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츤법反襯法
【정의】
앞서 살펴 본 대로 마오쭝강毛宗崗은 ‘정츤법’과 함께 ‘반츤법’을 운위했다. 이것은 ‘정츤법’과 달리 두 가지 다른 유형의 인물을 동등하게 혹은 주객 관계로 배치함으로써 강렬한 대비를 통해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주는 기법으로, 진성탄金聖嘆은 이것을 ‘배면포분법背面鋪粉法’이라 불렀다.
【실례】
마오쭝강이 예로 든 《삼국지연의》 말고도 ‘반츤법’을 운용해 작중 인물의 성격을 대비시킨 예는 무척 많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쑨우쿵孫悟空과 주바졔猪八戒가 그러하고, 《금병매金甁梅》에 나오는 우다武大와 우쑹武松 형제 역시 그러하다. 《경세통언警世通言》 중의 「두스냥이 노해서 보석상자를 강물에 빠뜨리다 杜十娘怒沉百寶箱」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인 리쟈李甲와 두스냥杜十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자 주인공인 리쟈는 유약하고 이기적이며 의리가 없는 반면, 여자 주인공인 두스냥은 오히려 의지가 굳고 생각이 깊으며 자신의 연인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킨다. 이렇듯 진실과 거짓, 미와 추를 대비시킴으로써 작품의 예술 형상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인물의 성격 역시 더욱 전형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요재지이》 가운데 한 에피소드인 「먀오 생苗生」의 주요 등장인물인 궁 생龔生과 먀오 생苗生도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작자는 거칠고 호방한 먀오 생을 한 무리의 추악한 수재秀才들과 대비시킴으로써 먀오 생의 형상을 더욱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문】
궁 생龔生은 민저우岷州 사람이다. 과거를 보기 위해 시안西安으로 가던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술을 사서 혼자 마시고 있는데, 훤칠하게 생긴 대장부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앉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 궁 생이 술잔을 들어 새로 온 손님에게 술을 권하자 그 사람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성이 먀오 씨苗氏라고 말했는데, 언사가 매우 거칠면서도 호탕했다. 궁 생은 그의 말투가 점잖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매우 거만하게 굴었고 술이 바닥났는데도 더 사려고 하지 않았다. 먀오 생은 “조대措大[1] 놈과 마시다가는 정말로 사람 미치겠네.”라고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부뚜막으로 가더니 술동이를 집어들고 왔다. 궁 생은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고 사양했지만, 먀오 생은 그의 팔을 비틀며 마시라고 강권했다. 궁 생은 어깨가 으스러지듯 아팠으므로 부득이하여 몇 잔을 비웠다. 먀오 생은 스스로 커다란 사발에 술을 따라 마시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손님 대접에 익숙하지 않다오. 가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궁 생은 즉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그런데 몇 리쯤 가자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병들어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 궁 생은 길가에 주저앉아 말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보따리마저 무거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차에 먀오 생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궁 생이 길바닥에 앉아 있는 까닭을 알게 되자 말 잔등에 실린 짐을 끌어내어 궁 생의 하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말의 배때기를 어깨에 걸터 메고 이십 리가 넘는 길을 달려 여관으로 가더니 말을 내려 마구간에 매어놓았다. 한참이 지난 뒤 궁 생과 그의 하인이 여관에 당도했다. 궁 생은 그제서야 깜짝 놀라 먀오 생을 신처럼 우러르며 그를 매우 융숭하게 대접했다. 궁 생이 술을 사고 식사를 주문하여 먀오 생과 함께 먹으려고 하자, 그는 선뜻 나서며 이렇게 제지시켰다.
“나는 밥통이 매우 큰 사람이라오. 당신이 사는 알량한 식사는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으니 술이나 실컷 마시게 하여주오.”
그는 순식간에 술동이 하나를 다 비우더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말을 치료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거요. 나는 당신을 기다려 줄 수 없으니 먼저 갑니다.”
말을 마치자 먀오 생은 작별 인사를 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 후 궁 생은 시험을 끝낸 뒤 서너 명의 벗을 불러 같이 화산華山에 올랐다. 모두들 땅바닥에 앉아 술상을 차려놓고 바야흐로 마시고 즐기려는 참인데 갑자기 먀오 생이 나타났다. 그는 왼손에는 커다란 술잔을, 오른손에는 돼지 다리를 하나 들고 와서 땅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듣자 하니 여러분이 산에 올라 유람을 하신다기에 특별히 찾아왔습니다. 말석이라도 좋으니 동석하게 해주십시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인사를 나눈 다음 편하게 앉아서 흉금을 터놓고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연구聯句[2]를 하여 주흥을 돋우려고 하자 먀오 생이 나서서 반대했다.
“통쾌하게 술이나 마시면 즐거울 노릇인데 왜 하필 이 시간에 머리통 쥐어짜는 짓을 해야만 하나!”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고 진구金谷의 벌칙[3]을 정하자, 먀오 생은 또 딴소리를 했다.
“시를 잘 못 짓는 놈이 있으면 군법에 의거해 죽여버립시다.”[4]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시를 잘 못 짓는다고 해서 죽일 것까지야 있겠소?”
먀오 생이 그 말을 받았다.
“군법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 같은 무부武夫도 연구를 지을 수 있겠군요.”
맨 앞자리에 앉았던 진 생靳生이 첫 마디를 읊었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굽어보니,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 있네.
絶巘憑臨眼界空
먀오 생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그 다음을 받아넘겼다.
타호를 두드려 박자를 맞추니 그릇 이빨이 다 나가고,[5] 칼 빛은 장사의 붉은 마음을 맴도네.
唾壺擊缺劍光紅
그 다음 사람은 시구를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한나절을 앉아 있었다. 먀오 생이 견디다 못해 술병을 가져다 스스로 따라 마셨다. 연구는 앉은 순서대로 천천히 계속되었다. 그런데 갈수록 그 내용이 저속하게 변하해가자, 먀오 생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오. 나를 용서한다면 이제 그만둡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먀오 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갑자기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용의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그리고 또 몸을 일으키더니 굽혔다 폈다 하면서 사자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러는 바람에 시를 짓던 흐름이 끊겨 사람들은 더 이상 연구를 지속하지 않고 다시 술잔을 돌리며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는 모두들 절반쯤 취해 얼근하던 참이었다. 사람들은 다시금 각자의 과거 시험 문장들을 암송하기 시작하더니 또 서로를 추켜세우며 칭찬하기에 바빴다. 먀오 생은 그런 시답잖은 말들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궁 생을 잡아당겨 활권豁拳을 했다. 승부가 여러 번 뒤바뀐 다음에도 사람들이 팔고문 외우는 일을 그만두지 않자, 먀오 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이 어떤 글을 지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소이다. 이 문장들은 침대맡에서 마누라에게나 읽어주면 족한 것들이오. 이처럼 넓은 장소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재잘거리니 정말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군.”
사람들은 먀오 생의 호통에 부끄러운 기색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나 일부러 더욱 큰소리로 읊어대기 시작했다. 먀오 생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큰소리로 울부짖더니 곧바로 호랑이로 변해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물어 죽인 다음에야 포효하면서 가버렸다. 물려 죽지 않은 사람은 오직 궁 생과 진 생 두 사람뿐이었다. ……
( 《요재지이》 「먀오 생苗生」)
[1] 가난한 선비에 대한 경멸적인 호칭.
[2] 시를 짓는 방식의 하나.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서로 한 줄씩 이어가며 시 한 편을 완성한다. 친구들끼리 술을 마실 때 응수應酬하는 경우에 많이 쓰인다.
[3] 시를 짓지 못하면 석 잔의 술을 마셔야 하는 벌칙. 《세설신어》 「품조品藻」의 주석에서 진晋나라 스충石崇의 「진구 시 서金谷詩序」를 인용하여 진구의 벌칙을 설명하고 있다. 스충은 뤄양洛陽의 진구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왕쉬王詡가 창안長安에 돌아갈 때 환송하는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그때 “각자 시를 지어 가슴 속의 정회를 털어놓았는데, 간혹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벌주 세 말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잔치에서의 벌주 석 잔을 ‘진구의 벌칙’ 혹은 ‘진구 주수金谷酒數’라 부르게 되었다.
[4] 《한서》 「고오왕전高五王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뤼 후呂后가 연회를 소집하며 주허 후朱虛侯 유장劉章에게 술을 감독하는 직책을 맡기자, 그는 군법으로 술을 돌리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그녀의 허락을 받아냈다. 잔치에 참석했던 뤼 씨呂氏들 가운데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자리를 뜨는 순간, 류장은 쫓아가 칼로 그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5] 《진서晋書》의 기록에 의하면, 왕둔王敦은 술만 마시면 타호를 두드려 박자를 맞추면서 차오차오曹操가 지은 “늙은 천리마 마구간에 매였지만, 그 뜻은 언제나 중원을 달리노라. 용맹한 무사 늙었다 해도 웅대한 그 기상 아직 죽지 않았네.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시의 내용과 자기 재능을 펼치고 싶은 장렬하고 격정적인 마음이 일치되는 순간 박자를 두들기는 그의 손에는 자연히 힘이 가해져 그릇의 이빨이 모두 빠져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