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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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각(董文恪)공이 일찍이 급제하지 않았을 때 빈 저택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집에 늘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공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밤에 등롱에다 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삼경이 지나자 음산한 바람이 쏴쏴 불더니 정원 문이 절로 열렸다.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몇몇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 들어오다가 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 집에 귀신이 있어. 귀신이.”

그리고는 모두 허겁지겁 달아났다. 공이 막대를 들고 그들을 쫓아가자 서로 이렇게 말했다.

“귀신이 쫓아오니 얼른 도망가세.”

그들은 다투어 담을 넘어갔다. 공은 늘 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웃으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나를 귀신이라 불렀는지 모르겠어.”

당시 고성(故城)사람 고한항(賈漢恒)이 공을 따라 다니며 경(經)을 배웠는데, 그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했다.

“야차(野叉)가 가서한(哥舒翰)의 첩의 시체를 먹으려 할 때 가서한이 때마침 시체 옆에서 자고 있었답니다. 야차가 서로 말했습니다.

‘귀인이 여기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소?’

가서한은 야차가 자신을 귀인이라고 부른 것을 유념하고는 그를 때려도 무해하다고 생각해 결국 야차를 때리기 시작했고, 야차는 달아나 사라졌다고 합니다. ‘귀(鬼)’와 ‘귀(貴)’는 음이 비슷하고, 어쩌면 귀신이 선생님을 귀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님이 자세히 듣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동문각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董文恪公未第時, 館於空宅, 云常見怪異. 公不信, 夜篝燈以待. 三更後, 陰氣颯然, 庭戶自啓. 有似人非人數輩, 雜遝擁入, 見公大駭曰: “此屋有鬼!” 皆狼狽奔出. 公持梃逐之, 又相呼曰: “鬼追至, 可急走.” 爭踰牆去. 公恆言及, 自笑曰: “不識何以呼我爲鬼?” 故城賈漢恆, 時從公受經, 因擧《太平廣記》載: “野叉欲啖哥舒翰妾屍, 翰方眠側, 野叉相語曰: ‘貴人在此, 奈何!’ 翰自念呼我爲貴人, 擊之當無害, 遂起擊之, 野叉逃散. 鬼ㆍ貴音近, 或鬼呼先生爲貴人, 先生聽未審也.” 公笑曰: “其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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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년(庚午年) 가을 《비아(埤雅)》 한 권을 샀다. 책 속에 푸른 색 종이가 접혀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쓸쓸한 안개 붉은 삽짝 문에 낮게 드리우고,
스산한 바람 가벼이 미녀의 창을 두드리네.
도깨비 불은 은은하게 고벽(古壁)에서 흘러나오고,
녹은 점점 번지더니 황금강을 잘라버렸네.
풀뿌리에 이슬 흘러내리니 가을벌레 조급해지고,
밤이 깊어지자 달빛 조용히 연꽃 비추네.
젖은 반딧불 텅 빈 연못 스쳐 지나가고,
그윽한 달빛 지고 있는 꽃 비추이네.

끝에 “청운선자(靚雲仙子)가 내려와 시를 짓고, 장응(張凝)이 삼가 받아 적다.”라고 제(題)되어 있는데, 아마도 부계점 친 사람이 쓴 것 같다. 나는 이 시가 귀신이 지은 시이지 신선이 지은 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庚午秋, 買得《埤雅》一部. 中摺疊綠箋一片, 上有詩曰: “愁煙低冪朱扉雙, 酸風微戛玉女窗. 靑磷隱隱出古壁, 土花蝕斷黃金釭.” “草根露下陰蟲急, 夜深悄映芙蓉立. 濕螢一點過空塘, 幽光照見殘紅泣.” 末題“靚雲仙子降壇詩, 張凝敬錄.” 蓋扶乩者所書. 余謂此鬼詩, 非仙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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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滄州)의 장현이(張鉉耳) 선생은 꿈속에서 절구 한 수(首)를 지었다.

가을 조수 강가에 밀려드니,
고주(孤舟)는 밤부터 삼경까지 정박해있네.
붉은 십이루(十二樓) 여기저기에 버들개지 드리워져 있는데,
어느 곳에서 밝은 달빛 벗 삼아 피리 부는가?

그는 스스로 이렇게 발문(跋文)을 썼다.

“꿈에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시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꿈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해도 평생토록 강남에 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이 이에 미쳤을까?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잠시 기록하여 보관한다.” 나는 애초에 동성(桐城) 사람 요별봉(姚別峰)을 몰랐다. 요별봉이 막 강남(江南)에서 왔을 때 이예전(李銳巓)의 집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그 역시 최근에 몇 작품을 지었다고 했는데, 그 안에 이 시가 있었다. 시를 지은 해와 달을 물어보았더니, 내가 꿈을 꾼 지 1년 뒤였다. 그리하여 상자를 열고 옛 원고를 꺼내 보여주었더니 모두 깜짝 놀라했다.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다 있구나! 송대 유학자들은 모든 일마다 이치를 따지는데, 이와 같은 이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또 해양(海陽) 사람 이수륙(李漱六)은 이름이 승방(承芳)이고, 나와는 정묘년(1747)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내 청사(廳事) 앞에 걸려 있는 「연명채국도(淵明採菊圖)」는 바로 남전숙(藍田叔)이 그린 것이다.

동곡강(董曲江)이 말했다.

“아무개 신선이 이수륙과 닮았다.”

이에 내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정말 그러했다. 후에 이수륙이 회시(會試)를 보러 북경에 왔다가 이 그림을 보고 달라고 해서 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평생 그린 초상화도 모두 이보다 못합니다.”

이 일 역시 이해할 수 없다.

滄州張鉉耳先生, 夢中作一絶句曰: “江上秋潮拍岸生, 孤舟夜泊近三更. 朱樓十二垂楊徧, 何處吹簫伴月明?” 自跋云: “夢如非想, 如何成詩? 夢如是想, 平生未到江南, 何以落想至此? 莫明其故, 姑錄存之. 桐城姚別峰, 初不相識, 新自江南來, 晤於李銳巓家. 所刻近作, 乃有此詩. 問其年月, 則在余夢後歲餘. 開篋出舊稿示之, 共相駭異. 世間眞有不可解事! 宋儒事事言理, 此理從何處推求耶?”

又海陽李漱六, 名承芳, 余丁卯同年也. 余廳事掛淵明「採菊圖」, 是藍田叔畫. 董曲江曰: “一何神似李漱六?” 余審視, 信然. 後漱六公車入都, 乞此畫去. 云平生所作小照, 都不及此. 此事亦不可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