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21 윈난성 바이족·나시족 삼방일조벽

윈난성 바이족·나시족 삼방일조벽 – 화려한 겹처마 아래 아름다운 사람들

“큰 기와집에는 쫄쫄 굶고, 초가집에는 기름진 식탁大瓦房空腔腔, 茅草房油香香”이란 말이 있다. 번듯한 집에 비하면 주방에 먹을 것이 빈약하고, 식탁은 기름지지만 집은 허름하다는 말이다. 화려하고 멋진 바이족白族의 민가건축을 주변의 다른 소수민족들과 대비해서 묘사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컬러보다 화려한 순백의 담장이 눈길을 끈다. 가까이 다가서면 날렵하게 솟은 문루의 화려한 처마가 손님을 환영하고, 마당에 들어서면 큼지막한 꽃나무 화분이 반가이 인사를 하는 집. 화분 뒤로는 조벽照壁의 대리석 장식이 수묵 산수화보다 멋들어진 민가. 바로 바이족들의 전형적인 살림집 삼방일조벽三坊一照壁이다.

이번에는 화려하지만 경박스럽지 않고, 백성이 살지만 귀족의 품위가 느껴지는 바이족의 민가를 찾아가 그 안에 담긴 바이족의 문화를 더듬어보자.

윈난성 다리大理는 바이족 자치주다. 바이족이 오래도록 살아온 강역이 고 지금도 바이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다리의 고성뿐 아니라 바이족 전통의 염색으로 유명한 저우청周城이나 인근의 시저우喜州, 윈난 여행객들이라면 술 이름으로도 기억하는 허칭鹤庆 등도 모두 바이족 자치주에 속한다.

바이족은 오래전부터 ‘바이, 보’로 불렀고, 白(중국어 발음 ‘바이’)이나 (한자 독음은 ‘북’, 중국어 발음은 ‘보’)이라고 표기했었다. 그래서 이들의 고대 문자를 백문白文 또는 북문僰文이라 한다. 우리의 이두와 비슷하게 한자를 차용해 표기하는 방식이다. 이들 민족의 명칭은 신중국 이후 바이족으로 통일했는데, 발음의 유사성은 물론 흰색 옷을 좋아하고 전통 민가에서도 흰색의 벽이 특징적인 것을 반영한 것이다.

바이족의 연원은 몇 가지 학설이 있지만, 대개 북방이나 중원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동남아시아에서 윈난 남부를 거쳐 이동해 온 사람들이 이 지역에 서 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과 차단되면서 형성된 경우가 많은 편인데, 바이족은 그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어 형성된 것이 독특하다. 이들의 문화에서도 융합의 흔적을 적지 않게 느끼게 된다.

이들의 전통적인 살림집은 중원의 건축이 들어와 토착화한 것이다. 바이족의 민가는 삼방일조벽이 대부분이다. 기본적인 형태는 가운데 마당을 방과 담이 방형으로 둘러싸는 합원식이다. 좌우는 대칭이고, 외부로는 폐쇄적이고 안으로는 개방된 형태다. 층으로 된 세 칸짜리 한 채를 방坊이라고 한다. 삼방일조벽은 세 개의 방이 ㄷ자 형태로 자리를 잡고, 나머지 한쪽에 조벽이 있다는 뜻이다.

조벽은 기능적으로는 해가 반대편으로 넘어갔을 때 햇빛을 마당으로 반사시켜 준다. 그러나 단순한 담벼락이 아닌, 바이족 건축문화의 주요한 특징이다. 조벽은 상단에 기와지붕을 얹고 지붕 아래 공포栱包 부분을 화려하게 장식까지 하는 바이족의 건축적 상징물이다.

조벽의 상단뿐 아니라 안팎의 벽면 역시 정말 멋지다. 바깥쪽의 흰색 벽면은 눈이 부실 정도다. 벽에는 경구나 산수나 화조와 같은 길상물들을 날렵한 필치로 그려 넣는다(맨 위 사진). 마당 쪽 벽면은 수묵화를 새겨 넣은 듯한 자연산 대리석 석판으로 멋지게 장식한다(위 우측 사진). 잘 알다시피 대리석大理石의 대리가 바로 이곳의 지명이다. 이 지역에서 고급 대리석이 많이 생산된 탓에 멋진 대리석 석판이 집집마다 조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벽 앞에는 크고 작은 화분을 놓아 화원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문 역시 바이족 민가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대문의 문루는 기와지붕을 얹는데 처마가 겹으로 되어 있고, 지붕과 기둥 사이의 공포 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한다(위 좌측 사진). 대문은 동북쪽 모서리의 천정 바깥쪽에 설치한다.

문이 열려 있어도 대문 밖에서 마당 안쪽을 볼 수 없다. 바이족이라 하면 다리의 고성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지만, 다리의 고성은 이미 시끌벅적한 관광지로 완전히 변신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관광지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바이족의 품위 있는 인문의 향기를 느껴보려면 고성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져 있는 시저우喜洲를 찾아갈 만하다.

시저우는 희주방喜洲幇이라고 하는 이 지방 출신의 전통적인 상인집단으로 유명하다. 윈난의 소수민족 가운데 바이족은 잘사는 민족이다. 상방商幇을 중심으로 외지와의 교류에 밝았고 부자가 많은 탓에 건축에서도 대원이 많았다.

지금도 20세기 전반인 중화민국 시대는 물론 청대와 명대의 민간건축이 잘 남아 있다. 명대 양사운의 칠척서루七尺書樓, 청대 양원楊源과 조정준趙廷俊의 대원, 민국시대 옌쯔전严子珍과 양핀샹杨品相의 대원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차마고도를 중심으로 장사하던 바이족들은 19~20세기에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외국으로 나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윈난성에서 화교로 진출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곳이 바로 시저우였다. 이들 시저우 출신 화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서양 건축의 외양을 모방하여 지은 집들도 찾아볼 수 있다. 광둥성의 화교들이 지은 조루와 같은 맥락이다. 시저우 마을 동쪽의 동안문東安門 부근에서는 광둥성의 조루나 상하이의 석고문 주택과 비슷한 서양식 문양의 대문(위 우측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런데 바이족의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와의 묘한 인연이 가늘지만 깊게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족칭 그대로 흰 옷을 즐겨 입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백의민족이라고 하는데, 바이족과 문자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혼인 습속에서도 청춘남녀의 연애가 자유로운 편이고, 데릴사위 제도와 형사취수 풍습이 있다.

바이족의 청춘남녀 교제는 꽤 자유로운 편이다. 삼월절三月節을 비롯한 여러 축제나 묘회廟會는 젊은 남녀가 만나 사귀고 교제하는 장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담소를 즐기는데, 노래를 한 소절씩 주고받기도 한다. 이것을 대가對歌라고 하는데, 바이족은 혼인의 과정이 대가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할 정도다.

심지어 란핑兰坪 일대의 바이족은 딸이 15∼16세가 되면 담장 바로 바깥에 독립된 방을 따로 지어주고 기거하게 한다. 처녀가 이 방으로 나와 기거하면 청년들이 혼자든 여럿이든 밤에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청춘남녀가 노래와 담소를 즐기면서 밤을 새우는데 해 뜨기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 물론 이 방에서 옷을 벗는 것은 금기다. 아무튼 자유로운 기풍을 보여주는 사례다.

동일한 맥락에서 남편과 사별한 여자는 혼자 살아도 되지만 개가도 자유롭다. 단지 개가하면서 재산을 가져갈 수는 없다. 그런데 재산을 유지하면서 개가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바로 남편의 동생에게 개가하는 것이다. 이런 혼인습속을 전방轉房이라고 부른다. 전형적인 형사취수다.

데릴사위도 호기심을 끈다. 이 지역에서는 췌서贅婿라고 하는데,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 사위를 아예 자식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한 가지다. 이 경우에는 성도 처가의 성으로 바꾸고 이름도 새로 지어 그 집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연로한 장인·장모를 부양해야 하고, 유산 상속권도 갖게 되고, 어린 처남·처제들도 결혼할 때까지 돌보게 된다. 호칭에서도 사위나 형부와 같은 말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영구적인 처가의 가족구성원이 되지 않고 일정 기간만 함께 살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들은 결혼할 의사가 분명하지만, 신부의 부모가 연로하고 처의 형제들이 아직 어린 탓에 신부가 출가할 형편이 못 되는 경우다.신랑이 혼례를 올리고 처가로 들어간 뒤 부부가 처가 가족을 부양하다가 처남·처제가 성장해 성인이 된 다음에 부인을 데리고 친가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혼인 풍속을 보면 북방의 문화가 흘러들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먀오족苗族 연구에서 김인희 전남대학교 교수가 밝혔듯이 고구려 유민들이 현지인들과 융합하면서 먀오족을 형성했다는 것과 중국 학자들이 바이족은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융합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그런 관념으로 바이족 살림집을 음미하다 보면 어쩐지 더 친숙해지는 느낌이다.

삼방일조벽은 바이족만의 살림집은 아니다. 리장丽江의 나시족纳西族 역시 삼방일조벽이 주를 이룬다. 중국인들이 가장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여행지는 윈난의 리장이다. 우리나라 여행객도 윈난 차마고도의 많은 옛 마을과 고성 가운데 리장을 첫손에 꼽는 사람들이 많다.

사방가 광장을 중심으로 네 갈래의 길이 방사선 형태로 퍼져나가고, 길바닥에 촘촘하게 박힌 매끈한 오화석五花石이 햇빛을 잘게 부숴 반사하는 고성.위룽설산玉龙雪山의 눈이 녹아 흘러내린 위하玉河의 맑은 물이 세 갈래로 갈라져 그물망처럼 흘러간다. 관아에서부터 상가, 살림집까지 오래된 건축물들이 토속적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켜 주는, 중국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고성의 하나가 바로 리장이다.

리장 시내의 고성은 집과 집, 골목과 골목 사이에 맑은 물이 시원스레 흘러서 동화 같은 낭만이 가득하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 길게 늘어진 수초와 상류로 헤엄쳐 올라가려는 듯 온종일 수고로이 헤엄치는 빨간 금붕어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이미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다. 국내외에서 모여든 배낭여행객도 많아 사람조차 볼거리가 되고, 무명가수가 통기타 반주에 맞춰 들려주는 노래에 귀가 솔깃해지기도 한다. 상형문자로 디자인한 갖가지 토산품에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바글대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번화한 도시의 유흥가로 여길 수도 있다.

리장 고성이라 하면 통상적으로 커다란 물레방아인 대수차大水車가 있는 리장 시내의 구청구古城区 지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은 다옌고진大硏古镇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리장 고성은 고성구에서 북쪽 4km 거리에 있는 수허고진束河古镇과 북쪽 10km에 있는 바이사고진白沙古镇이라는 옛 마을 두 곳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세 곳은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여행객으로서는 하나하나 찾아가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세 곳의 옛 마을 가운데 바이사고진은 리장 시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들에게도 가장 덜 알려진 곳이다. 나시족 전통의 시골집들이 많다.

바이사란 지명은 이 지역에 흰색 모래가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지금은 옛 풍취가 가득 담긴 시골 마을로, 시내의 고성에 견주면 주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이 마을의 역사는 자그마치 1700여 년이나 된다. 리장 시내의 고성이 번성하기 전에 나시족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질박한 흙벽돌로 쌓고 하얗게 회를 칠한 담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흙벽 담장에도 기와를 얹어 멋을 내는데, 용마루 중간에 길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린 네 발 달린 동물이 하나씩 얹혀 있다. 상상 속의 동물로 보이는데 바이사 고진의 기념품 상점에서 작은 모조품으로 팔기도 한다.

현지 노인들은 이것을 사불상四不像이라 부르면서 길한 동물이라고 설명한다. 사불상은 원래 미록麋鹿이라는 사슴과의 희귀한 동물이다. 머리, 목, 다리, 꼬리가 각각 말, 당나귀, 소, 사슴과 닮았으나 어느 것과도 똑같지는 않아 사불상이라고 한다. 마을 노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나시족의 사불상은 집 바깥에 있는 좋은 기운을 큰 입으로 들이마셔서는 배설하듯이 집 안으로 넣어주는 존재다. 사불상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꼬리는 바짝 치켜들어 바로 배설할 것 같은 자세에다 커다란 눈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다.

또 한 가지 바이사의 골목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은 용마루 끝이나 추녀마루 끝을 마감한 기와는 40∼50cm의 크기로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솟구쳐 있다는 것이다. 마치 사마귀가 앞발을 힘차게 치켜든 것 같다. 멀리서 보면 굵은 바늘을 거꾸로 꽂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사불상이 삼켰다가 뱉어놓은 당찬 기운이 하늘을 향해 거만하게 뻗대는 느낌도 든다.

이곳의 민가는 시내 고성의 민가와 동일한 삼방일조벽 형태가 많다. 그러나 바이사고진은 농촌 성격이 강한 탓에 농사일을 하기 좋게 마당을 넓게 만들었고, 담장과 벽체는 흙벽돌로 만든 것이 많다는 점이 약간 다르다.

바이사에 사는 나시족들은 평소에도 전통적인 복장을 즐겨 입는다. 이들의 복장은 피성대월披星戴月이라고 한다. 등판에 수놓은 일곱 개의 작은 원은 별들이고, 머리에 쓴 둥근 모자는 달이다. ‘별을 지고 달을 인다’는 의미다. 새벽 별이 남아 있는 이른 아침부터 달이 뜨는 늦은 밤까지 일한다는 뜻이다. 가사와 농사를 주로 여자들이 감당해왔던 힘겨운 생활사가 배어 있는 말이다.

바이사는 상업화된 시내의 고성과는 달리 향촌의 기운이 가득하다. 아직 낯선 외지인에게 먼저 웃어주는 현지인은 많지 않지만, 외지인들이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만 하면 누구든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혹시라도 결혼이나 생일, 장례나 탈상과 같은 동네 잔치를 마주치게 되면 시골의 진면목을 흠뻑 맛볼 수 있다. 혼주나 상주를 찾아 축하나 위로의 인사를 하기만 하면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도 동네잔치에 함께 어울릴 수 있다. 금방 푸짐한 식탁이 차려지고 술과 담배에서 사탕까지 열정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시골 인심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곳이다.

시내의 고성과 바이사고진 사이에 있는 수허고진도 찾아볼 만한 나시족 마을이다. 수허라는 말은 나시족 말로 ‘높은 봉우리 아래의 마을’이다. 북쪽의 위룽설산이 북풍을 막아주는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런 정겨운 지명이 잘 어울린다.

시내 고성과 바이사가 특정 시대에 리장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것에 비해 수허고진은 정기시장이 열리는 차마고도상의 집시集市였다. 수허고진은 쿤밍에서 리장과 샹그리라를 거쳐 라싸에 이르는 차마고도에 드물게 남아 있는 집시다. 윈난 남부에서 생산되는 차와 티베트의 힘센 말이 거래되던 차마고도는 장건이 찾아갔던 실크로드보다 오래된 교역로다. 한나라 시대에 윈난 지역은 중원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던 지역이지만, 중원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이곳을 거쳐 티베트 고원까지 교역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허고진에는 지금도 차마고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오래된 돌다리, 넓은 석판로石板路, 말을 타거나 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마석上馬石이 많다.

차마고도 박물관에서는 수많은 차마고도 유물들을 관람할 수도 있다.

중국인들과 리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시족은 인구가 30여만 명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리장이 중국인들이 낭만으로 꿈꾸는 여행지로 선호도가 아주 높다는 것 이외에 소득수준이나 문화수준에서도 그렇다.

이들은 고유의 말과 글을 갖고 있었고, 종교와 문화에서도 독자성이 아주 강했을 뿐 아니라 수준 또한 높았다. 이들의 전통문화를 동파문화東巴文化라고 한다. 동파는 지자智者라는 뜻으로 이들의 전통종교인 동파교의 지도자를 말한다. 동파는 고유의 상형문자로 경전은 물론 천문, 지리, 역법 등을 기록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서적만 해도 2만여 권이나 된다고 한다. 동파문자는 현재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상형문자다. 나시족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에도 문화수준이 높았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문화는 새롭게 바뀐 환경에서 위기에 처해 있다. 리장을 방문하는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나시족 전통문화는 많은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나시족의 소득 역시 급증하게 했지만 그들의 전통 민족문화는 빠르게 가라앉고 있다. 예를 들어 리장의 나시족 소학교 학생 가운데 나시족 모어母語를 할 수 있는 학생은 30%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고 모든 것이 상업화되면서 예전보다 큰돈을 벌었지만, 그들에게 돈을 벌어준 그들의 전통문화는 실생활 현장에서 점차 기념품 상점으로 옮겨간 것이다.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은 말과 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들의 말이 점차 사그러들고 글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전통문화도 변화의 물결을 비켜가지 못한 채 생활현장에서의 기력을 잃고 박물관의 전시품과 좌판의 상품으로만 근근이 생명을 잇고 있는 느낌이다.

윈난에서 소수민족들의 민가를 찾아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음미해오고 있지만, 소수민족의 존재는 과거나 현재나 조금도 녹녹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독립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고, 시장경제와 광역화, 세계화가 해일처럼 들이닥치면서 그들의 전통문화가 심각하게 유실되고 있다. 이들도 어느 단계가 되면 잃어버린 것들을 안타까워하면서 뒤늦게나마 복원하려고 애쓰기는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