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2-3

5

안찰사(按察使) 송몽천(宋蒙泉)이 해준 이야기이다.

아무개 공이 명(明)나라의 간관(諫官)으로 있을 때 한번은 자신의 명을 알아보고자 부계점을 쳤는데, 신이 내려 “당신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팔자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개 공은 날짜를 계산하면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점괘에서 나온 날짜가 되었는데도 그는 아무 탈이 없었다. 그리고 본조[淸朝]에 들어와서도 구경(九卿)까지 지냈다. 그가 동료 관리 집에 갔다가 그곳에서 부계점을 쳤는데, 이전의 그 신이 내려왔다. 아무개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점괘가 효험이 없었다고 하자 다시 이런 점괘가 나왔다.

“그대가 죽지 않았으니, 난들 어떻게 하겠소!”

아무개공은 그 말을 듣고 멍하게 있다가 한참동안 생각해보고는 갑자기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더니 그 집을 떠나갔다.

알고 보니 지난 번 점괘에 나온 날은 바로 청나라 순치(順治) 원년(1644) 갑신년 3월 19일 명나라 숭정제(崇禎帝)가 매산(煤山)에서 자살한 날이었다.

宋按察蒙泉言. 某公在明爲諫官, 嘗扶乩問壽數, 仙判某年某月某日當死. 計期不遠, 恆悒悒. 屆期乃無恙. 後入本朝, 至九列. 適同僚家扶乩, 前仙又降. 某公叩以所判無驗, 又判曰: “君不死, 我奈何!” 某公俯仰沉思, 忽命駕去. 蓋所判正甲申三月十九日也.

6

심초원(沈椒園) 선생이 오봉서원(鰲峰書院)의 훈장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고읍(高邑) 사람 조충의(趙忠毅) 공의 오래된 벼루 하나를 보여주었다. 벼루에는 “동방미명지연(東方未明之硯)” 여섯 글자가 있었고 뒷면에는 다음이 새겨져 있었다.

“새벽달은 희미하게 빛나고, 금성은 찬란하게 빛나네. 닭이 세 번 울어 오경을 알릴 때 환관을 탄핵하는 상소를 작성했다. 성공하면 너의 공을 쓰고, 성공하지 못하면 너와 함께 유배되리라.”

아마도 위충현(魏忠賢)을 탄핵할 때 이 벼루를 사용해 상소문을 쓴 것 같다. 벼루 끝에 작은 글씨로 ‘문인 왕탁 쓰다(文人王鐸書)’라고 한 줄 적혀 있었다. 이 글자는 새기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묵 흔적이 벼루에 깊이 배여 있어 말라있을 때는 글자가 보이지 않다가 물을 갖다 뿌리면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조충의 공이 처음에는 왕탁을 시켜 이 명문을 쓰게 하려 했지만 새길 겨를도 없이 난이 일어났다. 후에 조충의 공이 유배지에서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장인에게 이 다섯 글자는 새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나 벼루를 씻어내도 다섯 글자는 없어지지 않았으니, 자못 기이한 일이다. 누군가 조충의 공은 악을 아주 단호하게 싫어했다고 한다. 어양산인(漁洋山人)의 필기에 보면 왕탁의 인품이 날로 나빠지고 서법도 날로 나빠졌다. 그런 즉 조충의 공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벼루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를 내쳤다. 또한 글자를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일찍이 조충의 공에게 내쳐졌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천지의 귀신은 늘 어떤 사건을 통해 그 교묘함을 드러내어 세상 사람에게 알려 경계하고자 했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러한 것이 아닌가!

沈椒園先生爲鼇峰書院山長時, 見示高邑趙忠毅公舊硯. 額有 “東方未明之硯”六字, 背有銘曰: “殘月熒熒, 太白睒睒. 雞三號, 更五點, 此時拜疏擊大奄. 事成策汝功, 不成同汝貶.” 蓋劾魏忠賢時, 用此硯草疏也. 末有小字一行, 題“門人王鐸書”. 此行遺未鐫, 而黑痕深入石骨, 乾則不見, 取水濯之, 則五字炳然.

相傳初令鐸書此銘, 未及鐫而難作. 後後在戍所, 乃鐫之, 語工勿鐫此一行. 然閱一百餘年, 滌之不去, 其事頗奇. 或曰: “忠毅嫉惡嚴” . 漁洋山人筆記稱: 鐸人品日下, 書品亦日下. 然則忠毅先有所見矣. 削其名, 擯之也. 滌之不去, 欲著其嘗爲忠毅所擯也. 天地鬼神, 恆於一事偶露其巧, 使人知警, 是或然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