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2-1

1

동문각(董文恪) 선생이 소사공(少司空)으로 있을 때 해준 이야기이다. 그가 옛날에 부양촌(富陽村)에서 살 때, 이웃집에 사는 한 노인이 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귀인이로세!’하면서 만나기를 청했다고 한다. 노인은 여러 차례 그를 살펴보고 또 생년월일시를 묻고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명과 관상으로 보아 모두 일품의 벼슬은 할 것이오. 아무 해에 지현(知縣)이 되고, 아무 해에는 대현(大縣)이 되고, 또 아무 해에는 실수(實授)가 되고, 또 아무 해에는 통판(通判)이 되고, 아무 해에는 지부(知府)로 옮겨갈 것이고, 아무 해에는 지부에서 포정사(布政使)로 발탁될 것이오. 아무 해에는 순무(巡撫)가 되고 아무 해에는 총독(總督)까지 지낼 것이니 부디 자중자애 하십시오. 다른 날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동문각 선생은 그 이후로 다시 이 노인을 만나지 못했고, 노인의 예언도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동문각 선생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현은 동문각 선생이 관리등용시험을 통해 호부(戶部)의 칠품 관리가 된 것에 해당된다. 이른바 다른 사람 대신 대현이 된다는 것은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에 해당된다. 또한 실수는 바로 편수직(編修職)에 해당된다. 또 통판의 자리는 중윤(中允)에 해당된다. 지부는 시독학사(侍讀學士)에 해당되고, 포정사는 내각학사(內閣學士)에 해당되고, 순무는 공부시랑(工部侍郎)에 해당된다. 그 품계가 모두 맞아떨어지고, 그 년도도 모두 맞아떨어지며, 단지 내직과 외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노인의 말은 영험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듯하고, 영험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영험하다. 오직 총독이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훗날 동문각 선생은 그 해에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으니, 그 품계가 총독과 같다. 생각건대 사람의 생년월일시로 운명을 알아맞히는 경우 기이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반 정도는 맞고, 반 정도는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가 예전에 보고들은 것에 따르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람의 팔자로 빈부귀천을 따지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다만 대체로 이와 같고, 그 안에 더하고 빼고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무석(無錫) 사람 추소산(鄒小山) 선생의 부인과 안주(安州) 사람 진밀산(陳密山) 선생의 부인은 생년월일시가 모두 같다. 추소산 선생은 예부시랑을 지냈고, 진밀산 선생은 귀주(貴州)포정사를 지냈는데, 모두 이품이다. 직분으로 따지면 포정사가 예부시랑을 따라갈 수 없지만, 녹봉으로 따지면 예부시랑이 포정사를 따라갈 수 없으니, 서로 거기서거기다. 또 두 부인의 명으로 따지면 진밀산 선생의 부인이 약간 일찍 죽었지만, 만년이 되도록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반면 추소산 선생의 부인은 백발이 되도록 서로를 공경했지만, 만년에 아들을 잃었고 가세도 기울었으니, 또한 거기서거기다. 이것은 아마도 출생지가 남북으로 달랐기 때문일 뿐, 시(時)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나의 여섯째 조카와 노복의 아들 유운붕(劉雲鵬)은 담하나 사이로 창을 마주하고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났다. 이들은 시 뿐만 아니라 분도 같고 심지어 초도 같다. 조카는 16세 때 죽은 반면, 유운붕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이 어찌 팔자가 타고난 복에 운수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닌가? 조카는 부귀하게 자라면서 타고난 복을 먼저 다 소진했다. 반면에 유운붕은 빈천하게 자라면서 쓸 것은 많지 않지만 복은 아직 다하지 않았는가? 차고 이지러지고 자라고 사라지는(盈虛消息)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구나. 천명을 아는 사람이 나와 더욱 상세하게 설명해주길 바란다.

董文恪公爲少司空時, 云昔在富陽村居, 有村叟坐鄰家, 聞讀書聲, 曰: “貴人也!” 請相見. 諦觀再四, 又問八字干支, 沉思良久, 曰: “君命相皆一品. 當某年得知縣, 某年署大縣, 某年實授, 某年遷通判, 某年遷知府, 某年由知府遷布政. 某年遷巡撫, 某年遷總督, 善自愛. 他日知吾言不謬也.” 後不再見此叟, 其言亦不驗.

然細較生平, 則所謂知縣, 乃由拔貢得戶部七品官也. 所謂調署大縣, 乃庶吉士也. 所謂實授, 乃編修也. 所謂通判, 乃中允也. 所謂知府, 乃侍讀學士也. 所謂布政使, 乃內閣學士也, 所謂巡撫, 乃工部侍郎也. 品秩皆符, 其年亦皆符, 特內外異途耳. 是其言驗而不驗, 不驗而驗. 惟未知總督如何. 後公以其年拜禮部尙書, 品秩仍符. 按推算干支, 或奇驗, 或全不驗, 或半驗半不驗.

余嘗以聞見最確者, 反復深思, 八字貴賤貧富. 特大略如是, 其間乘除盈縮, 略有異同. 無錫鄒小山先生夫人, 與安州陳密山先生夫人, 八字干支並同. 小山先生官禮部侍郎, 密山先生官貴州布政使, 均二品也. 論爵, 布政不及侍郎之尊, 論祿, 則侍郎不及布政之厚, 互相補矣. 二夫人並壽考. 陳夫人早寡, 然晩歲康强安樂. 鄒夫人白首齊眉, 然晩歲喪明, 家計亦薄, 又相補矣. 此或疑地有南北, 時有初正也? 余第六姪與奴子劉雲鵬, 生時祗隔一牆, 兩窗相對, 兩兒並落蓐啼. 非惟時同刻同, 乃至分杪亦同. 姪至十六歲而夭, 奴子今尙在. 豈非此命所賦之祿, 祗有此數? 姪生長富貴, 消耗先盡. 奴子生長貧賤, 消耗無多, 祿尙未盡耶? 盈虛消息, 理固如斯. 俟知命者更詳之.

2

큰 증조할아버지 광길(光吉) 공이 강희연간(1662~1723) 초에 진번현(鎭番縣)에서 수비(守備)로 있을 때의 일이다. 태학생 이(李) 아무개의 부인이 늘 첩을 학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화가 날 때마다 첩의 하의를 벗기고 볼기를 때렸는데,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마을에 저승 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한 할멈이 있었는데, 이른바 주무상(走無常)이 바로 그 할멈이다. 할멈은 태학의 부인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마님께서는 저 첩에게 전생에 원한이 있긴 합니다만 매 200대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마님은 지금 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그보다 거의 10배가 넘는 매질을 하셔 도리어 저쪽에게 빚을 지셨습니다. 양가집 아녀자들이 벌을 받는다 해도 하의를 벗기는 것은 국법에서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님께서는 번번이 옷을 벗겨 모욕하고 계시니, 마님께서는 통쾌하셨을지 모르겠으나 그만 귀신의 금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마님께서 제게 잘 대해주셔서 몰래 저승 명부를 보았기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태학의 부인은 할멈을 비웃으며 말했다.

“이 망할 할망구가 쓸데없는 소리로 나를 겁주어서 액막이 제사를 올리고, 돈을 뜯어내려고 수작을 부리네!”

때마침 경략사(經略使) 막락(莫落)이 왕보신(王輔臣)에게 변을 당하자 반란군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 태학은 병란으로 죽고 그 첩은 부장(副將) 한(韓) 장군의 손에 넘어갔다. 한 장군은 첩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이 마음에 들어 모든 총애를 쏟아 부었다. 게다가 한 장군은 정실부인도 없었던 터라 집안의 모든 권한을 그 첩에게 주었다. 반면에 이 태학의 부인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가 반란군이 패하는 바람에 다시 포로 신세가 되었다. 포로들은 [전공을 세운] 장군과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이 태학의 부인은 한 장군에게 돌아갔다. 첩은 부인을 노비로 거두어들이고 뜰 앞에 무릎을 꿇린 뒤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 지시대로 해야 한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먼저 화장대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하의를 벗은 뒤 땅에 엎드려 매 다섯 대를 맞고 나서 일을 보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적의 처로 간주하여 고통스럽게 죽인 뒤 마디마디 살점을 잘라 개나 돼지의 먹이로 주겠다!”

이 태학의 부인은 죽음이 두려워 지조고 뭐고 돌보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분부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첩은 부인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독하게 매질하지 않으면서 다만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만 알게 했다. 1년 남짓 뒤에 이 태학의 부인은 다른 병으로 죽었다. 그간 맞은 매의 수를 셈해 보니 자신이 첩에게 때렸던 매의 수와 딱 들어맞았다. 이 태학의 부인은 진실로 우둔하고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는 귀신도 꺼리는 사람이라 귀신이 암암리에 그녀의 혼백을 빼앗아 간 것이다.

한공(韓公: 韓將軍) 스스로도 이 일을 숨기지 않았고, 또한 이 일을 들어 인과응보를 증명했기에 사람들이 그 일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한공은 또 “이번에도 자리가 확연히 바뀐 이야기일세!” 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명나라 말년에 양양(襄陽)과 남양(南陽) 사이를 유람할 때 술사 장원호(張鴛湖)와 같은 집에 묵게 되었다. 장원호는 여관 주인의 본처가 첩을 심하게 학대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불만이 쌓여 내게 말했다.

“도가에 차형법(借形法)이란 것이 있습니다. 수련을 완성하지 못하고 기와 혈이 쇠진하여 신선이 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건강한 사람의 신체를 빌리는 것인데, 건강한 사람이 잠든 사이에 서로의 몸을 맞바꾸지요. 저도 그 비법을 배운 적이 있으니 시범삼아 한번 해보이겠습니다.”

이튿날 그 집 사람들은 첩의 방에서 본처의 말소리가 나고 본처의 방에서 첩의 말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나란히 문을 열고 나오는데 보니 본처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첩이고, 첩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본처였다. 첩은 본처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묵묵히 앉아 있는 반면 첩의 몸에 들어가 있는 본처는 억울한 마음에 시끄럽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판단할 길이 없어 관가에 그 사실을 고했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요망한 집안이라며 화를 내더니 그 남편을 때린 뒤 쫓아내는 바람에 모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본처는 바로 첩이었다. 하지만 실제 본처의 지위에 있지 않은지라 위엄을 내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집을 나누어 따로 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 일은 더욱 기이하다.

曾伯祖光吉公, 康熙初官鎭番守備. 云有李太學妻, 恆虐其妾. 怒輒褫下衣鞭之, 殆無虛日. 里有老媼, 能入冥. 所謂走無常者是也. 規其妻曰: “娘子與是妾有夙冤, 然應償二百鞭耳. 今妒心熾盛, 鞭之殆過十餘倍, 又負彼債矣. 且良婦受刑, 雖官法不褫衣. 娘子必使裸露以示辱, 事太快意, 則干鬼神之忌. 娘子與我厚, 竊見冥籍, 不敢不相聞!” 妻哂曰: “死媼謾語! 欲我禳解取錢耶?”

會經略莫洛遘王輔臣之變, 亂黨蜂起, 李歿於兵. 妾爲副將韓公所得, 喜其明慧, 寵專房. 韓公無正室, 家政遂操於妾. 妻爲賊所掠, 賊破被俘. 分賞將士, 恰歸韓公. 妾蓄以爲婢, 使跪於堂而語之曰: “爾能受我指揮. 每日晨起, 先跪妝臺前, 自褫下衣, 伏地受五鞭, 然後供役. 則貸爾命, 否則爾爲賊黨妻, 殺之無禁, 當寸寸臠爾, 飼犬豕.” 妻憚死失志, 叩首願遵敎. 然妾不欲其遽死, 鞭不甚毒, 俾知痛楚而已. 年餘, 乃以他疾死. 計其鞭數, 適相當. 此婦眞頑鈍無恥哉! 亦鬼神所忌, 陰奪其魄也. 此事韓公不自諱, 且擧以明果報, 故人知其詳.

韓公又言, “此猶顯易其位也.” 明季嘗遊襄․鄧間, 與術士張鴛湖同舍. 鴛湖稔知居停主人妻虐妾太盛, 積不平, 私語曰: “道家有借形法. 凡修煉未成ㆍ氣血已衰․不能還丹者, 則借一壯盛之軀, 乘其睡, 與之互易. 吾嘗受此法, 姑試之.” 次日, 其家忽聞妻在妾房語, 妾在妻房語. 比出戶, 則作妻語者妾, 作妾語者妻也. 妾得妻身, 但黙坐, 妻得妾身, 殊不甘, 紛紜爭執. 親族不能判, 鳴之官. 官怒爲妖妄, 笞其夫, 逐出. 皆無可如何. 然據形而論, 妻實是妾. 不在其位, 威不能行. 竟分宅各居而終. 此事尤奇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