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하학상달을 비판하면서批下學上達語

<하학상달[1]을 비판하면서批下學上達語>

‘배움을 통해 통달을 추구한다’[學以求達]는 말이 있다. 이는 매우 부당하다. 이미 ‘하학’(下學)을 떠나서 ‘상달’(上達)하는 경우는 없다[離下學無上達]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배우면 통달하고 ‘하’(下)를 배우면 ‘상’(上)에 도달한다는 뜻이 된다. 이 말대로라면 따로 통달을 추구할 까닭이 없는데, 왜 또 ‘통달을 추구한다’[求達]는 것인가?

그러나 ‘하학’(下學)은 그 자체로 ‘하학’일 뿐이요, ‘상달’(上達)은 그 자체로 ‘상달’일 뿐이다. ‘하학’하는 것이 바로 ‘상달’하는 것이라고 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배움을 통해 통달을 추구한다’고 하면, 이 말은 도대체 ‘하학’함으로써 통달을 추구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통달을 추구하는 학문이 따로 있다는 뜻인가?

배움을 통하여 통달을 추구한다는 뜻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비판한 것과 같다. 통달을 추구하는 학문이 따로 있다는 뜻이라면, 이는 상처를 고친다고 살을 도려냈다가 도리어 상처를 하나 더 만드는 꼴이요, 또한 싹이 빨리 자라게 도와준다고 살짝 뽑아 올려 주었다가 도리어 말라 죽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백자(程伯子, 程明道)는 ‘물 뿌리고, 마당 쓸고, 대화하고, 어울리는 일상 생활 그 자체가 바로 도의 올바른 정수를 터득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洒掃應對, 便是精義入神]라고 했다. 여기서 ‘바로’라고 말한 것은 배움에 들어서는 것이 통달에 이르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또 ‘사람들은 그 참된 마음을 인식해야 한다’[人須是識其眞心]고 말했다. 참된 마음은 지식으로 알 수 없는데, 배움으로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배움으로 추구할 수 없다면, 이는 또한 배움을 떠나야 통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배움을 통해 통달을 추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배움을 떠나는 것도 잘못이고, 배움에 들어서는 것도 잘못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공자는 무엇을 통해서 ‘상달’(上達)하였는가? 이것이 안회가 공자의 통달에 대해 종신토록 고심한 점이다. ‘배움에 들어서면 곧 통달에 도달한다’[卽學卽達]고도 하지 않고, ‘배움을 떠나서 통달에 이른다’[離學而達]고도 하지 않고, 또한 ‘배움을 통해 통달을 추구한다’[學以求達]고도 하지 않고, 그저 ‘하학하여 상달했다’[下學而上達]고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말도 아리송하고 뜻도 아리송해서 사람들이 그저 마음으로 이해하여 행간을 통하여 묵묵히 알도록 하였단 말인가?

물 뿌리고, 마당 쓸고,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은 비록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상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학’이라고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비루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이해시킬 수는 없고 단지 따라오게 할 수 있을 뿐[可使由也][2]이라고 했다.

도의 올바른 정수를 터득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저절로 ‘상달’하게 된다. ‘상달’하면 귀 밝고 눈 밝고 성스럽고 지혜로워 하늘의 덕에 도달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형이상학’[形而上]이라고 하는 것이요, ‘상’(上)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可以語上][3]고 하는 것이요, ‘군자는 상달한다’[君子上達][4]고 말한 것이다.

안회같은 위대한 현인도 오히려 ‘한치도 통달하지 않았다’[未達一問]고 하고 ‘거의 가까워졌을 것이다’[其殆庶幾]라고 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莫我知]고 스스로 생각했고, ‘오직 하늘만이 안다’[惟天知]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는 진정 극도로 통탄하고 슬퍼한 것이다.

대개 세상의 배우는 사람들은 일용(日用)하면서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보는 것을 인(仁)․지(智)라고 생각하게 마련인데, 그러면 ‘상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배워서 ‘상달’에 이른다는 것을 성인도 모른다는데, 평범한 백성이 알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게 아는 것이 있겠느냐?’[吾有知乎哉][5]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하지 못하는데, 또한 평범한 백성이 할 수 있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진 지 오래 되었다’[民鮮能久矣][6]고 말한 것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진 것은 중용(中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버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학’이란 것은 성인과 평범한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과 성인이 배움을 같이 하는 것이라면,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오직 성인만이 홀로 ‘상달’하는 것이라면, 보는 것을 인(仁)․지(智)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일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통달하지 못하고 모두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안회 이하로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다. 참으로 두려워 할 만한 일이다! 선성(先聖)이 제자 자로(子路)와 자공(子貢) 앞에서 개탄하지 않을래야 안할 수 있었겠는가?(권4)


 [1] 《논어》 <헌문>(憲問)에 다음과 같은 공자와 자공(子貢)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고, ‘하학’하여 ‘상달’하였으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일 것이다.”[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여기서 ‘하학’(下學)과 ‘상달’(上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설이 분분하여, 역문에서도 일단 원래 술어를 그대로 옮겼다. 표면적 의미로 볼 때, ‘하학’은 ‘초보적(기초적) 학문을 하다’ 또는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학문을 하다’의 뜻이고, ‘상달’은 ‘높은 경지에 도달하다’ 또는 ‘최상의 이치를 깨닫다’의 뜻이다. 그 내용에 대해, ‘하학’은 ‘인간 세상의 일을 통해서 공부하다’이고 ‘상달’은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알다’라는 것이 공안국(孔安國) 이후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혹은 ‘하학’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공부하다’이고 ‘상달’은 ‘선왕(先王)의 마음을 이해하다’로 풀이하기도 한다.

 [2] 《논어》 <태백>(太伯) 참조.

 [3] 《논어》 <옹야>(雍也) 참조.

 [4] 《논어》 <헌문>(憲問) 참조.

 [5] 《논어》 <자한>(子罕) 참조.

 [6] 《중용》 3장 참조.

批下學上達語

“學以求達”,此語甚不當。旣說離下學無上達,則即學即達,即下即上,更無有求達之理矣,而復曰“求達”,何耶?然下學自是下學,上達自是上達,若即下學便以爲上達,亦不可也。而乃曰“學以求達”,是果即下學以求達耶,抑別有求達之學耶?若即學求達,當如前詰;若別有求達之學,則剜肉作瘡,尤爲揠苗之甚矣。故程伯子曰:“灑掃應對,便是精義入神。”曰:“便是。”則是即學即達也。然又曰:“人須是識其眞心。”夫眞心不可以識識,而可以學求乎?不可以學求,則又是離學而後有達也,故謂學以求達者非也。離學者亦非,即學者亦非,然則夫子何自而上達乎,此顔子所以終身苦孔之達矣。不曰“即學即達”,不曰“離學而達”,亦不曰“學以求達”,而但曰“下學而上達”,何其意圓請圓,令人心領神會而自默識於言意之中也。今觀灑掃應對,雖下愚之人亦能之,唯不能達乎其上,是以謂之下學也,是以謂之百姓也,是以謂謂之鄙夫也,是以謂之凡民也,是以謂之但可使由也。 至於精義入神, 則自然上達矣。上達,則爲聰明聖智,達天德之人矣。是以謂之曰“形而上”也,謂之曰“可以語上”也,謂之曰“君子上達”也。雖顔子大賢,猶曰“未達一間”,曰“其殆庶幾”,況他人哉!則夫子之自謂莫我知,自謂唯天知者,信痛悼之極矣。
蓋世之學者,不是日用而不知,則便是見之仁爲智,而能上達者其誰也?夫學至上達,雖聖人有所不知,而凡民又可使知之乎?故曰“吾有知乎哉”。雖聖人有所不能,而凡民又可使能之乎?故曰“民鮮能久矣”。民之所以鮮能者,以中庸之不可能也,非棄之也。然則下學者,聖凡之所同。夫凡民即與聖人同其學矣,則謂滿街皆是聖人,何不可也?上達者,聖人之所獨,則凡見之爲仁智,與日用而不知者,總是不達,則總是凡民明矣。然則自顔子而下,皆凡民也。可畏也夫!先聖雖欲不慨嘆於由、賜之前可得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