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탈각법剝筍脫殼法
【정의】
‘박순탈각법’은 ‘죽순을 벗겨나간다’는 뜻이다. 작자가 인물의 내적 세계를 펼쳐 보이고 인물들 사이의 복잡한 모순의 충돌을 드러낼 때, 한꺼번에 남김없이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절이 한 층 한 층 쌓여감에 따라 죽순을 벗겨내듯 한 층 한 층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박순탈각법’으로 인물 형상을 빚어내다 보면 인물 성격의 특징이 표면에 머물고 단일하게 되는 것을 피하고. 인물의 내적 세계와 복잡한 사회 생활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물 묘사가 더욱 높고 깊은 심미적 차원에 이르게 된다.
【실례】
정절의 축적에 따라 인물의 내적 세계가 확장되는 예로는 《홍루몽》의 왕시펑王熙鳳을 들 수 있다. 그녀는 처음에는 아름답고 총명한 귀부인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독살스럽고 권력을 휘두르는 면모가 드러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겉으로는 불같고, 속으로는 한 자루의 칼 같은明是一盆火, 暗是一把刀” 성격으로 변화한다.
인물들 사이의 모순 충돌이 드러나는 예로는 《수호전》의 린충林冲을 들 수 있다. 린충이 죄를 짓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처음 량산보梁山泊에 들어갔을 때 량산보의 주인은 왕룬王倫이었다. 그러나 왕룬은 영웅 호걸을 받아들일 만한 배포가 애당초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린충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는 풀어낼 길 없는 모순이 쌓여간다. 나중에 차오가이晁蓋 등이 ‘생신강生辰綱’을 겁탈하고 량산보에 들어오려 하자 왕룬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때 린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왕룬을 죽임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모순이 해소된다.
《요재지이》의 「훠 씨 녀霍女」에서의 주인공인 훠 씨는 처음에는 부유하지만 인색하고 호색한인 주다싱朱大興을 몰락시키는 요부로 나온다. 반전은 그랬던 그녀가 가난하기 짝이 없는 황생에게 시집가면서 일어난다. 비단옷이 아니면 걸치지 않고 별미 요리라야 입을 댔던 그녀가 한 순간에 돌변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고달픈 집안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는데, 노고가 죽은 황생의 전처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은 면모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렇게 현모양처로 돌변했던 훠 씨가 이번에는 강가에 대놓은 배 위에서 자신의 미모에 홀린 거상의 아들에게 자신을 팔라는 제안을 한다. 이 무슨 황당한 제안인가 싶어 동의하지 않는 황생에게 훠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뱃사공의 마누라를 통해 거래를 성사시키고 황생을 떠나간다. 그 모습에는 “아쉽다거나 서운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의 돌연한 이별에 “황생은 놀라 혼이 달아나는 것 같았고 목이 메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은 아내를 잃고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황생의 앞에 훠 씨가 다시 나타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녀는 “평생토록 인색한 자를 만나면 파산시키고 사악한 자와 부딪히면 골탕 먹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예문】
주다싱朱大興은 장더푸彰德府 사람이다. 집안 형편은 부유했지만 성질이 인색하기 짝이 없어 자식들의 혼인날이 아니면 손님을 부르지 않았고 부엌에선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됨이 경망스럽고 여색을 밝혀 어디에 예쁜 여자가 있다는 정보만 들으면 제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담장을 뛰어넘어 마을을 빠져나간 뒤 행실이 헤픈 여자들과 어울려 잠을 자곤 했다.
어느 날 주다싱은 우연히 혼자 길을 가는 젊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는 여자가 도망꾼임을 알아챘고 그녀에게 위협을 가해 억지로 집에 데려왔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자는 스스로를 훠 씨霍氏라고 소개했다. 주다싱은 좀더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쏘아붙였다.
“기왕에 저를 거두기로 작정했다면 뭘 그렇게 꼬치꼬치 알려고 하시죠? 무슨 일에 연루될까 걱정이시라면 저를 일찌감치 내보내면 되잖아요.”
주다싱은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자를 집에 머물게 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런데 훠 씨는 거친 식사는 입에 대지도 못했고 고깃국조차 마다하는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반드시 제비집이나 닭의 염통, 물고기의 이리 같은 별미 요리가 상에 올라야만 수저를 들었다. 주다싱도 별 수가 없어 갖은 정성을 다해 그녀를 받들어 모실 뿐이었다. 게다가 훠 씨는 또 병치레마저 잦아 날마다 인삼탕 한 사발씩을 들이켜야만 했다. 주다싱은 처음에는 그런 요구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숨마저 거의 넘어갈 지경이 되자 어쩔 도리가 없어 인삼탕을 대령하고 말았다. 훠 씨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이로부터는 인삼탕 수발이 일상사가 되었다.
훠 씨는 반드시 수놓은 비단옷만 몸에 걸쳤는데 며칠이 지나면 곧 싫증을 내며 벗어 던지곤 했다. 이런 식으로 달포가 지난 뒤 그녀에게 드는 비용을 합산했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주다싱도 차츰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훠 씨가 울면서 떠나겠다고 말하자, 그는 덜컥 겁이 나서 마지못해 요구를 다시 받아들였다.
훠 씨는 또 답답하고 심정이 울적하다는 핑계로 십여 일에 한 번씩은 광대들을 초빙하여 놀이마당을 벌였다. 연극이 상연될 때는 주다싱도 여자들이 앉아 있는 주렴 바깥쪽에 야트막한 의자를 놓고 아이를 안은 채 공연을 관람했다. 하지만 훠 씨는 연극을 보면서도 즐거운 기색이 전혀 없었고 몇 차례나 주다싱에게 욕설을 퍼붓곤 하였다. 주다싱은 이런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재간이 없었다.
2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집안은 차츰 몰락해 갔다. 주다싱은 훠 씨에게 간곡한 어조로 사정을 설명하고 소비를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이를 허락하고 씀씀이를 절반으로 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자 훠 씨는 고깃국에도 만족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녀는 차츰 맛없는 싸구려 반찬에도 견딜 정도가 되었다. 주다싱은 그녀의 이런 변화에 대해 내심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녀가 후문을 통해 갑자기 도망가고 말았다. 주다싱은 실성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사방을 찾아 헤매다 결국 훠 씨가 이웃 마을의 허 씨何氏 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허 씨네는 그 지방의 호족으로 대대로 권세를 누려온 명문가였다. 집주인 허 영감은 사람됨이 호탕하고 손님을 좋아해 날마다 새벽까지 등불을 훤히 밝혀놓을 정도였다. 하루는 웬 미녀가 한밤중에 갑자기 그의 침실로 찾아들었다. 정체를 추궁하는 허 영감에서 그녀는 자신을 주다싱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첩이라고 소개했다. 허 영감은 평소 주다싱의 인물 됨됨이를 경멸하던 터였고, 또 여자의 미모가 몹시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며칠을 뒤엉켜 지내는 사이 그는 여자에게 더 한층 빠져들었다. 허 영감도 결국은 주다싱과 마찬가지로 훠 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진귀한 것이라도 몽땅 구해다 바치면서 온갖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주다싱은 훠 씨의 소식을 듣자 허 영감에게 여자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허 영감이 요구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그는 관가에 소송을 걸었다. 관청에서는 훠 씨의 성명이나 내력이 불분명했기에 한 켠에 치워두고 심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주다싱은 재산을 팔아 위아래로 뇌물을 먹였고 관가에서는 그제서야 관계자들을 출두시켜 심리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무렵 훠 씨는 허 영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주다싱의 집에 있었다지만 정식으로 예물을 주고받으며 혼인을 정한 사이가 아닙니다. 왜 그를 두려워하시죠?”
허 영감은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고 당장 관청에 출두하여 주다싱과의 대질심문에 응하려고 작정했다. 그런데 허 영감의 집에 머물던 식객 한 명이 그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도망자를 받아들이는 짓은 이미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힌 행위입니다. 게다가 이 여인이 집안에 들어온 이래 날마다 지출이 끝간 데가 없이 늘어나고 있어요. 아무리 천금의 돈을 쌓아놓은 집일망정 어찌 살림이 거덜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 영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오각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소송을 중지시키고 훠 씨를 주다싱의 집으로 되돌려보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는 사이 여자는 또다시 도망가고 말았다.
황생黃生은 원래가 빈한한 선비로서 배우자도 없는 불쌍한 홀아비 신세였다. 훠 씨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대문을 두드린 뒤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황생은 미모의 여인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자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는 본디 준법 정신이 투철한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한사코 그녀를 물리치며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훠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훠 씨의 미모와 유순한 자태는 황생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도 마침내 여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가난한 살림을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뭇 염려가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훠 씨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고달픈 집안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는데, 노고가 죽은 황생의 전처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
양저우揚州 경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배를 빌려 강가에 정박시켰다. 그때 훠 씨는 선창에 기대 바깥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거상의 아들이 그곳을 스쳐지나가다 그녀의 미모에 놀라 배의 방향을 튼 뒤 황생의 배 옆자리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황생은 이런 일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훠 씨가 갑자기 황생에게 말했다.
“당신의 집은 너무나 가난해요. 지금 저에게 가난을 물리칠 좋은 방법이 있는데, 제 말에 따르시겠어요?”
황생은 무슨 소리인지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저는 당신과 함께 몇 년을 살았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하나도 낳아드리지 못했어요.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답니다. 제가 비록 누추한 용모라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늙지 않았다는 사실이겠지요. 누구라도 천 냥의 돈을 당신에게 내민다면 저를 팔아 넘기세요. 그 천 냥 속에 아내도 있고 전답과 좋은 집도 다 마련되어 있답니다. 제 꾀가 어떠세요?”
황생이 얼굴빛까지 변하면서 뭐라 대답하지 못하자, 훠 씨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조급할 것 없어요. 이 세상에 미인이 얼마나 많은데 누가 저 같은 사람을 천 냥씩이나 주고 사겠어요? 그저 장난삼아 남들에게 농담을 던지고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 한번 보려는 것뿐이랍니다. 팔고 말고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 아니겠어요?”
황생은 그래도 동의하지 않았다. 훠 씨가 앞장서서 뱃사공의 마누라에게 그 말을 건네자 사공의 마누라는 황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황생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응한다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뒤에 되돌아와 보고했다.
“이웃 배에 계신 거상의 아드님이 팔백 냥을 내겠답니다.”
황생은 짐짓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안 된다고 거절했다. 사공의 마누라는 얼마 뒤 다시 나타나더니 상대방도 그가 요구하는 액수에 동의했다고 전하면서 당장 그 배로 건너가 돈과 사람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
그가 막 자기 배로 돈을 옮겨오는 사이, 훠 씨는 벌써 사공의 마누라를 따라 배의 고물에서 저쪽 배로 옮겨 타고 있었다. 그녀는 멀찍이서 고개를 들어 황생을 보더니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는데 아쉽다거나 서운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생은 놀라 혼이 달아나는 것 같았고 목이 메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상인의 배는 닻줄을 풀더니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떠나갔다. 황생은 그제야 대성통곡하면서 뱃사공에게 그 배를 추격해 가까이 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사공은 그의 말에 따르지 않고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강을 건너가는 것이었다. 배는 순식간에 전쟝鎭江에 닿았다. 황생이 짐을 육지로 옮겨 부리자, 사공은 일이 급하다는 핑계를 대로 서둘러 배를 몰아 그곳을 떠나갔다.
황생은 보따리 곁에서 울적한 심정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처도 없는 신세였다. 그저 도도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노라니 무수한 화살촉에 심장이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쓰라릴 뿐이었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삼키고 있을 즈음, 문득 누군가의 애교 넘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서방님.”
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니 훠 씨가 벌써 저만큼 앞서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황생은 기쁨에 겨우 얼른 보따리를 둘러메고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
“당신,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요?”
훠 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금만 더 늦어지면 당신의 의심을 살 거라는 걸 알았죠.”
황생은 그제야 훠 씨가 보통 여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어 이것저것 캐묻고 나서는 그에게 훠 씨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저는 평생토록 인색한 자를 만나면 파산시키고 사악한 자와 부딪히면 골탕 먹이며 살아왔습니다.……”
…… ( 《요재지이》 「훠 씨 녀霍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