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가로

량스츄梁实秋(1903∼1987)
량스츄는 원래 이름이 량즈화梁治华로 스츄实秋는 자이다. 베이징에서 태어났으나 관적은 저쟝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이다. 필명으로 쯔쟈子佳, 츄랑秋郎, 청수程淑 등이 있다. 저명한 산문가이자 학자, 문학비평가로 중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연구가였다. 일찍이 루쉰과 수많은 필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1923년 하바드대학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26년 귀국해 둥난대학东南大学, 칭다오대학青岛大学(현재는 하이양대학海洋大学), 산둥대학山东大学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1949년 타이완으로 건너가 타이완사범대학 영어과 교수를 지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먼지가 세 치나 쌓이고, 비가 내리면 거리는 온통 진흙투성이다.無風三寸土, 雨天滿地泥’ 이것은 베이징의 거리를 소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비가 내릴 때는 커다란 먹통과 같고, 바람이 불 때는 커다란 향로와 같다. 이것 역시 아주 적절한 묘사이다. 이런 곳인데도 가볼 만 하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때로 베이징 거리 풍경이 떠오른다.

베이징은 지극히 건조하고, 거리도 제대로 닦이지 않아, 바람이 크게 불 때 마주하고 나아가노라면 검고 누런 먼지가 온몸에 뒤덮여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다. 이빨 사이에도 모래가 쌓여 서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작은 돌덩이도 섞여 얼굴을 때려 아프고, 눈을 뜰 수 없는 건 더더욱 예사로운 일인데, 이런 건 받고 싶지 않은 재미다. 비가 내릴 때는 대로에 무릎까지 물이 차오를 때가 있는데, 한번은 인력거가 뒤집어져서 사람이 빠져죽은 일도 있었다. 작은 후통은 곳곳이 커다란 진흙 뻘로 변해 담장에 의지해 걸어야 하고 진흙탕 물이 얼굴에 온통 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나는 어려서 대로와 작은 골목을 헤집고 등하교를 했는데 아주 고역이라 여겼다.

예전의 도로는 이렇지 않았다. 용도甬道는 높이가 처마와 가지런했는데, 윗면은 수레 자국이 깊게 나 있어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해 보면 [그 때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니] 약간 통쾌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나 역시도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상황을 겪은 바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승용차를 타고 쳰먼前門에 나가는 게 한 바탕 큰일이었다. 치판졔棋盤街까지 나아가면 늘 그렇듯 차들끼리 새치기하느라 꽉 막혀 나아가기 어려웠으니, 앞에서 소리치고 뒤에서 욕을 해대며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다 항상 한 시간 이상 되어서야 풀리는 현상이 있었다.

가장 난감했던 것은 이 일대의 길에 두터운 석판이 깔려 있는데, 오래 되니 닳고 닳아 아주 넓고 깊은 홈이 생긴 것이 이빨을 드러낸 듯 하여 노새나 말이 끄는 수레가 그 사이를 가다가 바퀴가 그 홈에 빠지게 되면 좌우로 흔들리다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고 넘어가는 사이 머리에는 호두만한 크기의 혹이 좌우로 한 개씩 나게 된다. 이런 상황은 나중에 나아지긴 했는데, 쳰먼의 통로가 하나에서 네 개로 늘어나고, 길도 넓어졌으며, 석판도 없어졌다. 또 어떤 사람이 발명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측통행’을 하게 되었다.

베이징 성은 네모반듯하게 북쪽에 자리 잡고 남면을 하고 있는데, “하늘이 서북쪽을 무너뜨리고 땅이 동남쪽을 함몰시켰다”는 것으로 상징되는 두 귀퉁이가 이지러진 것 말고는 불규칙한 형상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로 역시 횡으로나 종으로나 평평하고 반듯한 것이 사방팔방 평온하다. 둥쓰東四, 시쓰西四, 둥단東單, 시단西單 이렇게 네 곳의 패루가 네 개의 중심점이 되어 골목들이 비늘이 늘어선 듯 하나하나 분명하게 셀 수 있다. 베이징에 와서는 길 잃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명청대 베이징 성. 과연 서북쪽과 동남쪽이 약간 이지러져 있다.

예전에 황성이 철거되지 않았을 때는 동성東城에서 서성西城으로 가려면 반드시 허우먼後門으로 에둘러가야 했다. 지금은 대로가 뚫려 베이하이北海 퇀청團城의 진아오위둥챠오金鰲玉蝀橋을 지나야 하는데, 난간의 조각이 옥을 잘라놓은 듯 풍경이 그림 같다. 이곳이 베이징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저녁 무렵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노라면 좌우로 눈을 뗄 수가 없다.

성 밖에도 극히 풍치있는 길이 있는데, 바로 시즈먼西直門에서 하이뎬海甸으로 통하는 신작로이다. 길을 끼고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 수양버들이 있는데, 한 그루 한 그루 늘어서 있어, 여름과 가을에는 매미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실버들이 바람에 날리는 가운데 석양이 지면 그윽한 경치가 절묘하다. 나는 어려서 칭화위안淸華園에서 공부했는데, 매주 이 길을 앞뒤로 8년 간 왕복했다. 어떤 때는 나귀를 타고, 어떤 때는 차를 타고 갔는데, 이 길은 내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베이징 가로의 이름은 대부분 모두 풍취가 있다. 넓은 것은 ‘콴졔寬街’, 좁은 것은 ‘샤다오峽道’라 하고, 기울어진 것은 ‘셰졔斜街’, 짧은 것은 ‘이츠다졔一尺大街’, 모난 것은 ‘치판졔棋盤街’, 구부러진 것은 ‘바다오완八道灣’, 새로 난 것은 ‘신카이루新開路’, 좁장한 것은 ‘샤오졔쯔小街子’, 낮은 것은 ‘샤와쯔下洼子’, 좁고 긴 것은 ‘더우야차이후통豆芽菜胡同’으로 불렀다. 역사적인 연혁과 관계가 있는 수많은 의미들이 이미 사라져버렸다. 이를테면, ‘류리창琉璃廠’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유리기와를 굽지 않고 서점이 집중된 곳이 되었고, ‘러우스肉市’에서는 더 이상 고기를 팔지 않고, ‘미스米市’에서는 더 이상 쌀을 팔지 않고, ‘메이스졔煤市街’에서는 더 이상 석탄을 팔지 않고, ‘보거스鵓鴿市’에서는 더 이상 비둘기를 팔지 않고, ‘강와창缸瓦廠’에는 더 이상 옹기가 없으며, ‘미량쿠米糧庫’에는 더 이상 곡식 창고가 없다.

콴졔寬街

나아가 어떤 길 이름은 비속한 것을 혐오하는데, 사실 비속함에도 비속한 풍미가 있다. 그런데 어떤 점잔 떠는 선비 나으리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풍아風雅함을 자처해 멋대로 몇몇 이름을 우아하게 고쳐버렸다. 이를테면, ‘더우푸샹豆腐巷’은 ‘둬푸샹多福巷’으로 바꾸고 ‘샤오쟈오후통小脚胡同’은 샤오쟈오후통曉敎胡同‘으로 바꾸었으며, ’피차이후통劈柴胡同‘은 ’비차이후통辟才胡同‘으로 바꾸고, ’양웨이바후통羊尾巴胡同‘은 ’양이빈후통羊宜賓胡同‘으로 바꾸었고, ’쿠쯔후통褲子胡同‘은 ’쿠쯔후통庫資胡同‘으로 바꾸었으며, ’옌야오후통眼藥胡同‘은 ’옌야오후통演樂胡同‘으로 바꾸고, ’왕과푸셰졔王寡婦斜街‘는 ’왕광푸셰졔王廣福斜街‘로 바꾸었다.

민국 초기 경찰청에 류보안劉勃安 선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위비魏碑를 능숙하게 쓸 줄 알아 에나멜로 만든 큰 거리 작은 골목의 명패는 모두 이 군자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베이징에 아직까지 부유한 상인을 기념하는 등 인명을 길 이름으로 삼는 작풍이 없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베이징은 십리나 되는 조계지에 비할 바는 아닌데, 사람들의 심리가 비교적 보수적이고, 서양의 관습에 물드는 것도 비교적 적고 늦다. 둥쟈오민샹東交民巷은 특수한 구역으로, 그 안의 신작로는 각별히 평탄하고, 가로등도 각별히 밝으며, 건물들도 각별히 높고, 청소도 각별히 깨끗하게 되어 있다. 바다를 보고 탄식했다는 하백河伯의 심정으로 양놈들과 이웃하고 살고 있는 베이징 사람들은 보고도 못 본 척, 괴이한 것을 보고도 괴이쩍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울러 베이징 사람들은 바로 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는 곳에 대해서는 흠모의 눈길을 던지지 않고, 다만 서양인에게 고용된 중국인이 양놈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만 기세등등한 눈길을 날린다. 토박이 베이징 사람은 새장을 든 채 새를 태우고 성벽 주변을 어슬렁거릴지언정, 쳐다보면 화가 나는 그곳으로 쉽사리 걸어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베이핑에는 거리 구경할 곳이 없다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거리에는 무슨 구경할 만한 게 없다. 일반적인 가게에는 쇼 윈도가 없다. 그것은 착실한 장사꾼이라면 모두들 ‘훌륭한 물건은 깊이 감추어두어 비어있는 듯“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좋은 물건은 바깥에 내놓지 않고, 물건을 사는 이도 일정한 곳에 가서 거리에서 공연히 빈둥댈 필요가 없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보를 할라치면, 공원이나 베이하이北海, 태묘太廟, 징산景山에 간다. 만약 길 위에서 한가롭게 거닌다면, 자동차와 부딪히는 것을 조심해야 하고, 진흙탕을 조심해야 하고, 개똥을 밟는 걸 조심해야 한다! 시간을 보내는 데는 상하로 3, 6, 9 등급이 있어 각자 가는 곳이 있는데, 거리에서 빈둥대는 게 최하책이다. 당연히 베이징에도 베이징만의 도시 풍경이 있다. 한가롭게 아무 일 없이 우연히 거리로 나가 볼작시면, 시끌벅적한 가운데 유장하고 한가로움이 섞여 있는 것도 충분히 흥취가 있다. 책을 사는 벽癖이 있는 사람이라면 류리창에 가서 창둥먼廠東門에서 창시먼廠西門까지 가면 옹근 반나절을 보낼 수 있는데, 편액과 간판들만으로도 충분히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고, 서점이 연이어져 있어 가게의 단골은 계산대 뒤로 들어가 각종 도서와 판본을 뒤적이는 것도 진정한 향수享受가 된다.

베이징의 도시 면모는 진보적이기도 하고 퇴보적이기도 하다. 진보적인 것은 물질상의 건설, 이를테면 신작로나 인도를 넓히고 포장하는 것이라면, 퇴보적인 것은 베이징 특유의 정조와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고 퇴색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물은 변하지 않는 게 없으니 베이징이라고 어찌 예외가 될쏘냐?

(『문학의 베이징』에서 가려 뽑음. 원래는 『중국현대문학대계』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