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톈탄天壇

성청盛成(1899∼1996년)
성청은 쟝쑤 성江苏省 이정儀徵의 몰락한 한학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과 ‘5·4운동’ 등에 활발히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말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처럼 불어 닥친 해외 유학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떠나 몽펠리에에서 공부하다 다시 이탈리아 파도바대학으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았다. 20년대 초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하였고 프랑스 공산당 창건에도 관여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 귀국한 뒤 베이징대학과 중산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8년에는 타이완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타이완 정부의 박해와 배척을 받다가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뒤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문학 창작과 학술 연구 활동을 벌이다 1978년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오랫동안 베이징어언학원北京语言学院의 1급 교수로서 지내다 1985년 중국과 프랑스 문화 교류에 걸출한 공헌을 했다는 명목으로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나의 어머니』 등이 있다.

나는 젊어서 유랑생활을 하며 늘 도보여행을 했다. 유럽에 간 뒤에는 근공검학勤工儉學을 했는데, 방학이 시작되면 몇 달 치의 먹을거리가 생길 때마다 풍광을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나의 유랑민 생활은 어떤 중국인보다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인 가운데 이탈리아를 도보로 돌아다닌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둘째,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동유럽을 멋대로 돌아다닌 이는 또 몇이나 되겠는가? 입을 열면 로마, 입을 닫으면 그리스, 다시 한 마디 하면 카이로에 팔미라Palmyra나 파르테논은 말할 것도 없고, 다마스커스, 바빌론과 더바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위치

유럽인들이 말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의 경우 내가 이집트의 해안가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 가봤지만, 아무런 유적도 보이지 않아 공연히 헛걸음만 했다. 로도스 섬의 거인상은 진즉이 붕괴되었다. 사람들 말로는 그 유적을 모두 유태인들이 사갔는데, 9백 필의 낙타로 운반했다고 한다. 터키 남부의 보드룸은 예전의 할리카르나소스인데 마우솔로스의 영묘가 높은 성의 동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유적은 비록 남아 있지만 불가사의한 면은 잃어버렸다. 220년에 처음 이루어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일찍이 고트 인들에 의해 파괴되어 황폐한 수풀더미 속에 커다란 돌 무더기만 보일 따름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채석장이 되었다가 최근에야 아레나와 공연장, 음악당 및 아르테미스 궁의 유적을 찾아냈다고 한다. 올림피아에 가서는 제우스 신전만 보고 제우스는 보지 못했고,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은 진즉이 행방이 묘연한데, 일설에는 축융 씨祝融氏가 불러서 갔다고 한다.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지금은 종적을 찾을 길 없다.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만이 홀로 우뚝 서 있다.

나는 피라미드 앞에 서서 끊임없이 만리장성을 생각하고 톈탄天壇을 생각했다. 이 세 가지가 세계적인 불가사의이다.

그래서 중국에 돌아와서는, 10년 간 헤어져 있었던 베이징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톈탄을 찾아갔다. 예전의 베이징 쳰먼다졔前門大街는 지금은 그 번화함을 난징南京의 타이핑루太平路로 넘겨주었고, 톈챠오天橋는 여전히 있지만, 안타깝게도 황량해져, 신세계는 문을 닫았고, 성남유예원城南遊藝園은 아주 썰렁했다! 톈챠오를 지나면 원래 돌다리가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이미 평평하게 철거되어 유의해서 보지 않으면 이게 작은 다리, 작은 톈챠오라는 걸 알지 못할 정도이다. 톈챠오의 동남쪽이 톈탄인데 셴눙탄先農壇과 좌우로 대를 이루고 있다.

톈탄의 특색은 내원외장內垣外墻으로 모두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과 남쪽, 서쪽의 삼면은 네모나고方, 북쪽만 둥근圓 것이 로마의 판테온과 정반대인데, 그곳은 삼면이 둥글고 한쪽 면만 네모난 형식이다. 외장外墻(바깥쪽 담장)의 둘레는 9리 13보이다. 내원內垣(안쪽 담장)의 둘레는 7리인데, 내원과 외장 사이가 외단外檀이고, 내원의 안쪽이 내단內檀이다. 세계적인 불가사의는 내단의 안쪽이다.

톈탄의 불가사의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환구단圜丘壇이고 다른 하나는 기년전祈年殿이다. 환구단은 앞쪽에 있는데, 예전에 황제가 하늘에 기도하는 곳으로 민국 이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홍헌洪憲 태조가 되려 할 때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최근에는 아무개가 멋대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 했는데, 창춘長春에는 난징의 훙우먼洪武門 밖의 톈탄天壇 유지 같은 곳이 없었기에 임시로 단을 쌓고 한 바탕의 광대놀음을 했었다. 기년전은 뒤쪽에 있으며, 기곡단祈穀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고대의 명당제明堂制에 의하면 봄과 가을에 두 번의 제사를 드리는데, 이곳에서 ‘신곡新穀’과 ‘대형大亨’ 두 전례를 거행한다. 민국 이후 차오쿤曹錕의 헌법이 여기서 기초했기에, 세간에서는 ‘톈탄 헌법’이라 불렀다.

기년전

외단外檀에서 들어가 용도甬道를 걸어가다 보면 양쪽에 네모난 석좌石座가 좌우 대립의 형태로 있는데, 그 옛날 깃발을 꽂고 휘장을 날리던 유적이다. 돌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돌아 북쪽을 향하면 기년전을 가게 되고 오른쪽으로 돌아 남쪽으로 가면 환구단이다. 일반적인 유람객의 습관대로 먼저 북쪽으로 가게 마련인데, 그들은 기년전의 황금빛 지붕이 유리 기와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톈탄의 본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년전도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기곡단은 3층으로 모두 백석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층마다 돌 난간으로 에워싸여져 있다. 그 위에 기년전이 정중앙에 자리 잡았는데, 상하 3층으로 붉은 기둥이 둘러져 있고, 위에는 푸른색 유리 기와로 덮여져 있으며 안에는 황금색 벽돌로 쌓았다. 정중앙에 용 모양의 네모난 천연의 돌 한 덩어리가 있는데, 호화롭기가 진정 천하의 기관奇觀이라 할 만 하다!

원형의 건축은 원시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대 로마의 조신묘가 기년전의 형식과 유일하게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북극의 이누이트나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및 갈리아 인들의 집은 모두 원형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른 민족들, 이를테면 피라미드를 만든 민족, 제우스 신전과 공중 정원, 아르테미스 궁, 이미 죽었거나 아직 안 죽고 장차 죽을 수많은 민족들이 일제히 회합하여 톈탄에 와서 하늘에 제사 드리되, 각자의 복장을 하고 각자의 깃발을 들고 기년전에서 출발해 환구단까지 걸어가면 이것이야말로 세계가 대동단결하는 게 아니겠는가?

황금빛 지붕에 홑 처마, 안팎으로 여덟 개의 기둥이 둘러져 있고, 신위패가 모셔져 있는 황궁우皇穹宇를 지나면 바로 환구단이다. 사직단은 네모난 제단이고, 이것은 둥근 제단이다.

환구단

3층의 단은 모두 백석으로 쌓아졌는데, 최하층은 폭이 2백 척이고, 최상층은 85척이며, 중층은 142척이다. 제1층은 백석 난간이 180개이고 제2층은 108개, 제3층 곧 최상층은 72개로 모두 360개로 1년 360일에 부합하며, 암암리에 원둘레 360도와도 부합한다. 전체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정확성을 띠고 있으며 다른 특징들도 숫자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기단은 각각 3층으로 되어 있어 곱하면 9수를 이룬다. 단에는 9가 아닌 게 없는 곳이 없어 이른바 구천九天, 구주九州, 구족九族, 구주九疇, 구장산술九章算術, 구등부九等賦,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가 그러하다. 9자는 중국문화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단의 정상 한 가운데 있는 둥근 돌 위에 서면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도인이 술법을 부려 귀신을 물리치는 듯, 그 옆에는 9명의 판관이 에워싸고, 다시 수많은 시종들로 에워싸되, 모두 81명이 그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 말을 듣고 있는 듯하다.

천심석

“하늘이시어, 그대는 진정 눈이 멀었구려, 오랑캐의 제사를 받다니, 나는 한족을 대표해서 맹세코 승인할 수 없나니!”

나는 또 하나의 소리를 듣는다.

“이 세계적인 불가사의는 한족의 건축이고, 중화의 유일한 영광으로 오랑캐가 멋대로 가져갈 수 없노라!”

“죽여라!”

“하늘이시여!”……

(1936년 97기 『논어論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