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기행 01 초원의 잊혀진 제국, 퉁완청統萬城

초원의 황성 옛터 퉁완청(統萬城)을 찾아가는 길은 과연 쉽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이 산시성(陝西省)과 내몽골, 닝샤와의 접경 지역에 있는 인적 드문 사막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막하면 어마어마한 모래더미가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떠올린다. 모래로 뒤덮인 사막은 모래사막(Sand Desert)이라고 하는데, 사실 전체 사막 가운데 이런 모래사막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며, 대개는 풀과 관목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정도의 황량한 초원에 가까운 사막이 대부분이다. 이른바 ‘그린 데저트(green desert)’인 것이다. 퉁완청은 이런 그린 데저트에 자리잡고 있다.

퉁완청으로 가는 연도의 사막 풍광

퉁완청은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하(夏)나라의 수도였다. 오호십육국의 하나라는 상고시대의 우(禹) 임금이 세운 삼대(三代)의 하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흉노와 선비의 혼혈족 출신인 창업주 허롄보보(赫連勃勃)의 성을 따 통상 ‘혁련하(赫連夏)’라고 불린다. 그 선조들은 원래 유씨(劉氏)였지만, 이 나라를 건국한 허롄보보가 ‘아름답고 빛나는 하늘’이란 뜻의 허롄(赫連)으로 성을 바꾸었다.

퉁완청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 부분

국내에 퉁완청(統萬城)의 존재를 일반에게 소개한 것은 서울대 박한제 교수가 쓴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제1권(사계절, 2003)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아래에 필자가 퉁완청을 소개하는 글 역시 박한제 교수의 책을 많이 참고했음을 부기해둔다. 지명과 인명은 현지음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과 달리 박한제 교수의 책에서는 한자 표기를 위주로 하고 있는데, 원서의 뜻을 살리기 위해 박한제 교수의 글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우리말 한자 표기를 그대로 두었다.)

허롄보보(赫連勃勃)가 이 성을 건축했을 때 이 지역은 사막이 아니었다. 광활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맑은 물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다. 목축과 농경이 모두 가능한 지역이었다. 더욱이 동서 교통로의 중간에 위치하여 아쉬울 것이 없는 물산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래알만이 강렬하게 작열하는 태양 하래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을 뿐이다. (박한제, 앞의 책, 241쪽.)

통만성은 우리에게 하투(河套)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오르도스 지역 내에 광활하게 펼쳐진 모오소(毛烏素) 사막 동남쪽 끝부분에 위치해 있다. 행정적으로 섬서성 정변현(陝西省靖邊縣)에 속해 있지만, 내몽고자치구와 섬서성의 교계 지역에 위치하여 있다. 이곳에서 숙박시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남으로 110km 떨어진 정변, 동으로 240km 거리의 유림(楡林), 북으로 180km 떨어져 있는 내몽고자치구 이극소맹(伊克昭盟) 오심기(烏審旗)로 가야 한다(내몽고자치구의 행정 단위는 중국 본토와 달라 현에 해당하는 것을 ‘맹’이라 하고, 향에 해당하는 것을 ‘기’라 한다. 이 지방 제도는 청대의 몽고족 통치 단위에서 연원한다.). 황하의 지류로 오르도스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으로 흐르는 무정하(無定河) 동북안의 표고 1150m 정도의 높이에, 서북이 높은 경사면에 이 통만성의 유지가 있다. (박한제, 앞의 책, 246~247쪽.)

퉁완청 유지 표지석

통만성의 의미는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에 군림하겠다(統一天下 君臨萬邦)’는 것이다. 통만성의 성문 명칭에서도 우리는 그의 야망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읽을 수 있다. 남문은 송나라의 조공을 받는 문(朝宋門)이고, 동문은 북위를 초납하는 문(招魏門)이며, 서문은 하서회랑 지역의 양나라를 복속시키는 문(服凉門)이고, 북문은 삭방을 평정하는 문(平朔門)이다. 그는 413년부터 연인원 10만 명을 동원하여 철옹성을 지었다. 중국의 궁성은 남향이지만 그의 궁성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유목 민족의 동쪽 숭배(尙東) 사상과 관련 있는 것이지만, 눈만 뜨면 숙적 북위 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된 것은 아닐까? … 이 성은 중국 성곽사상 의미 있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성벽의 견고성이다. 역사서에는 이 성벽을 만들 때 “땅을 쪄서 성을 쌓았다(烝土築城)”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 고대 국가에 보이는 일반적인 축성 방법인 판축법(版築法)을 채용하긴 했지만, 통만성은 통상의 그것과는 달랐다. 통만성 편에 있는 마을 이름이 ‘백성자(白城子)’인데, 이 성벽은 황토색 토성이 아니라 고대판 콘크리트 성이라 그 빛이 하얗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컬러판 항공 사진을 보면 두 개의 하얀 큰 테두리를 한 축구장 두 개가 연이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학 감정에 의하면 그 성토의 주성분은 모래(석영), 점도, 그리고 탄산칼슘(석회)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이것을 삼합토라 한다) 증기를 내면서 갑자기 체적이 팽창함으로써 모래와 진흙이 압축되는 공법이다. 궁성의 성벽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그 벽을 숫돌로 삼아 칼과 도끼를 갈았다고 한다. (박한제, 앞의 책, 257~259쪽.)

이곳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퉁완청을 다녀온 중국의 네티즌들은 이 성이 마치 누런 모래밭 위에 떠있는 거대한 하얀 배와 같다고 해서 ‘사막의 타이타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퉁완청 매표소에 도착하니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손님들로 인해 동네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매표소 쪽에서 바라본 퉁완청

매표소에서 길을 따라 약 5분쯤 걸어가자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눈부시게 하얀 석회 덩어리였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수한 제비떼…. 1500 여 년 전의 황성 옛터가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이고 꿈결인 듯 우리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이루 필설로 그려낼 수 없는 짜릿한 감동 그 자체였다.

퉁완청

후일담이지만, 같이 갔던 사람들은 모두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으로 이곳 퉁완청을 첫손가락으로 꼽았는데, 이것은 앞서 다녀갔던 박한제 교수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아무튼 고즈넉한 사막의 초원 위에 어찌보면 다소 생뚱맞아 보일지도 모르는 순백의 석회 성벽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이고 새침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던 기억들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청량제와 같은 것이었다. 서울서는 진즉이 사라져버린 제비마저 한가롭게 하늘을 떠다니는 모습 역시 잊을 수 없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광이었다.

퉁완청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궁성(宮城)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궁성은 허롄보보의 황궁이고 내성은 관공서와 귀족들의 거주지이며, 외성은 일반 민중들이 살던 곳이라 한다. 내성은 다시 동성과 서성으로 나뉘는데. 동성이 좀더 많이 무너졌고 현재 남아 있는 서성은 성벽구조가 마면(馬面)구조다. 성벽 밖으로 말머리처럼 튀어나온 방어용 시설을 ‘마면’이라고 한다는데 그 튀어나온 길이가 16m나 되고, 마면과 마면 사이는 50m라서 공격해오는 적을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마면 아래에는 식량창고가 있고, 서성의 네 개의 문에는 항아리 모양의 반원형 성벽을 겹으로 둘러친 옹성(甕城)이 있어 성문을 방어하는 데 사용되었다.

퉁완청 서성. 흔히 사막의 타이타닉이라 불린다.

하지만 허롄보보가 죽은 뒤 대하국은 자식 대에서 건국 26년 만에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망하게 된다. 그 뒤 오랜 세월 퉁완청을 포함한 대하국에 대한 모든 것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가 1845년에야 비로소 이것이 퉁완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뒤인 1957년 처음으로 이곳에 대한 기초 조사가 행해졌고 현재는 알음알음으로 모험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