我之不歸家又可知矣。今世不察,旣以不歸家病我,家中鄉里之人,又以不歸家爲我病。我心中只好自問自答,曰:「爾若知我,取我爲案首,我自歸矣,何必苦勸我歸也。」然友山實是我師,匪但知我已也。此其退藏之密,實老子之後一人,我自望之若跂,尤不欲歸也。爾等謹守我塔,長守清規,友山在世,定必護爾,爾等保無恐也。

劉近城是信愛我者,與楊鳳裏實等。梅淡然是出世丈夫,雖是女身,然男子未易及之,今旣學道,有端的知見,我無憂矣。雖不曾拜我爲師,——彼知我不肯爲人師也——然已時時遣人走三十里問法,余雖欲不答得乎?彼以師禮默默事我,我縱不受半個徒弟於世間,亦難以不答其請,故凡答彼請教之書,彼以師稱我,我亦以淡然師答其稱,終不欲犯此不爲人師之戒也。嗚呼!不相見面相師,不獨師而彼此皆以師稱,亦異矣!

於淡然稱師者,淡然已落發爲佛子也,於眾位稱菩薩者,眾位皆在家,故稱菩薩也,然亦眞正是菩薩。家殷而門戶重,即親戚往來常禮,亦自無閑曠之期,安得時時聚首共談此事乎?不聚而談,則退而看經教,時時問話,皆有的據,此豈可以好名稱之!夫即使好名而後爲,已是天下奇男子所希有之事,況實在爲生死起念,早晚唯向佛門中勤渠拜請者乎?敬之敬之!亦以眾菩薩女身也,又是有親戚愛妒不等,生出閑言長語,不可耳聞也,猶然不一理會,只知埋頭學佛道,作出世人,況爾等出家兒,並無一事,安可不究心,安可不念佛耶?

我有西方訣,最說得親切,念佛求生西方者,須知此趣向,則有端的志氣矣。不然,雖曰修西方,亦是一句見成語耳。故念佛者定須看通了西方訣,方爲眞修西方之人。夫念佛者,欲見西方彌陀佛也。見阿彌陀佛了,即是生西方了,無別有西方可生也。見性者,見自性阿彌陀佛也。見自性阿彌陀佛了,即是成佛了,亦無別有佛可成也。故修西方者,總爲欲見佛耳,雖只得面見彼佛阿彌陀,然旣常在佛之旁,又豈有不得見自己佛之理耶?時時目擊,時時耳聞,時時心領而意會。無雜學,無雜事,一日聽之,百日亦聽之;一劫伴之,百萬劫亦與之伴:心志純一,再無別有往生之想矣,不成佛更何待耶?故凡成佛之路甚多,更無有念佛一件直截不磋者;是以大地眾生,咸知修習此一念也。然問之最聰明靈利肯念佛者,竟無一人曉了此意,則雖念佛何益?旣不以成佛爲念,而妄謂佛是決不可成之物,則雖生西方,欲以奚爲?縱得至彼,亦自不肯信佛言語,自然復生別想,欲往別處去矣,即見佛猶不見也。

故世之念佛修西方者可笑也,決萬萬無生西方之理也。縱一日百萬聲佛,百事不理,專一如此,然我知其非往生之路也,須是發願欲求生西方見佛,而時時聽其教旨,半言不敢不信,不敢不理會,乃是求往生之本願正經主意耳。以上雖說守塔事,而終之以修凈土要訣,蓋皆前賢之所未發,故詳列之,以爲早晚念佛之因。

一、感慨平生

善因等眾菩薩,見我涅槃,必定差人來看。夫諸菩薩甚難得,若善因者,以一手面綜數產,纖悉無遺;以家婦而養諸姑,昏嫁盡禮。不但各無間言,亦且咸得歡心,非其本性和平,眞心孝友,安能如此?我聞其才力、其識見大不尋常,而善因固自視若無有也。時時至繡佛精舍,與其妹淡師窮究眞乘,必得見佛而後已。故我(猶)(尤)眞心敬重之。此皆爾等所熟聞,非千里以外人,百年以遠事,或出傳說未可信也←等但說出家便是佛了,便過在家人了。今我亦出家,寧有過人者,蓋大有不得已焉耳,非以出家爲好而後出家也,亦非以必出家乃可修道然後出家也。在家不好修道乎?緣我平生不愛屬人管。夫人生出世,此身便屬人管了。幼時不必言;從訓蒙師時又不必言,旣長而入學,即屬師父與提學宗師管矣;入官,即爲官管矣。棄官回家,即屬本府本縣公祖父母管矣。來而迎,去而送;出分金,擺酒席;出軸金,賀壽旦。一毫不謹,失其歡心,則禍患立至,其爲管束至入木埋下土未已也,管束得更苦矣。我是以寧飄流四外,不歸家也。其訪友朋求知已之心雖切,然已亮天下無有知我者;只以不願屬人管一節,旣棄官,又不肯回家,乃其本心實意。特以世人難信,故一向不肯言之。然出家遨遊,其所遊之地,亦自有父母公祖可以管攝得我。故我於鄧鼎石初履縣時,雖身不敢到縣庭,然彼以禮帖來,我可無名帖答之乎?是以書名帖不敢曰侍生,侍生則太尊己;不敢曰治生,治生則自受縛。尋思四字回答之,曰「流寓客子」。夫流寓則古今時時有之,目令郡邑誌書,稱名宦則必繼之以流寓也。名宦者,賢公祖父母也;流寓者,賢隱逸名流也。有賢公祖父母,則必有賢隱逸名流,書流寓則與公祖父母等稱賢矣。宦必有名乃紀,非名宦則不紀,故曰名宦。若流寓則不問可知其賢,故但曰流寓,蓋世未有不是大賢高品而能流寓者。晦庵婺源人,而終身延平;蘇子瞻兄弟俱眉州人,而一葬郟縣,一葬潁州。不特是也,邵康節范陽人也,司馬君實陜西夏縣人也,而皆終身流寓洛陽,與白樂天本太原人而流寓居洛一矣。孰謂非大賢上聖而能隨寓皆安者乎?是以不問而知其賢也。然旣書流寓矣,又書客子,不已贅耶?蓋流而寓矣,非築室而居其地,則種地面食其毛,欲不受其管束又不可得也。故兼稱客子,則知其爲旅寓而非眞寓,如司馬公、邵康節之流也。去住時日久近,皆未可知,縣公雖欲以父母臨我,亦未可得。旣未得以父母臨我,則父母雖尊,其能管束得我乎?故兼書四字,而後作客之意與不屬管束之情暢然明白,然終不如落發出家之爲愈。蓋落發則雖麻城本地之人亦自不受父母管束,況別省之人哉!或曰:「旣如此,在本鄉可以落發,又何必麻城?」噫!我在此落發,猶必設盡計校,而後刀得臨頭。此鼎石見我落發,泣涕甚哀,又述其母之言曰:「爾若說我乍聞之,整一日不吃飯,飯來亦不下咽,李老伯決定留發也。且汝若能勸得李老伯蓄髮,我便說爾是個眞孝子,是個第一好官。」嗚呼!余之落發,豈容易哉!余唯以不肯受人管束之故,然後落發,又豈容易哉!寫至此,我自酸鼻,爾等切勿以落發爲好事,而輕易受人布施也!

雖然,余之多事亦已極矣。余唯以不受管束之故,受盡磨難,一生坎坷,將大地爲墨,難盡寫也。爲縣博士,即與縣令、提學觸;爲太學博士,即與祭酒、司業觸。如秦,如陳,如潘,如呂,不一面足矣。司禮曹務,即與高尚書、殷尚書、王侍郎、萬侍郎盡觸也。高、殷皆入閣,潘、陳、呂皆入閣,高之掃除少年英俊名進士無數矣,獨我以觸迕得全,高亦人傑哉!最苦者,爲員外郎,不得尚書謝、大理卿董並汪意。謝無足言矣,汪與董皆正人,不宜與余抵。然彼二人者皆急功名,清白未能過人,而自賢則十倍矣,余安得免觸耶?又最苦而遇尚書趙。趙於道學有名。孰知道學益有名,而我之觸益又甚也?最後爲郡守,即與巡撫王觸,與守道駱觸。王本下流,不必道矣,駱最相知,其人最號有能有守,有文學,有實行,而終不免與之觸,何耶?渠過於刻厲,故遂不免成觸也。渠初以我爲清苦敬我,終反以我爲無用而作意害我,則知有己不知有人,今古之號爲大賢君子,往往然也。記余嘗苦勸駱曰:「邊方雜夷,法難盡執,日過一日,與軍與夷共享太平足矣。仕於此者,無家則難住;攜家則萬里崎嶇而入,狼狽而去。尤不可不體念之!但有一能,即爲賢者,豈容備責?但無人告發,即裝聾啞,何須細問?蓋清謹勇往,只可責已,不可責人,若盡責人,則我之清能亦不足爲美矣,況天下事亦只宜如此耶!」嗟嗟!孰知余竟以此相觸也哉!雖相觸,然使余得以薦人,必以駱爲薦首也。此余平生之大略也。上之不能如東方生之避世金馬門,以萬乘爲僚友,含垢忍恥,遊戲仕路;最上又不能如胡廣之中庸,梁江總之頭黑,馮道之五代。貪祿而不能忍詬,其得免於虎口,亦天之幸耳!旣老而思勝算,就此一著,已非上策,爾等安得知耶!

故余嘗謂世間有三種人決宜出家。蓋三種而出家,非避難,即無計治生,利其閑散,可以成就吾之懶也,無足言也。三種者何?蓋世有一種如梅福之徒,以生爲我酷,形爲我辱,智爲我毒,身爲我桎梏,的然見身世之爲贅疣,不得不棄官而隱夫洪崖、玉笥之間者,一也。

又有一種,如嚴光、阮籍、陳摶、邵雍輩,茍不得比於呂尚之遇文王,管仲之遇齊桓,孔明之遇先主,傅說之遇高宗,則寧隱無出。故夫子曰:「居則曰不吾知也,如或知女,則何以哉?」又曰:「沽之哉!我待價者也。」是以孔子終身不仕而隱也。其曰「有道則仕,無道則懷」,不過以贊伯王等云耳。若夫子茍不遇知已善價,則雖有道之世,不肯沽也。此又一種也。夫天下曷嘗有知己之人哉?況眞爲天下知已之主歟!其不得不隱居於巖穴、釣臺、蘇門之山,固其所矣。又有一種,則陶淵明輩是也:亦貪富貴,亦苦貧窮。苦貧窮,故以乞食爲恥,而曰「扣門拙言詞」;愛富貴故求爲彭澤令,因遣一力與兒,而曰「助汝薪水之勞」。

然無耐其不肯折腰何,是以八十日便賦《歸去》也。此又一種也。適懷林在傍研墨,問曰:「不審和尚於此三種何居?」余曰:「卓哉!梅福、莊周之見,我無是也。必遇知己之主而後出,必有蓋世眞才,我無是才也,故亦無是見也。其唯陶公乎?」夫陶公清風千古,余又何人,敢稱庶幾,然其一念眞實,受不得世間管束,則偶與同耳,敢附驥耶!

以上六條,未條復潦倒哀鳴,可知余言之不顧矣。勸爾等勿哭勿哀,而我復言之哀哀,眞情實意,固自不可強也。我願爾等勿哀,又願爾等心哀,心哀是眞哀也。眞哀自難止,人安能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