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무의 모친이 보내신 편지를 읽고讀若無母寄書>[1]
약무(若無)의 모친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약무에게 보내오셨다.
“나는 한해 한해 늙어가며, 8년 동안 너를 기다렸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버리고 출가해버렸고, 게다가 이제는 또 먼 곳으로 가려고 한단 말이냐. 너의 스승도 예전에 출가할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출가했다. 네가 지금 먼 곳으로 가려고 하다니. 내가 죽은 뒤에 가도 늦지 않다.”
약무가 답장을 통해 “제가 어머니 가까이 있는다고 해서, 어머니를 위해 득이 되는 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는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셨다.
“네가 가까이 있다면 아무리 병들고 아파도 편안할 것이다.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너도 안심하고 나를 걱정하지 않을 것 아니냐. 둘 다 걱정하지 않으면 피차 편안해질 것이다. 편안한 곳이 바로 ‘정적’(靜寂)이 있는 곳이니, 왜 꼭 먼 곳으로 가서 정적(靜寂)을 찾으려느냐? 하물며 진소(秦蘇) 형이 사찰을 사서 너와 함께 한 이래, 너에게 박하게 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너는 도를 추구하는 정(情)을 생각하는데, 나는 세간의 정을 생각한다. 세간의 정을 통해서 바로 도를 추구하는 정을 얻는다.
내가 늙은 것은 그렇다고 치고, 너의 두 아이도 마땅히 돌보아야 한다. 너의 스승은 옛날에 출가해서도 흉년을 만나면 아이들을 돌보았다. 필시 그의 마음에 언짢은 바가 있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만약 돌보지 않아서 이리저리 떠돌게 했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수치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시국이 이런데, 네가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을 하려고 한다면, 과연 마음이 흔들리겠느냐, 흔들리지 않겠느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세상에 그럴 리가 어디 있느냐? 마음이 흔들린다면,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두려워하며, 한편으로 그저 참고 나날을 보낼 뿐일 것이다.
가족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가족을 걱정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며, 어느 것이 잘 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못 하는 것이냐? 이렇게 따지면, 가족을 걱정한다면, 겉으로는 마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반면에 가족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겉으로는 마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속은 은근히 아프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된다.
네가 한 번 네 마음을 잘 살펴보아라! 가족이 편안하게 잘 있는 것이 바로 상주(常住)요, 다름아닌 금강(金剛)이다. 왜 오직 다른 사람 말만 들으려고 한단 말이냐? 오직 다른 사람 말만 듣고 네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경계(境界)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려지는 것이다. 경계에 따라 좌지우지되면 너는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없게 된다. 너는 마음을 편안히 하는 길을 찾아가 머물지 않고 그저 외경(外境)에서만 편할 곳을 찾아가 머물려고 한다. 용담사(龍潭寺)가 조용하지 않아서 금강사(金剛寺)로 가서 묵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금강사가 조용하지 않으면 또 어디 가서 묵을 것이지 걱정되는구나. 너는 죽어도 도(道)만을 얘기하려 한다마는, 나는 지금 네게 마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너의 스승에게 확인해 보아라. 만약 네가 추구하는 것이 외적인 환경에 달려 있다면 마땅히 금강사에서 묵어야 하고, 만약 마음에 있다면 당연히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너의 마음이 조용하지 않다면 금강사로 간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도 말거라. 설령 해외로 간다고 해도 더더구나 조용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감탄을 금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집안에 성모(聖母)가 계시는 것을 축하하네. 슬하에 진짜 부처가 계시는 것을 축하하네. 밤이나 낮이나 마음의 스승이 계시어, 하시는 말씀이 모두 관세음보살의 말씀이요, 하시는 말씀이 모두 마음의 정수를 담은 지극히 훌륭한 말씀이라서, 넘어뜨리고 때려도 깰 수 없을 만큼 확고부동하네.
돌이켜 보면, 발이 가렵다고 신발을 신은 채 긁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우리같은 제삼자의 말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일세. 또한 음식에 대해 아무리 말로 잘 설명해준다고 해서 어떻게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제삼자가 다른 제삼자를 비웃게 하는 것일 뿐이면서 그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격이지.
예전에 종이 몇 장에 써서 공에게 보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두 실속없이 허세만 부려 어리석은 사람들을 겁주고 어르는 것으로, 참되고 진실한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었네. 제발 부탁이니, 어서 빨리 물이나 불 속에 집어던져, 성모께서 보지 않게 해주기 바라네. 성모께서 그것을 보시면 내가 평생 한 것이라고는 온통 도리를 말한다면서 사람만 해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일세.
또 한 가지 부탁하네. 약무는 성모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펼쳐 걸어놓아, 염불하며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때때로 볼 수 있게 해주길 바라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훤히 진짜 부처를 마음에 두고 가짜 부처를 마음에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네. 진짜 부처를 마음에 둘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진짜 아미타불이네. 설령 입으로 ‘미타불’이라는 소리를 한 마디도 외지 않아도 필시 아미타불은 이해하실 것이네.
무엇 때문인가? 염불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하네. 그런데 모든 행실 중에서 우선 해야 할 것이 효(孝)이네. 만약 부처의 이름만 입으로 달달 외고 우선 해야 할 효행을 빠뜨리면 되겠는가? 아미타불이 어찌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 부처이겠는가? 결코 그럴 리가 없네. 내가 생각해보건대, 가짜 부처를 염송(念誦)하면서 아미타불을 만나려고 하는데, 아미타불은 애시당초 어떤 부처가 되기를 염원하여 아미타불이 되었단 말인가? 필시 그 역시 그저 보통의 효심 깊고 인정많은 사람일 뿐임에 틀림없네. 모친께서 지극한 정에서 우러나는 말씀을 하시니, 저절로 가슴에 파고들고 저절로 사람을 통곡하게 하네. 약무 역시 필시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모친의 이 말씀을 듣고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네.(권4)
<讀若無母寄書>
若無母書云:「我一年老一年,八歲守你,你旣舍我出家也罷,而今又要遠去。你師當日出家,亦待終了父母,才出家去。你今要遠去,等我死了還不遲。」若無答云:「近處住一毫也不曾替得母親。」母云:「三病兩痛自是方便,我自不欠掛你,你也安心,亦不久掛我。兩不欠掛,彼此俱安。凡處就是靜處,如何只要遠去以求靜耶?況秦蘇哥從買寺與你以來,待你亦不薄,你想道情,我想世情。世情過得,就是道情。莫說我年老,就你二小孩子亦當看顧他。你師昔日出家,遇荒年也顧兒子,必是他心打不過,才如此做。設使不顧,使他流落不肖,爲人笑恥」此之時,你要修靜,果動心耶,不動心耶?若不動心,未有此理;若要動心,又怕人笑,又只隱忍過日。似此不曾而不動心,與今管他而動心,孰眞孰假,孰優孰劣?如此看來,今時管他,跡若動心,然中心安安妥妥,卻是不動心;若不管他,跡若不動,然中心隱隱痛痛,卻是動心。你試密查你心:安得他好,就是常住,就是金剛。如此只聽人言?只聽人言,不查人心,就是被境轉了。不境轉了,就是你不會安心處。你到不去住心地,只要去住境地。吾恐龍潭不靜,要住金剛;金剛不靜,更住何處耶?你終日要講道,我今日與你講心。你若不信,又且證之你師,如果在境,當住金剛;如果在心,當不必遠去矣。你心不靜,莫說到金剛,縱到海外,益不靜也。」
卓吾子讀而感曰:恭喜家有聖母,膝下有眞佛。夙夜有心師,所矢皆罕音,所命皆心髓至言,顚撲不可破。回視我輩傍人隔靴搔癢之言,不中理也。又如說食示人,安能飽人,徒令傍人又笑傍人,而自不知恥也。反思向者與公數紙,皆是虛張聲勢,恐嚇愚人,與眞情實意何關乎!乞速投之水火,無令聖母看見,說我平生盡是說道理害人去也。又願若無張掛爾聖母所示一紙,時時令念佛學道人觀看,則人人皆曉然去念眞佛,不肯念假佛矣。能念眞佛,即是眞彌陀,縱然不念一句「彌陀佛」,阿彌陀佛亦必接引。何也?念佛者必修行,孝則百行之先。若念佛名而孝行先缺,豈阿彌陀亦少孝行之佛乎?決無是理也。我以念假佛而求見阿彌陀佛,彼佛當初亦念何佛而成阿彌陀佛乎?必定亦只是尋常孝慈之人而已。言出至情,自然刺心,自然動人,自然令人痛哭,想若無必然與我同也,未有聞母此言而不痛哭者也。
[1] 약무(若無)는 성(姓)이 왕(王)으로, 이지를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이다. 경정향은 <이탁오가 승려 왕약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讀李卓吾與王僧若無書, 《경천대선생문집》 권19]에서 본문 후반 이지의 평론 부분 “집안에 성모(聖母)가 계시는 것을 축하하네!” 이후 전문을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보아하니, (약무의 모친) 장(張) 여인이 보낸 ‘아들이 멀리 가는 것을 만류하는 편지’의 내용은 대략 ‘고요’(靜)의 경지를 얻는 것은 외적인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혹자는 ‘이 편지는 그저 세속의 평범한 모자간의 정에 따라 쓴 것에 불과한데, 탁오가 이렇게까지 감탄하고 찬양할 가치가 있을까?’라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들을 걱정하고 아들이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본심(本心)이며, 여기에는 성인과 범인(凡人)의 구별이 없다.……대체 어머니의 자애로운 마음과 자식의 효도하는 마음을 배제하면 무슨 본심이 있단 말인가? 본심을 배제하면 무슨 성인의 학문이니 불법(佛法)이니 하는 것들이 있단 말인가?……탁오의 삶에서 가족의 정을 버리고 속세를 떠난 지가 올해로 일곱 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그의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장여인의 말에 이와 같이 감탄했다는 것은 바로 그가 추구하는 학문이 본심을 으뜸으로 삼는 것으로 돌아왔음을 말한다.”
경정향은 본심이란 자식이 효도하고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상정하고, 이 이외에 인간의 본심은 없다고 했다. 그런 바탕 위에, 위의 말을 읽어 보면, 이지가 적멸(寂滅)의 불도를 추구하는 것을 벗어나 본심으로 돌아온 것을 경정향이 기뻐하는 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지는 장여인의 말이 효도와 사랑의 마음을 토로한 것이기 때문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그 효도와 사랑의 마음이 다름아닌 인간의 지극한 본심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감탄한 것이다. 이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식의 효도와 부모의 사랑의 마음은 근원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애초부터 자식의 효도나 부모의 사랑 등 인륜 차원의 본심을 상정하지 않고,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 자체를 직시하는 바탕 위에, 그것이 만약 효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러난다면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에 이지의 본령이 있다. 이처럼 자유무애한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지향하는 것도 역시 긍정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근소한 차이인 것 같은 이지와 경정향의 입장 차이는 사실 아주 엄청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