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대장정 3 – 참패, 핏물로 범람한 샹강

대장정 이전의 혁명 근거지이자 수도였던 루이진을 둘러보고 다음날인 10일째 아침에 출발하여 위두와 대장정 출발 도강 지점을 거쳐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싱안興安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곳이 바로 홍군 최악의 참패 현장인데, 위두에서 약500킬로미터 거리다.

홍군은 위두하에서 싱안까지 약속대로 광둥 군벌이 내준 길을 따라 서진했다. 뒤늦게 홍군의 탈주를 알아차린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그 지역의 국부군이 세 번의 봉쇄선을 쳤지만 수만 명에 이르는 홍군의 서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구간을 그대로 통과해서 위두현 서쪽 200킬로미터 정도에 있는 루청汝城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아침 루청 시내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혁명열사공원을 올랐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데 대리석 표지석에 열사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대혁명(1926~1927년), 토지혁명 전쟁(1927~1937년), 항일전쟁(1937~1945년), 해방전쟁(1945~1949년), 중화인민공화국(1949년 이후) 등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숫자를 세어보니 총 435명이다. 지금 인구가 36만 명이니 해방 이전에는 10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작은 현에 열사가 자그마치 435명, 그나마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는 제외한 숫자다.

루청 열사공원의 주춘룽 흉상

열사 명단이 새겨진 비석 다음에는 참한 인상의 젊은 여성의 흉상이 나타났다. 1926년에 홍군 유격대에 합류했다가 국부군에 체포된 인물이었다. 체포된 후 무자비한 매질에다 철사로 유방을 꿰는 잔인한 고문을 받다가 끝내 17세 청춘으로 생을 마감한 주춘룽朱春榮이란 소녀다.

현지인이 아니면 알기 힘든 이런 사람들의 희생과, 그 희생을 기록해둔 후손들이 있기에 지금의 중국이 있는 것이 아닐까. 권력에는 그늘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중국은, 결코 음모의 밀실정치나 선전선동, 개인 숭배로 만들어진 우스꽝스러운 나라가 아니다. 시대의 광풍 속에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두 다리로 서 있는 나라다.

중국에는 열사공원 또는 열사능원이 현縣마다 있고, 예외 없이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엄숙주의가 무겁게 흐르지도 않는다. 아침에 시민들이 찾아와 태극권이나 체조를 하고, 오후에는 선남선녀가 데이트를 즐긴다. 열사공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엄마의 고생을 모르던 철없는 아이들이 어느새 부모가 되어 철없는 자식을 품어주듯, 지금은 후손들에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내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중국이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라지만 결코 사상누각이 아니라는 것을 루청의 열사공원에서 새삼 느꼈다.

루청에서는 예정에 없던 중국 경찰과 진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위두까지 답사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덕분에 비상용으로 챙겨둔 하루를 여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여분의 하루를 이용해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광둥성의 단샤산丹霞山을다녀오기로 했다. 루청에서 남쪽으로 두어 시간이면 가는 거리였는데 후난성에서 광둥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서 자동차보험 스티커를 차량에 부착하지 않은 것이 단속경찰에게 적발되었다. 공교롭게도 보험가입 서류도 없고, 윈난성雲南省에서 가입한 자동차보험 기록이 후난성에서 조회되지도 않았다. 운전기사도 경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경찰서 널찍한 마당에 차를 유치당한 채 반나절을 허비하게 되었다. 나는 일행에게 사정을 설명하고는 해가 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될 터이니 경찰서 마당에서 차라리 느긋하게 쉬자고 했다. 일행은 햇살을 쬐며 책을 읽기도 하고, 좌석을 펼치고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내가 기사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루청 시내로 나가 있는 동안 경찰들이 와서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팔을 잡아끌기도 했다고 한다. 해가 기울어가는데도 운전자 측에서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경찰은 나름의 해결 방법을 만들어 내부 보고서를 만들고는 약간의 벌금만 부과하고 차를 풀어주었다.

중국 공안이라고 하면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꺼리게 된다. 그러나 외국인 여행객에게 가장 안전하고 친절한 도우미는 바로 경찰이다. 길을 물을 때 노트를 내밀고 약도를 그려달라고 해도 친절하게 응해준다.

작은 도시에 밤늦게 도착해 숙소를 찾지 못할 때 경찰서로 들어가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꽤 있다. 이때 길을 못 찾겠다고 엄살을 부리면 경찰차로 데려다주는 친절도 몇 번 경험했다.

보험 스티커 사건으로 아까운 하루를 깔끔하게 털어먹고는 다시 루청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상쾌한 날씨 속에 샹강 전투 유적지인 싱안으로 직행했다.

루청에서 싱안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는 넓은 고속도로를 거의 전세라도 낸 듯이 달렸다. 노면이 깨끗해서 승차감도 최고였다. 중간에 교통표지판 3개가 한 묶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천자령 터널 1818미터, 황마오령 터널 2207미터, 링수 고가도로 270미터. 4.3킬로미터의 고속도로가 2개의 터널과 하나의 고가도로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기존의 도로를 고속도로로 확충한 것이 아니라 산과 계곡을 뚫어 일직선으로 도로를 새로 건설해버린 것이다. 효율성으로 따지면 이런 곳에 고속도로가 꼭 필요한지 의아할 정도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공사 중’이었는데, 이제는 공사를 마치고 ‘개통 중’인 곳이 많았다. 이번 답사에서 중국 최대의 검색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의 지도에도 없는 고속도로를 몇 번이나 통과했다. 새로 개통한 구간이 많다 보니 제때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고속도로는 주행에는 그만이지만 자칫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휴게소나 주유소 표지가 있어도 막상 가보면 공터만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휴게소라고 해도 화장실만 있거나 광주리 아주머니들이 간식 정도를 파는 곳이 있을 뿐이다. 이런 고속도로로 장거리 이동하려면 연료를 가득 채우고 비상식량과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다. 우리도 싱안 가는 고속도로에서 미리 준비한 ‘전투식량’ 비빔밥과 중국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워야 했다. 그렇게 싱안현을 향해 종일 달리고 또 달렸다.

고속도로 460킬로미터를 여섯 시간 가까이 달려서 싱안현에 도착했다. 해가 기우는 시간이지만 샹강 전투 기념탑을 먼저 찾아보았다. 싱안 시내에 ‘홍군 장정 샹강 돌파 기념비원’이 있었다. 계림산수桂林山水에서 보던 봉긋한 봉우리 위에 높은 기념탑을 세운 것이었다. 국부군은 5차 토벌전에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대승을 거둔 것이고 홍군에게는 전무후무한 참패였지만, 기념비는 샹강을 ‘돌파’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맞는 것이다.

이런 기념관은 대부분 입장료가 무료지만 신분증을 보여주고 이름과 주소 등을 간단하게 적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 탓에 관리원은 외국인의 여권을 받아들고는 신기한 듯 뒤적였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대뜸 큰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원래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근 해설사가 따라 나와 안내를 자처해주어 더욱 반가웠다. 대장정 답사 내내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답사하는 우리 일행을 환영해주었다. 무슨 큰 행사를 요란하게 치러야만 민간 교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웃으면서 먼저 인사하고 덕담 한마디 해주고, 마음으로 환영해주고, 그들의 역사에 관심을 표시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민간 교류가 어디있겠는가.

기념비원 마당에서는 샹강 전투 전황 지도를 새로 도색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일하는 손을 멈추고는 편하게 보고 촬영하게 해주었다. 나는 지도를 보며 당시 전투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다른 색깔의 화살 2개가 만나는 조그만 불꽃으로 표시한 곳이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다. 불꽃 하나마다 수백 수천 명이 죽었다. 국부군이건 홍군이건 수많은 생명이 죽었건만 그림은 참으로 간단하다. 역사란 그런 것 같다.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간 일상의 행복은 역사가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죽어야 역사 기록에 남는다. 그래서 역사는 애당초 무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구이린시 싱안현에 있는 홍군 장정 샹강 돌파 기념비원. 석상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웃는 얼굴도 아니고 우는 얼굴도 아니라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한동안 바라보다가 샹강 전투의 참담한 패배를떠올리자 그때의 슬픈 이야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념탑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커다란 석상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아이도 있고 남자도 여자도 있는데, 모두 눈을 감고 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길게 날리는 묘한 두상들. 한동안 쳐다보았지만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샹강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 나의 상상력을 일깨워주었고, 석상의 슬픈 이야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묘한 표정은, 어디선가 들리는 낭군의 마지막 가느다란 숨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것만 같았다. 시선을 약간 내리깔고 있는 남정네는, 마지막 순간에 아내의 숨결과 아이의 눈망울을 떠올렸을 것이다. 남자의 표정은 슬프지 않았지만 보는 이를 슬프게 했다. 여자의 묘한 표정 역시 보는 이를 슬프게 했다. 이번 답사에서 본 여느 기념 조형물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의 유적지 기념 조형물들이 거칠고 투박한 사회주의 예술로서 혁명의 힘과 성공을 강조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슬프면서 기묘한 이야기를 간직한 전설을 형상화한 것으로 다가왔다. 봉우리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큰 키를 자랑하는 기념탑은 몰살에 가까운 참패라는 사실에 견주자면 오히려 오만한 인상을 주었다.

봉우리 꼭대기에 높이 솟은 기념탑으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계림 산수를 굽어보는 기념탑, 해는 서쪽으로 떨어져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념탑을 올려보기보다는 그곳에 올라가서 샹강 유역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니 샹강 전투에서의 참패가 더 처연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