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싱의 둥족과 카이리의 먀오족
퉁다오나 리핑 등 후난, 광시, 구이저우가 서로 인접하는 지역에는 소수민족 둥족이 살고 있다. 둥족은 인구 300만 명 정도로,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수가 11위이지만, 전통문화는 국가대표급에 속한다. 풍우교風雨橋나 고루鼓樓와 같이 처마가 촘촘한 둥족의 전통 건축, 수십 명이 반주나 지휘자 없이 독특한 발성과 화음으로 부르는 둥족의 대가大歌는 이 지역을 처음 여행하는 동반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소수민족 마을의 향기와 야경
홍군은 리핑에서 쭌이로 갈 때 서북 방향으로 험한 산지를 직선으로 통과했다. 우리는 리핑 80킬로미터 남쪽의 자오싱肇興에서 둥족 마을을 둘러보고,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크게 돌아 카이리凯里 인근의 먀오족苗族까지 돌아본 뒤 쭌이로 가기로 했다.
자오싱의 둥자이侗寨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대표적인 둥족 마을이다. 마을 외곽의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전용 전동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둥족 특유의 멋지고 화려한 풍우교가 외지인들을 맞아주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둥족의 진한 향기가 온몸을 적셔왔다. 이 마을은 원래 육씨陸氏 집성촌으로 5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구역마다 고루가 화려하면서도 날렵한 자태를 뽐냈다. 실개천 위에도 작은 풍우교가 걸려 있고, 마을 곳곳의 고루는 주민들이 모여 담소와 간식을 즐기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밤이 되자 조명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황색 기운이 도는 나트륨 조명등이 촘촘한 처마를 비추니 환상의 전설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음 날 자오싱을 출발하여 카이리 인근의 시장첸후西江千戶 먀오족 마을로 향했다. 시장첸후까지는 일반도로를 이용하면 240킬로미터이고,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로는 340킬로미터나 돌아가야 하지만 훨씬 빠르다.
시장첸후 먀오족 마을에 사는 주민은 9000여 명으로, 먀오족이 모여 사는 마을로는 가장 크다. 산기슭에 따로 따로 생긴 작은 마을들이 커지면서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낮에는 골목마다 먀오족 향기가 진하게 풍겨 나오고, 밤이면 독특한 야경이 멋진 곳이다. 집집마다 2층 처마 밑에 백열등을 하나씩 켜두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부챗살을 펼친 듯 아름답다. 관광지나 대도시에서 흔히 보는 경관 조명과는 아주 다르다. 산등성이 높은 객잔의 평상에 앉아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닭백숙 비슷한 훠궈에 향기가 진한 백주 한 잔을 곁들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시장첸후는 먀오족 문화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먀오족의 문화와 역사와 전통생활을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다. 중국에 사는 먀오족의 인구는 900만 명으로 좡족, 만족滿族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이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후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은 중원의 역사 기록이나 먀오족의 전설에 비추어보면 억지로 꿰어맞춘 것 같다. 오히려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남하하여 현지인과 결합하면서 형성된 저항적인 민족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김인희,《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푸른역사, 2011). 조선시대 후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간 조선인들을 중국에 심어진 모세관이라 한다면 먀오족은 고구려 시대에 미리 갈래를 쳐둔 우리 역사의 머나먼 신경세포인지도 모른다.
쌍창병을 뚫고 우강을 건너다
중앙홍군은 리핑을 떠나 신속하게 쭌이를 향해 서북쪽으로 진군하여 1935년 1월 1일 우강烏江 남안의 웡안현瓮安縣을 점령했다. 선발대를 파견해서 쭌이로 가기 위해 우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동안 본대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때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홍군 지휘부가 있는 허우창진猴場鎭으로 와서 저우언라이에게 강을 건너지 말고 강변을 따라 북상하여 후난성 서부로 갈 것을 또다시 요구했다. 우강의 양안이 절벽처럼 가파르고 강물의 유속이 빨라 적의 공격을 받으면 큰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 셋이서 합의하면 3인단 회의가 되므로 바로 당의 결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3인단이 리핑에서 결의한 내용을 번복할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저우언라이는 보구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당내 정치국 성원들 사이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을 허우창회의라고 한다.
회의에서 보구의 요구는 다수의 의견에 묻혀버렸다. 샹강을 건널 때에는 장제스 군대가 먼저 포위망을 구축해 조여오는 틈새를 뚫어야 했기 때문에 손실이 컸지만 지금은 추격군이 3일 거리 뒤에 있어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강을 따라 북상하는 것은 장제스가 쳐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라고 반박했다. 허우창회의는 리핑회의의 결의를 재확인하면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3인단의 이름으로 휘둘러오던 군사 지휘권을 무력화했다.
우강은 지형이 워낙 험한 탓에 중앙홍군이 도강 지점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쌍창병이라고 불리던 구이저우군은 해가 진 후에 초소 안에서 아편에 취해 있다가 대나무 뗏목을 타고 건너온 특공대에게 맥없이 생포되었다. 우강 북안의 초소를 점령한 홍군은 부교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도강했고, 1월 4일 중앙종대까지 도강을 완료했다.
우리는 시장첸후 먀오족 마을에서 나와 쭌이로 가기 전에 구이양으로 들어갔다. 최치영 님과 정일섭 교수가 귀국하고 엄문희 님과 일곱 살 아들 동섭 군 그리고 교육계 출신인 김영준 님이 새로 합류할 예정이었다.
최치영 님이 귀국하기 전날 일행을 위해 미식가답게 구이양의 고급식당에서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그동안 소수민족을 포함해 산간 마을들을 지나오면서 다소 거친 식사를 했던 탓에 더욱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만찬이었다. 최치영 님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취향이 다양한 데다. 값싸고 낯선 음식도 꺼리는 법이 없었다. 어떤 음식도 맛있게 먹었으며, 끼니마다 가지로 만든 요리를 하나씩 먹어보자는 재미있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나도 기꺼이 호응하여 가지 요리를 하나씩 주문했는데, 같은 가지라도 식당마다 요리법이 달라서 다들 즐거워했다.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은 하루 세 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낯선 체험이고 그곳 사람들의 삶을 직접 공감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답사 주제인 대장정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미식가가 동반해준 것도 일행에게는 행운이었다.
구이양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쭌이로 향했다. 중간쯤 지날 때 큰 다리가 하나 나왔는데 홍군이 건넌 지점은 아니었지만 우강이었다.
새로운 혁명 근거지, 쭌이
홍군이 우강을 건너자 우강 북쪽의 쭌이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구이저우군 부군단장인 허우즈단侯之担은 우강 봉쇄선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은보화를 챙겨서 군대를 끌고 충칭으로 도주해버렸다. 장제스는 구이저우군의 허약한 대처에 격노했다. 허우즈단을 구금하고 그의 군대는 중앙군에 흡수해버렸다. 장제스에게 홍군 토벌전은 홍군 토벌이건 군벌 흡수건 어쨌든 남는 장사였다.
우강을 건넌 홍군은 쭌이 인근까지 파죽지세였다. 이제 후난과 가까운 구이저우 제2의 도시 쭌이를 공략할 단계에 이르렀다. 홍군은 쭌이에 명승고적이 많은 점을 고려하여 강공을 펴기보다는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먼저 쭌이를 방어하기 위해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야간에 습격했다. 대대장을 포함해 십수 명의 지휘부 장졸들은 마작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들이닥친 홍군에게 사로잡혔다. 홍군은 이들에게 홍군의 포로 정책부터 설명했다. 홍군은 국부군 포로를 잡으면 공산당 이념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귀향을 원하면 여비를 주어 돌려보내고 홍군으로 전향하는 자들은 그대로 받아주었다. 부대장은 홍군의 선전과 사상교육에 감화되어 부대원들에게도 홍군에게 협력하도록 했다.
구이저우군에게서 탈취한 복장으로 위장한 1개 대대 병사들이 포로 15명과 함께 쭌이의 성벽으로 접근했다. 밤 11시경 포로들이 다급하게 성문을 두드렸다. 그들이 관등성명을 대며 홍군에 포위되었다가 겨우 탈출해왔다고 말하자 수비군은 의심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홍군이 무사히 진입한 다음 돌연 총칼을 들이대자 수비군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성문을 점령한 홍군은 전선을 절단해 성내의 전등을 모두 꺼버렸다. 곧이어 홍군 본대가 들이닥치자 쭌이는 끓는 솥을 엎지른 듯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홍군은 우왕좌왕하는 구이저우군들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홍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쭌이를 점령했다. 병력과 무기가 아닌 정신력에서, 마작 노름을 하며 시간을 죽이던 구이저우군과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홍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병력이 비슷한 수준의 일대일 전투에서는 거의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규율과 사기 같은 정신적인 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1935년 1월 8일 쭌이는 홍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구이저우군 군단장 왕자례는 쭌이 북쪽 30킬로미터의 러우산관婁山關으로 도주했다. 러우산관을 국부군이 장악하고 있는 한, 쭌이의 안전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홍군은 계속해서 러우산관으로 치달았다. 러우산관은 해발 1400미터의 가파른 산으로 구이저우에서 쓰촨과 충칭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홍군은 세 시간의 격전 끝에 러우산관을 함락시키고 20킬로미터를 더 북진했다. 이로써 홍군은 쭌이의 북쪽 대문까지 완전히 걸어 잠금으로써 안온한 거처를 확보했다.
우리는 22일째에 쭌이에 도착했다. 쭌이회의가 열렸던 곳과 인근의 혁명 유지들을 돌아보았다. 홍군의 자취가 쭌이시의 중심지를 화려하고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1935년 1월 8일 중앙홍군은 쭌이의 지하당 책임자가 지휘하는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다. 1월 9일에는 공산당 중앙과 군사위원회 종대가 군중 만여 명의 환영 속에 남문으로 입성했다. 지도부는 왕자례 등 구이저우군 군벌 장군들이 중서합벽中西合壁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은 공관들을 접수하여 지도부 사무실과 거처로 사용했다. 1월 12일에는 만인대회라는 군중집회를 열고 쭌이 혁명위원회 구성을 선포했다.
쭌이 혁명위원회 선포와 함께 쭌이를 혁명 근거지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지주와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해 토지는 빈농들에게 나누어주고, 기타 재산은 공화국 국고로 귀속시켰다. 공산당 선전활동에 열을 올리는 한편, 지원자들을 홍군 전사로 받아들였다. 국가은행이 문을 열어 공산당 화폐를 유통시키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풀기도 하고 홍군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대장정은 단순히 군대가 이동한 것이 아니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가 함께 이동한 사건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