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27 만주 조선족 초가집

만주 조선족 초가집 – 우리 동포는 왜 그곳까지 가서 살게 됐는가

만주는 강렬한 에너지가 가득 찬 거대한 분지라고 느껴진다. 겨울에는 북극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기단으로 인해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15도 정도 기온이 낮은 매서운 추위가 덮친다.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이 세 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만주 평원을 뜨겁게 달군다.

역사에서도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고구려의 위세는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에도 끄떡없었다. 몽골계와 만주계가 섞인 거란은 중원의 송나라를 옥죄면서 중국 최초의 정복국가로 올라섰다. 그런가 하면 거란의 요나라에게 수모를 당하던 만주의 여진족은 반기를 든 지 10년 만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대청제국 역시 100만 인구로 중국 내지와 변방의 1억 인구를 틀어쥐었다. 이 모든 것이 ‘강렬한 에너지’로 요약될 법하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동진해온 러시아와 신흥강국 일본이 만주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틈새에서 조선인들은 한편으로 만주 땅을 개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등 항일투쟁에 뜨거운 피를 뿌렸다. 현대 중국에서도 “베이징 사람들은 ‘무슨 말’이든 내뱉지만, 동북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고 할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로 묘사되곤 한다.

다른 대륙보다 훨씬 추운 혹한기와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반복되는 가운데 응축된 에너지가 무섭게 폭발하는 것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이렇게 뜨거운 땅에 우리의 고즈넉한 전통 살림집들이 있다. 바로 조선족 동포들이 사는 초가집이다. 국토로는 남의 나라이지만, 과거에는 우리 역사의 무대였다. 지금도 우리 동포가 적지 않게 살고 있는 만주의 초가집에서 건축과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보자.

만주의 초가집에서조차 혹한기의 에너지가 핵심으로 읽힌다. 불을 피워 만든 열기를 잘 보존하며 혹한을 견디는 아궁이와 온돌이 바로 그것이다.

아궁이와 온돌 구조는 우리 조선족 동포뿐 아니라 한족이든 만주족이든 또는 다워얼족达斡尔族과 같은 소수민족이든 만주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마다 문화가 달라 각기 다른 특징(아래 그림 참조)이 나타난다. 초가집의 온돌방은 좌식생활 탓에 방바닥 전체를 온돌로 만든다. 한족들은 입식생활을 하기 때문에 침상만 온돌이고 나머지 공간은 신을 벗지 않는 지면으로 되어 있다. 만주족의 온돌방은 그 중간 형태로 ㄷ자 형태로 온돌을 들인다.

만주 초가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정주간鼎主間(아래 사진)이다. 정주간은 부뚜막과 방바닥의 높이가 같게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벽체가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개방된 부엌 겸 거실이다. 우리나라 중부나 남부에서는 보기 어려운 함경도 지방의 특징이다. 취사를 하면 열기가 구들을 통해 방으로 직접 전달되는 동시에 부뚜막에서 데워진 공기도 함께 퍼지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 정주간은 일상생활의 중심이다. 온돌 쪽으로는 방들이 이어지고, 반대편으로는 저장고와 우사가 연결된다. 취사는 물론 오락과 휴식의 공간이고, 작업공간인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는 교류의 공간이다. 그런데 뜨거운 불에 기름을 둘러 볶아내는 중국식 음식문화가 섞이면서 정주간에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름이 섞인 연기가 실내 곳곳에 들러붙는 것이다. 그래서 정주간과 부뚜막 사이에 미닫이가 달린 벽체를 치기도 한다.

정주간에 이어진 방은 정주간의 아궁이에 난방을 의존하는데, 田자 또는 日자 구조다. 하나의 큰 방을 두 개나 네 개로 나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방을 거쳐 그다음 방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겹집이라고 한다. 겹집 역시 함경도와 같이 겨울이 몹시 추운 지방에서 발달한 구조다. 실내 에너지가 외부로 유실되지 않도록 각 방의 벽체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한 것이다.

전체적인 공간의 배열을 보면 서에서 동으로 저장고, 정주간, 침실이 이어져 각 공간이 모두 남향이 되는 一자 형태가 보통이다. 겨울에도 해가 잘 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 중남부에서는 처마가 깊어 여름에는 햇빛을 차단하지만 만주에서는 처마가 깊지 않다.

우리가 쉽게 보는 한옥은 북방식 온돌과 남방식 마루가 결합되어 있다. 방은 온돌방이지만 대청마루가 거실이 되고, 주방은 안방과 벽체로 구분되어있다. 전체 배열에서도 마당을 향해 ㄱ자나 ㄴ자로 이어진 형태가 많아 만주의 초가집과는 다르다.

방구들을 덥힌 열기가 연도를 거쳐 외벽 밖에 설치된 굴뚝으로 빠져나가는데, 아궁이가 있는 집에서는 굴뚝이 독특한 외관으로 눈길을 끌어당긴다. 굴뚝은 3m 정도 높게 뽑는다. 흙으로 두툼하게 만들기도 하고, 벽돌로 쌓아 제법 번듯한 모양을 내기도 한다. 속이 빈 굵은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또 다른 풍모를 자랑하기도 한다.

외관에서 가장 도드라진 것은 역시 지붕이다. 초가도 있고 기와도 있다. 기와는 만주의 다른 민족들도 사용하지만 볏짚을 올리는 것은 조선족 가옥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지붕의 형태는 사방으로 경사면을 내는 우진각지붕이거나 앞뒤 양면만 경사를 내는 맞배지붕이다.

초가지붕은 멀리서 보면 한적한 강가에 띄우던 나룻배를 엎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 같다. 용마루에서 처마로 흘러내리는 선과 면의 부드러움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볏짚이란 재료에서 느끼는 두툼하고 푹신한 느낌과 하얗게 칠한 회벽과의 조화도 참 아름답다. 우리의 마음속에 ‘시골’이라는 단어가 주는 행복한 느낌 그대로다.

지금 만주에서는 초가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주택을 개량하면서 많이 사라졌고, 우리 동포들이 대도시로 또는 우리나라로 이주하면서 폐가가 된 것도 많다. 그 가운데 필자가 정말 시골다운 편안함을 느꼈던 곳으로 안내해보려고 한다.

옌볜延边 조선족 자치주와 무단장시牡丹江市 중간에 닝안시宁安市가 있는데, 그 외곽에 있는 샹수이촌响水村이란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중국 관광지로는 최고 등급인 5A로 분류되는 징보호鏡泊湖라는 아름다운 호수도 있고, 발해의 상경용천부 유지도 4km 정도에 있다. 자연과 역사와 인문적 요소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족 마을이었다. 마을 이름을 따서 향수미响水米라고 이름 붙인 품질 좋은 쌀이 유명하다. 추수철에는 황금빛 들녘이 너무 아름다워 중국 외지인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가을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상당수의 조선족 동포는 마을을 떠났지만 일부 조선족 동포와 그들의 초가집이 남아 있다.

샹수이촌의 초가집, 마을에 들어서면 허리춤 높이의 목책으로 얼기설기 세운 담이 정겹다. 그 위로 초가지붕이 드러나고, 배불뚝이 굴뚝은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의 느낌으로 눈에 들어온다. 잠글 것도 없는 낮은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텃밭이다. 집은 창고와 세 칸짜리 본채, 화장실이 옆으로 나란히 서 있고, 마당 한쪽에는 땅을 파서 만든 저장고의 작은 문이 낯선 방문객을 빼꼼히 쳐다보는 듯하다. 본채로 들어서면 정주간의 부뚜막에 크고 작은 솥이 세 개 걸려 있다. 부뚜막은 곧바로 온돌 바닥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구마라도 찌면 아이들이 가마솥 뒤에서 재잘거리며 받아먹을 것 같다.

비록 가난한 집이기는 해도 할머니의 온정이 서려 있고 텃밭의 풋풋함에 잃었던 생기가 되살아날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실생활에서는 이미 사라진 풍경이다. 이 마을 입구에서 길을 알려줬던 젊은이가 바로 조선족 동포였는데, 낯선 방문객을 환대해주며 나눈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조선족 동포의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이 시골 초가집은 일흔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약간의 농사를 지으면서 혼자 지키고 산다. 중국어를 못하는 탓에 도시로 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무단장시의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어머니도 현지에서의 좋은 학력을 접어둔 채 한국으로 가서 어느 식당 종업원으로 아들의 학비를 벌고 있다. 이 젊은이는 베이징이공대학 건축과에 다니는데 방학이라 잠시 고향에 돌아온 것이었다.

우리 민족은 어디에 살든 교육열이 상당하고 실제 학업성취도도 높다. 중국에서 시골 마을 출신으로 베이징의 대학까지 진학했다면 그 지역에서는 수재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그래도 경제적인 문제는 또 다른 현실이다. 지방 도시 교원의 수입으로는 베이징의 대학생 아들을 키우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돈을 더 벌어야 했고 어머니가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할머니는 시골집에, 아버지는 인근 도시에, 어머니는 한국 식당에, 대학생 아들은 베이징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래도 3세에게 꿈과 희망이 있고 현재의 가정 형편이나 생활도 건실하니 이 가족은 매우 양호한 편이다. 다른 가정은 적지 않게 깨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돈은 술집으로 새기도 했고, 잠시 헤어져 돈을 벌다가 아예 갈라서는 일도 일어났다. 도시로 나갔지만 주변부만 맴도는 이도 있고, 코리안 드림이 좌절과 상처만 남긴 것도 적지 않았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에 편안함을 느끼고 건실한 가정에서 안도감을 느끼지만, 조선족 동포 전체의 오늘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왜 만주에서 힘들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왜 따뜻한 곳을 떠나 이 춥고 거친 곳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을까.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베이징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압록강·두만강 이북은 공동화하다시피 했다. 청나라는 이곳을 용흥중지龍興重地라 하여 아예 봉쇄하고 외지인이나 외국인의 이주를 금지해버렸다.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세기다. 조선 후기 경제가 무너지고 관리들의 부패가 극심해지자 함경도·평안도에서 개별적으로 국경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1869∼70년과 같이 재해로 인한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며 집단이주가 뒤따랐다. 청나라도 아편전쟁 패배 이후 변경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러시아의 동진을 견제하기 위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자그마치 2000만 명을 이주시켰다. 이런 가운데 1881년 압록강·두만강의 봉금을 해제하고 조선인들이 개간농민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그해에만 1만여 명이 넘어갔고 1897년에는 조선 정부가 파견한 서변계관리사가 관할한 조선인이 3만 7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수탈이 본격화하자 조선인들의 만주 이민은 급증했다. 1910년에는 16만 명이었고, 1919년에는 36만 명으로 늘었다. 3·1운동 이후 정치적인 망명도 급증했다.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면서 1930∼40년대에는 조선인에 대한 강제 이주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1936∼39년 사이의 강제 이주로 인해 만주 곳곳에 경상도촌·전라도촌·충청도촌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 1941년에도 개척단이란 이름 아래 강제 이주가 계속되었다. 결국 해방 당시에 만주에는 우리 동포들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해방 이후 일부는 귀국했지만 남북의 정치적 긴장과 곧이어 터진 6·25전쟁으로 인해 발길이 묶였다. 이들과 그 후손들이 바로 현재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 우리 조선족 동포다. 조선족이 아니라 그냥 우리 동포였다. 그러나 정치와 이념의 벽이 쳐지고 30년 넘게 완전히 차단되었다.

20세기 막바지 이들에게 가장 큰 변화요소는 중국인들의 눈에 선망의 대상으로 등장한 대한민국이었다. 이들은 연고를 찾아 한국으로 왔고 일자리를 구했다. 중국에서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고, 자식의 학비를 대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만주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여행 가이드와 식당업이나 숙박업도 돈벌이가 되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그늘이 깊어갔다. 몇십 년간 단절되어 있다가 한국을 찾은 동포들은 이제 조선족이었다. 경제적 격차는 고사하고 이질화된 언어와 문화에 당황했다. 대한민국은 처음에는 동포애라는 집단감성이 앞섰지만,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에 대한 세밀한 대책은 부실했다. 조선족 동포들은 만주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한국인들이 일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영어 단어에 의사소통이 막혔다. 한국인들은 “기자질과 선생질, 몸무게가 몇 근” 등과 같은 조선족 특유의 표현을 오해하여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만주에서는 일부 한국인들의 취업사기·투자사기·결혼사기가 발생했고, 한국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상의 약점을 악용하는 일이 생겨났다. 일부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에서, 만주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사고를 치기도 했다. 동포 사회에서는 한국인의 오만함에 대한 비난이 꿈틀거렸고, 한국에서는 동포들에 대한 괴담까지 고개를 들었다.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우리 민족은 한 사람 한 사람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기적같이 되살아났다. 조선족 동포 역시 뜨거운 에너지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주 벌판을 피땀으로 개간했고,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니겠는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서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싸웠다. 중국과 한국의 왕래가 끊긴 동안에도 열심히 자식 교육을 시켰고 중국의 어느 민족보다 평판이 우수했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허용되자 한국으로 와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한국에서나 중국에서 훌륭하게 성장하는 2세들도 많아졌다. 20세기 후반 중국의 발전이 더딘 탓에 발생했던 한국과 조선족 동포의 격차도 그들의 노력으로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21세기 거대 중국의 등장이라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이미 적지 않은 균열이 생겼다. 한국인이 저지른 수많은 사고는 ‘사건·사고 뉴스’로 지나치면서도 조선족 동포 한 사람의 사고는 괴담으로 덧칠해서 돌리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21세기라는 생존환경은 우리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럴수록 뜨거운 에너지를 함께 용출시킬 수 있는 우호적인 자원을 늘려가야 한다. 그 가운데 조선족 동포는 절대로 갈라지지 않아야 할 중요한 민족자산이다. 우리가 다른 민족을 이해하고 역사를 더 넓게 인식하기 이전에 민족 내부의 균열을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반도에서건 만주에서건 초가집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시대적 변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읽는 우리의 미래는, 더 늦기 전에 조선족 동포와 화해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