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대장정 2 – 마오, 봉건에서 혁명과 권력으로 2

마오쩌둥의 두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 상하이에서부터 창사까지 우리를 내내 쫓아오던 비가 살짝 그친 다음 날 오전에 그녀를 찾아갔다. 양카이후이 기념관은 창사 시내에서 북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그녀의 고향에 있었다. 양카이후이 기념관은 소박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졌다. 기념관 안에는 양카이후이의 일생을 보여주는 글과 그림, 옛 사진 들이 펼쳐져 있었고, 아버지 양창지楊昌濟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양카이후이의 생가와 무덤도 있었다. 양카이후이가 스물아홉 살에 총살을 당하자 동네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 마오쩌둥은 그 소식을 듣고 몰래 장례비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양카이후이의 무덤은 생가 근처에 만들어졌다. 훗날 양카이후이 기념관이 세워지면서 무덤을 가까운 언덕 위에 새로 조성해 이장했다. 그 후에도 원묘의 봉분과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양카이후이가 총살당하자 마을 주민들이 조성해준 원래의 분묘(왼쪽). 훗날 중국 정부가 양카이후이 기념관을 새로 세우면서 이장하여 조성한 묘(오른쪽).

양카이후이 묘 앞에 아들들도 함께 묻혀 있어 외롭지는 않아 보였다.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은 소련에서 공부를 했고, 한국전쟁 때 인민지원군 통역으로 참전했다가 미군의 공습에 전사했다. 그의 묘는 북한에 있으며, 이곳의 묘는 그의 유품을 묻은 의관총衣冠塚이다. 차남 마오안칭毛岸靑 부부의 묘도 이곳에 있다. 마오안칭은 공산주의 이론에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평생 병치레로 고생했다.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지만 어려서 사망했다. 양카이후이의 조카 양잔楊展의 묘도 있어 가족 열사 능원의 분위기다.

마오쩌둥이 부인의 총살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지었다는 〈접연화蝶戀花〉라는 시가 커다란 석판에 새겨져 있다. 자신을 나비에 비유하고 양카이후이를 꽃에 비유해 애통한 마음을 표현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세 번째 부인과 동거 중이었지만 양카이후이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날만큼은 애틋한 마음으로 되새겼던 모양이다.

양카이후이는 1901년에 태어났다. 선구적인 개혁파 윤리학자이자 대학 교수였던 양창지의 둘째 딸로, 마오쩌둥과는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양카이후이가 일곱 살 되던 해, 당시 신학문을 배워 조국을 개혁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양창지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딸을 꼭 학교에 보내도록 했다. 덕분에 그녀는 일곱 살에 창사제40초급소학 최초의 여학생이 되었다.

양창지는 1913년에 귀국하여 창사의 후난사범학교 윤리학 교수로 부임했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존경받는 교수였기에 제자들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암울한 시대를 논하며 구국의 개혁을 모색하는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했다. 어린 양카이후이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귀를 기울였으며, 마오쩌둥, 차이허썬蔡和森, 샤오쯔성蕭子升 등 아버지의 제자들과 자연스레 친교를 나누었다.

마오쩌둥은 창사로 가기 전에 샹샹현의 둥산東山고등소학당에 1년 동안 다녔다. 그곳에서 캉유웨이, 량치차오 같은 개량주의 선구자들의 글을 읽으며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은 열망을 키웠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후원에 힘입어 창사라는 대처로 나갈 수 있었다.

양카이후이가 만난 마오쩌둥은, 스승의 신망을 받는 청년으로 《신청년》의 열성적인 독자였고, 천두슈와 후스胡適를 존경하는 개혁적인 젊은이였다. 양카이후이는 1918년 6월 베이징대학의 초청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후난사범학교를 졸업한 마오쩌둥도 베이징으로 갔다. 양창지는 제자인 마오쩌둥을 베이징대학 도서관의 사서 보조로 취직시켜주었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은 리다자오李大釗 등 중국 공산주의의 태두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게 되었다.

양카이후이 석상(왼쪽)과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친 양창지의 흉상(오른쪽).

객지에서 만난 고향 남녀는 신식 사랑에 빠져들었다. 양카이후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오쩌둥 역시 고향으로 돌아와 1920년 11월에 공산주의 소조小組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1920년 12월에 결혼을 했다. 둘의 결혼은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신식 커플로 창사의 젊은이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다. 양카이후이는 개혁파 스승의 딸이었고 총명한 여학생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신혼 시절인 1921년 7월 마오쩌둥은 창사의 공산주의 소조 대표로 중국 공산당 창당에 대의원 13인의 한 명으로 참석했다. 창당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 후난성 지부를 만들었고, 후난성의 노동운동을조직했다. 1922년에 장남 마오안잉이 태어났고, 다음 해에는 둘째 아들 마오안칭이 태어났다. 1924년 마오쩌둥은 국공합작에 따라 국민당에 입당했으며, 농민운동에 주력했다.

양카이후이는 1922년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남편을 내조하면서 낮에는 후난성 위원회 업무를 했고, 밤에는 야학에 참여하는 열성적인 당원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폭풍은 1927년 양카이후이 부부를 정면으로 덮쳐왔다. 우리가 상하이의 룽화 열사공원에서 찾아보았던 바로 그 상하이 쿠데타가 터지면서 상하이뿐 아니라 곳곳에서 공산주의자와 진보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다. 중국 공산당은 무장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고, 후베이성湖北省 수도인 우한에서 열린 8·7회의에서 추수봉기를 결의했다. 중국 공산당의 독자적인 무장투쟁이 시작된것이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를 고향으로 보낸 후 후난성 추수봉기를 조직하기 위해 혼자 움직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창사로 돌아온 양카이후이는 3년 동안 공산당 지하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1930년 10월 친정집에 몰래 갔다가 밀고에 의해 국민당 군벌에게 체포되었다. 여덟 살 난 큰아들 마오안잉도 함께 투옥되었다. 국민당에게는 악명을 떨치던 홍비紅匪 두목 마오쩌둥의 부인이었으니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양카이후이는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난 군벌 허젠何鍵은, 양카이후이에게 더 이상 마오쩌둥과 부부가 아니라고만 선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때 마오쩌둥은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 살림을 차린 지 2년이 넘었으니 여자로서 배신감을 느꼈을 법도 하건만 배우자보다 혁명 동지로서의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았고 결과는 냉혹했다. 스물아홉 한창 나이에 총살을 당했다.

창사 시내의 청수당 안에 복원된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의 살림집

중국에서 양카이후이는 중국 공산당 초기 여성 당원이자 마오쩌둥 주석의 ‘첫 번째 부인’이며, 죽는 순간까지 신념을 지킨 혁명열사로 추앙받는다. 훗날 그녀의 고향 마을은 카이후이진開慧鎭이라고 이름까지 바꾸었다.

우리는 창사 시내 청수당淸水塘 공원으로 갔다. 이 공원 안에 양카이후이의 신혼 살림집이 복원되어 있다. 집은 당시 소박한 백성의 살림집 그대로다. 혁명의 야망과 신혼의 달콤함이 함께 깃들어 있던 곳이다. 양카이후이가 마오쩌둥과 오붓하게 부부생활을 한 것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였던 것 같다. 이때 마오쩌둥은 후난제1사범부속 소학교의 주사 신분으로 살면서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 후난성 위원회를 맡고 있었다.

양카이후이에게 마오쩌둥은, 첫 번째 부인 뤄이구에게보다 더 나쁜 남편이었다. 양카이후이를 고향으로 보낸 후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후난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마오쩌둥은 거사한 지 며칠 만에 실패라는 현실을 바로 인정하고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징강산으로 숨어들었다. 징강산의 토착 무장세력인 위안원차이袁文才와 왕쭤王佐의 산채에 은거했다. 이때 위안원차이는 마오쩌둥에게 열여덟 살의 열혈 혁명소녀 허쯔전을 현지 방언 통역 겸 생활 비서로 배치했다. 목숨이 걸린 무장봉기를 넘나들어서 그랬을까,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금세 연인이 되었다. 만난 지 몇 개월 만인 1928년 5월에 산채의 주요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촐한 혼례를 치렀다. 본부인이 시퍼렇게 살아서, 그것도 지하에서 혁명공작을 수행하고 있는데, 열여섯 살이나 어린 소녀를 새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니 어찌 나쁜 놈 소리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양카이후이의 짧은 일생에는 반봉건 반제국주의 혁명이 싹터 오르던 시기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양카이후이는 아버지 양창지와 함께 ‘마오쩌둥이란 혁명의 씨앗’을 배양한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는 처가의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 성공한 영웅이 적지 않다. 유방이 그랬고, 마오쩌둥 역시 처와 처의 가족으로부터 동지적 지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양카이후이와 헤어진 후 후난성 추수봉기의 현장을 찾아 후난성에서 가까운 장시성 핑샹으로 향했다. 핑샹은 마오쩌둥이 세 번째 부인 허쯔전을 만나게 해준 추수봉기의 중심지다. 양카이후이를 배신한 마오쩌둥을 원망하는지, 세 번째 부인 허쯔전의 비극적인 인생을 슬퍼하는지, 양카이후이를 만나던 반나절 잠시 갰던 하늘이 다시 비를 뿌렸다. 허쯔전의 고향을 벗어날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고 차창을 촉촉이 적셨다.

핑샹시 중심에는 추수봉기 기념광장이 있다. 비가 내려 아무도 찾는이 없는 텅 빈 광장이었다. 우뚝 선 추수봉기 기념탑이 큰 키를 자랑하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높이가 30.9미터. 크고 넓고 높게 만드는 것이 중국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국인들은 뭐든지 크게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기념탑의 기저에 추수봉기를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전시관이 있었다. 전시관에서 일하는 차이첸蔡倩이란 여직원은 우리 일행의 행색이 현지인들과 다르다고 느꼈는지 친절하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마치 친척 아저씨를 만난 듯이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이곳을 찾는 외국인이 적기도 했지만 한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1927년 9월 초 중국 공산당 후난성 위원회의 전적前敵위원회 서기였던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핑샹 안위안安源의 철도광산 노동자를 중심으로 결성돼 있던 안위안 행동위원회와 연석회의를 열고 인근의 혁명 무장세력들을 공농혁명군(홍군) 제1군 1사단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이는 추수봉기를 일으켜 창사를 점령한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핑샹은 홍군의 주요한 탄생지의 하나로 꼽힌다.

마오쩌둥은 9월 9일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초기 홍군은 무기와 장비가 변변치 않았고 전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국부군에게 패했다. 마오쩌둥은 승산 없는 무장폭동을 중단하는 한편, 창사를 점령한다는 작전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핑샹과 안위안을 거쳐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1927년 9월 추수봉기 실패 이후 징강산으로 도주한 경로를 표시한 지도. 위에서부터 내려온 화살표가 10월 7일에 후난성과 장시성 사이의 닝강현寧岡縣 마오핑芧坪 징강산 기슭에 도착했다. 아래 깃발은 당시 공농혁명군 제1군 1사단군기. 핑샹의 추수봉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핑샹의 추수봉기 기념광장을 떠나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안위안 노광路鑛(철도와 광산) 노동운동 기념관을 찾았다. 마오쩌둥 동상이 비를 맞으며 안위안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위안은 탄광이 많은 지역이라 일찍이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추수봉기에서 이곳 노광 노동자들은 새로 창설한 공농혁명군 제1군에서 가장 용감한 부대로서 중핵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국부군의 공세에 밀려 마오쩌둥과 함께 징강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이 직접 지휘한 최초의 홍군이 바로 안위안에서 탄생한 셈이다.

허쯔전 유적지와 징강산 답사를 안내해준 중국 산수화가 천구이밍 선생이 답사 당시에 스케치한 것을 완성하여 보내주었다.

안위안 노동운동 기념관을 거쳐서 답사 여정은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 허쯔전의 고향인 장시성 융신현永新縣으로 이어졌다. 융신에서는 나의 특별한 중국인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최고의 미술대학인 베이징중앙미술학원을졸업한 산수화가이자 베이징의 리원禮文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는 천구이밍陳桂明 선생. 그의 고향이 바로 융신이었다.

천 선생은 2013년 여름 베이징의 한국인 산수화가 류시호 님의 그림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알게 된 친구다. 촬영 중에 대장정 답사 계획을 듣고 자기 고향인 장시성에서만큼은 자신이 직접 안내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때는 고마운 덕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훗날 겪어보니 액면 그대로였다. 천 선생은 대장정에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구해서 서울로 보내주기도 하더니, 답사 여행이 시작되자 베이징에서 스물두 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1600킬로미터를 달려와주었다. 답사 여행이 끝나자 자신이 그린 징강산 그림 세 점을 보내주기도 했다

융신현 시내에서 천 선생을 만났다. 대장정 답사 여행에서 만나니 훨씬 더 반가웠다. 이날은 천 선생의 고향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다 함께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그의 고향은 융신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빈장촌濱江村인데, 이름 그대로 작은 강가에 있는 마을이었다. 겨울비가 축축하게 내려 한기가 느껴졌지만 두 동반자 모두 날것 그대로의 시골체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천 선생의 집은 창강 남부의 전형적인 시골에 있었다. 집 사이의 좁은 골목을 돌아 나오면 바로 밭이다.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이라 겨울에도 텃밭이 초록색으로 살아 있었다. 밭 사이로 무덤들도 눈에 띄었고, 밭과 밭 사이 막돌로 쌓은 축대 사이로 물이 흘렀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시골집은 어릴 때의 아스라한 기억이 떠오르게 하는 정감이 느껴지곤 한다. 담장을 둘러치지 않은 탓에 길에서 문지방만 넘으면 바로 거실이었다. 신발을 신고 드나드는 입식 문화라서 남의 집 거실에 들어서는 게 꽤나 임의롭다. 길로 난 대문의 문짝은 의외로 높이 달려 있었다.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통풍을 위해 천장을 높였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길로 나서면 붉은 벽돌로 벽을 세우고 자잘한 검은 기와로 지붕을 이은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세월이 묻어 있는 백성들의 집. 손보고 수리하기를 반복하며 수십 년에서 길게는 100년은 된 듯한 농가 주택들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빈 농가가 늘고 있다. 이농 탓도 있지만, 소득이 늘면서 집을 새로 짓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곳 시골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느낄 수 있었다. 천 선생의 부모 역시 새 집을 짓는 중이었다.

시골집에서의 저녁식사는 음식이 화려하지 않아도 다채로웠다. 돼지고기와 닭고기, 채소를 볶은 것 등 네댓 가지 요리가 전부였다. 천 선생의 읍내 친구와 동네 친지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중국인과 식사 약속을 하면 배우자뿐 아니라 친구나 지인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다. 귀한 손님이나 색다른 손님일수록 더 그런 것 같았다. 외진 시골에 외국인이 세 명이나 찾아왔으니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귀한 식탁에 반주가 빠질 수 없었다. 창강 지역의 시골에서는 주로 미주米酒를 마신다. 독한 백주와 달리 입술에서부터 향긋하다. 재미있는 점은 식탁 아래 화롯불을 놓아두는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으면 두 무릎에 열기가 스며들어 아랫배까지 따뜻해진다. 밤이 깊어지자 대충 손발을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샤워 시설이 없어, 주인장이 커다란 대야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가족이든 손님이든 구분 없이 맨발을 담근다. 발을 담그고 수다를 떨기도 한다. 뜨거운 물에 피곤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발을 씻고 나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한번 닦으면 잠잘 준비가 끝난다.

잠자리는 삐거덕대는 나무 침대. 갑자기 객지의 아들이 손님을 넷이나 데리고 왔으니 잠자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침대 하나에 두 사람씩 누웠다. 난방이 없어 한기가 스며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하겠지만 겨울에도 집 안에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던 한국인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시골은 시골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정겨운 이야기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일정을 짜고 다니는 여행이지만 이런 망외의 숙소에서 깜깜한 밤을 지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내가 어려서 찾아갔던 시골이래야 이모네가 고작이었는데, 바로 이런 시골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모습을 전부 볼 수 있다. 혹시라도 우리가 조금 앞서간다고 그들을 우습게 본다면 큰 착각이다. 중국에는 우리보다 앞선 시간대까지 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뒤처진 시간대 역시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집에서의 저녁식사. 식탁 아래의 화로가 따뜻한 온기로 감싸주는 것이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