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24 사막 폐허의 고성

사막 폐허의 고성 – 정지된 성벽에 울리는 아름다운 <뮬란>의 노래

지상의 모든 것을 티끌로 분해시킬 것 같은 강렬한 사막의 태양. 지붕은 이미 없어졌고 담장은 부서졌고 모서리는 깎여나간 채 인적 하나 없이 말라버린 도시. 광장과 길만 겨우 알아볼 뿐 집과 절은 녹아내린 듯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고대 건축의 공동묘지. 시간을 정지시키고 고대 문명을 거대한 박제로 만들어버린 열풍. 경이와 신비로 보는 이들의 호흡을 멈추게 할 것 같은 사막 한복판 폐허의 도시 박물관.

폐허, 그것도 700년이 넘는 폐허는 아주 희귀하다. 건축물은 사람이 살면 개축과 중수를 거듭하고, 사람이 떠나면 비바람이 삭혀버리는 탓에 폐허 자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10년, 100년도 아니고 700년을 폐허로 남아 있다는 것은 문명의 거대한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감에 빠지게 한다.

이런 폐허는 주로 사막에서 발견된다. 수백 년을 폐허 그대로 남아 있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살아야 하고, 그 사람들이 일시에 떠나야 하고,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사람도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풍화와 침식을 오랫동안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사막이 이런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곳이다.

사막은 농경과 목축만으로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일찍이 교역이 발달했다. 교역의 징검다리인 오아시스에는 도시국가와 같은 정주定住문화가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전란과 같은 정치적 요인 또는 오아시스의 쇠퇴와 같은 기후나 지리의 변화가 도시의 생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 도시 전체가 일시에 이동하기도 한다. 그 위에 건조한 기후가 제습기 역할을 해서 건축물들을 보존하면 수백 년이 넘는 폐허가 남게 되는 것이다. 카이로 인근 사막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그렇고,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의 광활한 평원 위에 있는 우르의 지구라트가 그렇다.

중국에서는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의 사막에서 미라가 종종 발굴되는데, 도시 전체가 미라처럼 남아 있기도 하니 투루판吐鲁番의 자허고성交河故城이 대표적이다.

자허고성은 투루판 시내에서 서쪽 10km 거리에 있는데, 위성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개의 하천으로 교차하면서 둘러싼 섬과 같아 자허라는 별칭이 붙었다. 하늘에서 보면 커다란 버드나무 잎사귀이고, 옆에서 보면 30m 절벽 위에 평지가 펼쳐진 탁상지卓狀地다. 그러나 하천과 천변(위 좌측 사진)만 푹 꺼진 저지대일 뿐 하천의 안쪽인 자허고성과 하천의 바깥은 지표의 높이가 비슷한 특이한 지형이다.

이런 지형 탓에 자허고성은 일반적인 성과는 다르다. 탁상지 둘레의 절벽이 높아 별도의 성벽이 필요 없고, 자연하천이 감싸고 있으니 인공 해자가 없다. 하천에서 식수를 조달하기도 쉽고, 밖에서는 성안을 들여다보기 어렵고 성안에서는 바깥을 감시하기 쉬우니 방어에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자허고성은 남문(위 우측 사진)으로 들어간다. 비탈길을 따라 남문을 통과하여 탁상지의 상단에 도달하면 바로 폐허의 고성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모든 것이 건축물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허물어지고 녹아내리고 부식되고……. 각양각색의 건축물 잔해는 거대한 야외 조각전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흙이다. 흙을 다지거나 흙벽돌을 쌓아 또는 지반을 깎아 만든 담장과 벽체만이 남아 있다. 온통 흙의 세상, 흙의 도시다. 목재도 일부 있었으나 수백 년간 풍화되면서 흙만 남은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크고,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생토건축生土建築 도시가 되었다.

고성은 남북으로 길이 1650m, 남북 양 끝은 좁고 중간은 폭 300m 정도다. 면적이 47만 k㎡이니 여의도공원의 두 배 정도. 크게 보면 세 구역으로 나뉜다. 폭 10m, 동서 350m의 남북대로(위 좌측 하단 사진)가 동서 두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대로 북쪽에는 커다란 불교 사원과 부속 건물들이 사원 구역을 이룬다. 자허고성은 불교가 중원으로 전파되는 통로였고 이곳에서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것이다. 성 북쪽에도 101개의 불탑이 있다.

남북대로의 서쪽에는 방직·양조·제화 등의 수공업 공장이 모여 있고, 동쪽은 군영과 민가 구역이다. 통로는 남문과 동문 두 개인데 남문이 주 출입구다. 하천에서 30m 절벽 위의 탁상지로 오르내리는 경사로를 내고 초소를 만든 탓에 일반적인 성문과는 다르다. 동문은 30m 절벽 위에 있는데 식수를 조달하는 통로다.

인공으로 만든 성벽과 해자가 없다는 것 외에 정말 신기한 것은 땅을 파내어 담장을 만드는 감지유장減地留墻이란 건축방식이다. 이것은 지표면에서부터 땅을 파 내려가 군용 참호처럼 좁고 길고 깊은 골목을 만든 다음, 옆으로 파 들어가 동굴집窯洞을 내거나 가운데 마당이 하늘로 뚫린 천정이 있는 주택을 짓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건축은 벽체를 올리고 지붕을 얹지만 감지유장은 두꺼운 벽체가 남도록 흙을 파내는 것이다. 지반 자체가 모래가 굳은 것이라 파내기도 수월하고, 파내고 남은 부분이 견고하니 이 역시 인지제의因地制宜의 훌륭한 사례다.

벽체는 1m 안팎으로 두껍기 때문에 영상 40∼50도의 여름 더위는 물론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겨울 추위도 잘 막아준다. 동아시아 북방에서 주로 발견되는 온돌 구조가 발견되기도 한다. 겨울에 추위가 심하기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로 쪽으로는 문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나라 장안성이 바둑판 형태의 방坊이라는 구역으로 나눠 각 구역을 폐쇄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으로 배치한 것과 유사하다. 몇 가구가 하나의 기능적인 블록, 즉 방곡坊曲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대로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 다음 다시 방곡으로 들어가야 가구별 출입구가 나오게 된다. 자허고성에 남아 있는 건축은 당나라 시대에 대폭 개축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허고성을 걸으면 건축보다는 그 역사의 속내에 신비감과 의구심이 더 강렬해진다. 과연 이 고성은 언제부터 어떻게 살다가, 왜 사라졌고, 어떻게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일까.

자허고성에는 실크로드와 폐허의 역사가 함께 담겨 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시안西安에서 간쑤성의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거쳐 신장성을 통과해 중앙아시아로 이어진다. 실크로드는 톈산天山산맥 남북으로 갈라지는데, 투루판은 북로의 길목이다. 자허고성이 바로 이곳이다.

사막에서는 오아시스에 사람이 모인다. 오아시스에서는 농촌의 촌락이나 유목의 이동식 주택과는 달리 처음부터 바로 도시 형태가 나타난다. 사막의 도시 오아시스는 넓은 사막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으로 연결되어 광대한 사막을 망라하게 된다.

고대 서역의 사막에는 오아시스의 도시국가들이 생겨나 선으로 연결되어 사막의 주인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이 도시들을 서역 36국이라 칭한다. 그중 하나가 차사전국車師前國이었는데 자허고성이 차사전국의 수도였다. 그러니 자허고성은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자허고성은 BC 2세기에서 AD 5세기까지 차사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였다. AD 499년에는 고창국高昌國에 귀속되어 고창국의 왕자가 다스리는 제2의 도시가 되었다. 이 고창국의 왕조는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자허현이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중원에서 서역으로 빠져나가는 전략 요충지였지 때문에 중원과 북방 유목민 사이에 수없는 전쟁이 이어지던 곳이다. 한나라 무제부터 선제까지는 오쟁차사五爭車師라고 하는 흉노와의 격렬한 장기전도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의 운명과 같았다. 그러다 보니 흉노와 한나라가 장기적인 남북전쟁 끝에 양쪽 모두 망한 이후의 남북조 시대가 되자 자허고성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이런 번영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문명을 적극적으로 교류하게 했던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실크로드가 활성화되면서 자허고성에는 동서의 많은 민족과 문화, 종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성의 고대 주인이었던 차사인은 물론 한족, 흉노, 선비, 돌궐, 티베트, 위구르, 몽골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을 거쳐 갔던 많은 민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종교로 보더라도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 경교, 도교,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가히 문화 다양성의 박물관 같았던 곳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거기까지였다. 당나라가 기울고 돌궐이 흥성하는 등 세계 권력의 교체기에 들어서자 사정은 달라졌다. 9세기부터 이 지역에 불붙은 전란은 들불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당나라가 망하고 북방의 요나라가 남방의 송나라를 압박하는 형세였다가,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침몰당하자 그 잔존 세력 일부가 신장 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서요西遼를 세워 휩쓸고 지나갔다.

다시 티베트 고원에서 들어온 탕구트족이 서하西夏를 세워 간쑤성과 닝샤지역을 장악하면서 또 한 번 권력의 손바뀜이 있었다. 13세기 초에는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선포한 다음 이 지역은 몽골의 세력권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위구르족은 몽골고원의 정세 변화를 빠르게 읽고는 자발적으로 칭기즈 칸에게 복속하여 가장 충성스러운 신민이 되었다. 몽골제국에서 색목인色目人이라 하여 몽골족 다음으로 우대받는 민족이 바로 위구르족이었다.

그러나 14세기에 몽골 귀족 하이두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과 진압군의 잔혹한 전쟁 통에 자허고성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몽골 지도자들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 기존의 불교를 포기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토록 핍박하는 바람에 더 엄중한 타격을 입었다.

결국 1500년을 이어오던 자허고성은 숨 막히는 사막의 열기와 피비린내 나는 전란 속에 막을 내렸고, 투루판 분지의 중심은 현재의 투루판 시내로 옮겨 갔다.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자허고성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의 고성으로 모래바람을 맞고 있었을 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아주 낯선 이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였다. 제국주의의 선두는 정탐꾼과 학자와 선교사들이었다. 역사학과 고고학으로 무장한 자칭 탐험가들은 주인이 돌보지 못한 문화유물을 마구잡이로 파가는 문명의 도굴꾼이었다. 20세기 초에 독일, 일본, 영국의 탐험대가 자허고성을 대대적으로 도굴했다. 그들은 수없이 출토된 신비로운 동양의 유물을 서양의 귀족들에게 고급 장식품으로 팔아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도굴을 통해 자허고성의 존재가 서양은 물론 중국에도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28년 중국인 고고학자 황원비黄文弼가 수차례 발굴한 이후다. 신중국이 들어선 이후 1956년부터 신장 문물국에서 그 역사 가치를 재인식하고 보호와 연구를 해오고 있다.

21세기, 이제는 국내외 여행객들이 폐허의 고성에서 역사와 건축의 잔해 사이를 걷는다. 자허고성에는 소박한 민가나 화려한 궁전, 웅장한 사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그 무엇이 있다. 폐허가 되었지만 음습하지 않고, 인적은 없으나 신비함이 있고, 도시는 정지했으나 시간은 흐르고, 문명은 박제되었으나 역사는 오늘에 닿아 있다. 폐허를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폐허의 고성에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도 있다. 미국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Mulan>(1998)의 원전인 중국의 〈목란시木蘭詩〉를 통해 1500년 전 통만성统萬城에 살았던 당시 백성들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다.

섬서성 북서부 네이멍구자치구와의 경계 지역에 있는 징볜현靖边县에는 마오우쑤毛乌素라는 사막(위 좌측 사진의 왼쪽 부분)이 있다. 이 사막에는 통만성이라는 토성의 폐허가 있다. 높이 40m나 되는 거대한 돈대(위 좌측 사진의 오른쪽 부분)가 1000년이 넘는 풍화와 침식을 견디어 남아 있고, 동서남북 사면의 성벽과 성문의 흔적도 선명하다.

지금도 애니메이션 〈뮬란〉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눈동자가 까만, 당차기도 하고 다소곳하기도 한 중국인 처녀 뮬란이 주인공이다. 뮬란은 다리가 아픈 아버지가 출병 명령을 받자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 몰래 출병 대열에 끼어든다. 남장의 처녀 몸으로 어설픈 신참 병사였으나 조상신의 도움으로 훈족 군대의 기습을 저지하고, 궁에 침투해 황제를 억류한 훈족 대장 일당까지 물리친다. 뮬란은 이런 와중에 자신의 지휘관인 젊은 샹을 연모하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종국에는 황제 눈앞에서 공을 세우고, 뮬란은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연모하던 샹이 그녀의 고향으로 찾아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뮬란의 원래 중국어는 목란木蘭이고 외래어 표기법대로 하면 무란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중국어 발음의 로마자 표기인 mulan이 제목이 되었고,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뮬란’이라고 번역한 탓에 목란 또는 무란이 아닌 뮬란이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고대문학은 ‘목란’으로, 애니메이션은 ‘뮬란’으로 표기한다.

목란은 〈목란시〉라는 중국 고대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이 시의 가장 오래된 출처는 송대의 악부시집樂府詩集과 동시대에 편집된 문원영화文苑英華다. 애니메이션 〈뮬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대신해서 출병한 처녀의 이야기다. 우선 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목란시木蘭詩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목란이 베를 짜네
베틀의 북소리가 그치더니 여인네 한숨 소리뿐
누굴 그리는가 누굴 생각하나 물어보니
그리운 사람도 없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오
어젯밤 군첩을 보았는데 가한이 대군을 모은다네
군서 열두 권에 아비의 이름도 들어 있소
아비는 아들이 없고 목란은 오라비가 없소
바라건대 안장과 말을 갖춰 아비 대신 나서리다
동시에서 말을 사고 서시에서 안장 맞춰
남시에서 고삐 사고 북시에서 채찍 구해
아침에 부모님께 하직하니 저녁엔 황하에 묵네
부모님이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라곤 황하의 거친 물소리뿐
아침에 황하를 건너 저녁엔 흑산 입구에 닿고
부모님이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라곤 연산호의 말 울음소리
만리 멀리 전장에 나가 관문의 산을 날듯이 넘고
삭풍에 쇠딱따기 소리 들려오고 차가운 달빛은 갑옷을 비추네
장군은 백전 끝에 전사했고 목란은 10년 만에 돌아오네
돌아와 천자를 배알하니
천자는 명당에 앉아 공훈을 두루 살펴 큰 상을 내려주네
가한이 소망을 묻거늘, 목란은 상서랑도 싫소
원컨대 천리마를 빌려주어 고향으로 보내주오
부모님이 딸자식 소식 듣고 성 밖에서 맞이하고
언니는 동생 소식 듣고 집안에서 단장하고
동생은 누이 소식 듣고 칼을 갈아 양을 잡네
동각 문을 열고 서각 침상에 앉아
전포를 벗어 놓고 옛 치마 다시 입고
창문을 마주하여 머리 빗고 거울을 보고 화장하네
다시 나가 둘러보니 전우들 놀라하되
열두 해를 다녔건만 여자인 줄 몰랐도다
수토끼는 뛰어오르고 암토끼는 눈알이 휘둥그레 하지만
둘이 함께 달렸으니 뉘라서 암수를 가릴손가
唧唧復唧唧木蘭當戶織
不聞機杼聲 唯聞女嘆息
問女何所思 問女何所憶
女亦無所思 女亦無所憶
昨夜見軍帖 可汗大點兵
軍書十二卷 卷卷有爺名
阿爺無大兒 木蘭無長兄
願為市鞍馬 從此替爺征
東市買駿馬 西市買鞍韉
南市買轡頭 北市買長鞭
旦辭爺孃去 暮宿黃河邊
不聞爺孃喚女聲
但聞黃河流水…鳴濺濺
旦辭黃河去 暮至黑山頭
不聞爺孃喚女聲
但聞燕山胡騎聲啾啾
萬里赴戎機 關山渡若飛
朔氣傳金柝 寒光照鐵衣
將軍百戰死 壯士十年歸
歸來見天子 天子坐明堂
策勳十二轉 賞賜百千強
可汗問所欲 木蘭不用尚書郎
願借明駝千里足 送兒還故鄉
爺孃聞女來 出郭相扶將
阿姐聞妹…來 當戶理紅妝
阿弟聞姐來 磨刀霍霍向豬羊
開我東閣門 坐我西閣床
脫我戰時袍 著我舊時裳
當窗理雲鬢 對鏡貼花黃
出門見伙伴 伙伴皆驚惶
同行十二年 不知木蘭是女郎
雄兔腳撲朔 雌兔眼迷離
兩兔傍地走 安能辨我是雄雌

아비의 출병을 걱정하는 딸자식의 깊은 한숨 소리에서 시작하는 순박한 백성의 애틋한 노래다. 그러나 한숨에 매몰되지 않고 당차게 일어나 처녀의 몸으로 출병하는 강인한 북방 여인네의 용기가 빛난다.

전장에서의 고초가 차가운 달빛으로 처연하게 묘사되기도 하고, 적군의 말발굽 소리가 치열한 전투를 전해주기도 한다. 황하에서 흑산까지 수많은 전투가 이어지고 백전 끝에 누군가는 전사했고 주인공은 승전을 이루고 생환한다. 황제는 상서랑이라는 관직을 수여하지만 당사자 목란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대목이 안쓰럽기만 하다.

전쟁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백성들의 소박한 염원이 눈물겹다. 집에서는 잔치를 벌여 축하하는데, 군포를 벗고 여자의 행색으로 돌아오는 극적인 반전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영웅이라고 하기엔 소박함이 애잔하고, 남장한 여전사이기에 10여 년의 긴 전쟁이 안쓰럽다. 가족과 함께 서로 위하며 살고 싶은 백성들의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절절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노래다. 이런 서사시의 주인공인 목란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란시〉는 문학작품이다. 목란이란 인물은 중국의 정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누구나 좋아하는 전설과 문학의 주인공이다. 전통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나 소설은 물론 TV 드라마나 영화 등 수없이 많은 작품으로 재탄생하곤 했다.

그러나 목란이 누구인지, 어느 시대 어떤 전쟁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학술적인 연구 이외에 일방적인 짝사랑도 상당하다. 〈목란시〉가 민간에 퍼진 이후 그녀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안후이성 보저우, 섬서성 옌안, 후베이성 황피, 허베이성 웨이성 등이 있다. 성씨도 木, 花, 朱, 魏의 네 가지나 등장한다. 시대 역시 한대, 남북조, 수당 등 크게는 세 가지, 세부적으로는 여덟 가지 설이 있다.

서사시에는 역사적 사실 또는 그와 유사한 상황을 보여주는 기실記實이 있기 마련인데, 기실을 잘 꿰어보면 그것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분간해낼 수도 있다. 미로를 헤쳐 가는 스무고개다.

필자는 목란이 살던 시대와 마을을 찾아가기 위해 박한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연구논문과 저술을 빌리려고 한다. 박한제 교수는 7년을 넘긴 필자의 중국 기행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술가다. 중국 위진남북조와 수당 역사의 연구업적이 많아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널리 존경받는 원로 사학자다.

우선 위에 나열한 목란에 대한 중국 각 지방의 짝사랑은 대부분 민간의 지방주의의 산물이라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박한제 교수의 지적이다. 목란에 대한 박한제 교수의 논증을 요약하여 살을 붙이면 다음과 같다.

〈목란시〉의 배경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있었던 북위와 유연의 전쟁이다. 탁발선비는 몽골고원 동북부에서 서남으로 이동하여 북위北魏를 세워 북방의 패권을 장악했다. 북위의 황제들은 호한융합胡漢融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가한可汗, 즉 칸이라는 북방 유목민의 칭호와 천자天子라는 중원의 칭호를 함께 쓰곤 했다.

유연柔然은 탁발선비가 비우고 떠난 몽골고원의 새 강자로 떠올랐다. 유연이 485년 북위를 침입해 전쟁이 시작됐고, 북위 원정군이 492년 유연의 군대를 궤멸시키면서 끝났다. 목란이 저녁에 묵었다는 흑산은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와 황하 사이의 운중雲…中이다. 목란이 맞닥뜨린 적군은 연산호燕山胡인데, 연산호의 연산은 몽골공화국 툴라강 근처의 항가이산이고,연산의 호胡가 바로 유연이다.

목란이 귀환한 곳은 당시 북위의 수도였던 평성平城, 지금의 산시성 다퉁大同이다. 평성의 궁성에 입궐하여 491년 10월에 완공된 명당明堂에 앉은 북위 효문제를 배알했다. 그 시기는 최후의 승리를 거둔 492년부터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 10월 이전이다.

목란이 공훈을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직위는 중대장 또는 그 이상의 지휘관이다. 당시의 북위는 여국女國이라고 불릴 만큼 여성의 정치군사 참여가 강했던 것도 연관이 있다. 목란 일가는 병적에 등재된 병호兵戶였고, 가족 가운데 1인이 의무적으로 출병해야 했기 때문에 목란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한 것이다.

목란 일가는 북위의 병호제兵戶制에 따라 군대와 함께 성안에 거주했고, 출병할 때 성안에 있는 동서남북의 시장에서 장비를 갖춘 것이다.

목란이 베도 짜고 말도 탔다는 것은 농경과 유목 문화가 융합된 사회에 살았다는 뜻이지만, 전쟁에 나갈 정도로 말을 잘 탔으니 북방 유목민의 집안이다. 따라서 목란 일가가 실존했다면 통만성이다. 통만성은 5호16국 시대에 흉노의 혁련발발赫连勃勃이 세운 하夏나라의 도성으로서, 413년 축성했으나 427년 북위가 점령해서 통만진을 설치했다.

애니메이션 〈뮬란〉은 목란이란 캐릭터를 차용해서 새롭게 구성한 제3의 작품이지만, 〈목란시〉 원문과 역사의 상식에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뮬란>에서 훈족이 설산을 넘어서자 바로 황성이 나오는데, 그것은 목란 이후 1000년이 지난 다음에 지어진 베이징의 자금성과 흡사하다. <뮬란>에서는 북에서 쳐들어온 적군을 훈족이라고 했는데, 훈족은 흉노의 일파가 중앙아시아를 건너 유럽까지 이동하면서 현지인들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민족으로, 유럽에서의 호칭이다. 목란의 시대와는 거의 1000년 후의 중국을 무대로 한 것도, <뮬란>에 유럽의 훈족이 등장한 것도 좀 황당한 일이다.

애니메이션 도입부에 멋지게 등장하는 장성은 명대에 축성된 만리장성으로 보인다. 900여 년 후의 명대 장성을 가불해온 셈이다.

목란이 연모하는 씩씩하고 멋진 젊은 장수 샹은 애당초 〈목란시〉에서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뮬란>의 도입부에 묘사된 매파 이야기 역시 북방 유목문화가 주도하는 사회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투에서 등장하는 대포나 폭약 역시 화약이 발명되기 이전이니 역사학에 비춰보면 황당한 소품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목란시〉가 당시 시대상을 그린 서사시인 반면, 애니메이션 <뮬란>은 완전한 허구다.

통만성은 몇 가지 특징이 돋보인다. 중국 대부분의 성은 남향인데 통만성은 동향이다. 북방 유목민들이 해 뜨는 동쪽을 숭상한 데서 비롯된 특징인 것 같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성벽의 견고함이다. 성벽은 점토와 석회를 섞고 찹쌀 물을 푼 다음 열기로 찌는 증토법蒸土法을 사용했다고 한다. 성벽을 검수할 때에 송곳으로 찔러 송곳이 한 치 이상 박히면 성을 쌓은 자를 처형하고, 송곳이 안 들어가면 송곳 만든 자를 죽일 정도로 혹독했다고 전해진다. 목란의 일가가 겪는 전쟁 통의 생활사와 함께 당시 백성들의 삶의 단면을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통만성에서 민가의 직접적인 흔적은 거의 찾기 어렵다. 단지 〈목란시〉나 성벽을 통해 통만성에 살던 백성들의 생활사를 일부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통만성 폐허에서 석양이 드리우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막의 장관이 펼쳐진다. 거대한 돈대 뒤로 붉은 하늘이 웅얼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목란시〉를 읊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