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베이징

린위탕林語堂(1895∼1976년)
린위탕은 푸졘 성福建省 룽시龙溪(지금의 장저우漳州)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허러和乐였는데, 나중에 위탕玉堂으로 개명했다가 다시 위탕语堂으로 바꾸었다. 저명한 작가이자 학자이다. 상하이의 세인트존스대학(聖約翰大學)을 나온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의 영어 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 대학에 건너가 언어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얻었으며 1921년에는 독일로 건너가 예나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1923년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칭화대학清华大学, 베이징대학北京大学, 샤먼대학厦门大学에서 근무했고, 1935년부터 1966년까지는 미국에서 살면서, 1948년 유네스코 예술부장, 1953년 UN총회 중국 대표 고문, 1954년 싱가포르 난양 대학 창립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논어论语』, 『人间世』, 『宇宙风』 등의 잡지를 주편했고, 『경화연운京华烟雲』 등의 소설을 썼는데, 린위탕의 문명을 떨친 것은 오히려 그의 산문집으로 『생활의 발견生活的藝術』 등이 있다. 1966년 이후에는 타이완에서 거주하면서 홍콩의 중문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되었다. 1976년 홍콩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과 난징을 비교하는 것은 시징西京[1]과 둥징東京[2]의 경우와 같다. 베이징과 시징은 모두 고대의 수도로 사방이 일종의 향기와 역사적인 신비를 띠고 있는 어떤 마력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이런 것들은 새로운 수도인 난징과 둥징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난징(1938년 이전)은 둥징과 마찬가지로, 현대화를 대표하고 진보를 대표하며, 공업주의와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베이징의 경우는 구 중국의 영혼과 문화, 평온을 대표하고, 편안하고 쾌적한 생활을 대표하며, 생활의 조화를 대표한다. 아울러 문화를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조화로운 정점으로까지 발전시키고 동시에 도시 생활과 시골 생활의 조화를 함축하고 있다.

  베이징과 난징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중국인에게 이 가운데 어느 곳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베이징이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불문하고, 그가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유럽인이든 상관없이 베이징에서 1년 이상 살아본 뒤에는 다른 도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베이징은 세계의 보석과 같은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파리와 (전하는 말로) 비엔나를 제외하고 베이징과 같이 이상적이고, 자연과 문화, 아름다움과 살아가는 방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도시는 없다.

  베이징은 큰 어른과 같아서 품이 너르고 농익은 인격을 갖고 있다. 도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품격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은 비천하고 편협하며, 괴팍하고 꼼꼼하다. 다른 어떤 것은 강개하고 장엄하며, 도량이 넓고 평등하다. 베이징은 장엄하다. 베이징은 도량이 넓다. 베이징은 고대와 근대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면모를 바꾸지 않는다.

  젊은 ‘미스’들이 하이힐을 신고 나막신을 신은 만주족 귀부인과 함께 그 주변을 걸어 다녀도 베이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노년의 화가가 희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그곳에 살면서 청년 대학생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정원을 지나다녀도 베이징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 올연한 베이징이라는 큰 여사旅社의 뒷면에 좁장한 후통이 있고, 거기서 진행되고 있는 삶이 천 년 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들, 누가 아랑곳하겠는가? 셰허대학協和大學[3]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많은 골동품 점들이 있고 거기서 일군의 골동품 상인들이 물담배를 피우며 고대의 방법으로 장사를 한들, 누가 아랑곳하겠는가?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자기가 좋아하는 술집을 드나들며, 자신만의 기호를 누리면서 애정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진리에 이르고, 제기 차는 것을 연습하거나 ‘바이올린’를 켠들, 누가 아랑곳하겠는가?

  베이징은 높고 큰 오래된 나무와 같아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얻고, 수백만이나 되는 곤충들이 그 그림자 아래에 살고 있고, 나뭇잎과 가지 속에도 있다. 이런 곤충들이 이 나무가 얼마나 높고 크며, 얼마나 빨리 자라고, 땅 속에 얼마나 멀리 들어가고, 다른 나무 가지 위에는 또 어떤 곤충들이 살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베이징에 살고 있는 주민일지라도 이렇듯 오래되고 이렇듯 거대한 베이징의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수 있겠는가?

  감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도 그는 이미 베이징의 전체를 알고 있다. 어쩌면 10년 이상 살고 난 뒤에 때로 작은 후통 가운데에서 괴벽한 노인을 발견하고도 그와 조금 일찍 만날 수 없었던 것을 한스러워 하지 않거나, 혹은 나이가 든 고상한 화가가 웃통을 벗고 커다란 홰나무 아래 대나무 의자에 앉아 부들로 만든 부채를 들고 달콤한 꿈을 꾸거나, 제기 차기 고수가 제기를 자신의 머리 위로 한 치 한 치 높이 올려 차다가 자신의 등 뒤의 신발 바닥 위에 얌전하게 떨어뜨리기도 한다. 검객의 상무회尙武會든, 어린 아이의 희극학교든, 기인旗人 출신 인력거꾼이 된 만청 왕족의 자제든, 예전 제정帝政시대의 관리든. 뉘라서 그가 베이징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하겠는가?

  베이징은 보석과 같은 도시다. 한 사람의 눈으로는 예전에 본 적이 없는 보석과 같은 도시와 다름없다. 여기에는 금색과 보라색, 남색의 왕가의 지붕이 있고, 궁전과 정자, 호수, 공원이 있다. 왕손과 평민의 화원이 있다. 여기에는 시산西山 일대의 보랏빛 기운과 위취안玉泉의 푸른색 띠와 중앙공원이 있으며, 톈탄天壇과 셴눙탄先農壇의 인류가 심은 수백 년 된 고송古松이 있다. 이 도시에는 아홉 개의 공원이 있고, 세 개의 왕실 호수가 삼해三海[4]라는 이름으로 유명한데, 현재는 모두 공개되어 구경할 수 있다. 아울러 베이징에는 짙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달빛이 있으며,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과 상쾌한 가을, 건조하고 맑은 겨울날들이 있다!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환구단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고송들

베이징은 제왕의 꿈과 같아서, 궁전과 화원, 백 척尺이나 되는 숲 그늘과 예술박물관, 전문대학과 대학, 병원, 사묘寺廟, 보탑寶塔이 있고, 거리에는 예술품을 파는 점포와 고서점이 있다. 베이징은 탐식가의 낙원으로 수백 년 된 주점에 연기로 누렇게 찌든 오래된 간판이 내걸려 있고, 뚱하게 생긴 뽀이가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서 전제專制 시대의 전설 속 구 예절을 온전히 학습하고 고급 관리를 접대한다. 여기는 빈민들이 어지럽게 모이는 곳으로 인접한 점포마다 기꺼이 가난하고 늙고 약한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영세한 상인은 싼 값에 자신의 진귀한 물건을 팔고, 찻집의 손님 역시 한 주전자의 차로 옹근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베이징은 상인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중국 고대의 수공예품, 서적이나 화첩, 인쇄물, 골동품, 자수, 옥기, 경태람景泰藍[5], 자기, 등롱燈籠이 가득 차 있다. 이곳에서는 상인들이 늘상 자신들의 상품을 가지고 문 앞에 와서 팔기 때문에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다. 이른 아침 후통에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음악으로 충만한데, 그것은 바로 영세한 상인들이 물건 파는 소리이다.

베이징의 대표적인 공예품 경태람

베이징은 고요하다. 이곳은 주택가로 적합한 도시다. 집집마다 정원이 있고, 정원에는 금붕어 어항과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곳의 채소와 과일은 신선하다. 배가 필요하면 배가 있고, 감이 필요하면 감이 있다. 이곳은 이상적인 도시로, 드넓은 공간이 있어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고, 도시이긴 하지만 시골의 고요함과 조화를 이루어, 길거리와 좁은 골목, 운하가 적당히 어우러져 있다. 사람들은 과수원을 찾거나 화원의 빈 공터를 찾아 아침 햇살 희미할 때 채소를 심다가 동시에 시산西山을 바라볼 수 있다. 거대한 백화점도 화살 한 대 날릴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이곳 역시 복잡하고, 복잡한 인간들이 있다. 변호사와 범인, 경찰과 스파이, 도둑과 도둑의 보호자, 거지와 거지 왕초, 성인과 범죄자, 회교도, 티벳의 구마사驅魔師, 예언가, 권술가拳術家, 스님, 창기, 러시아와 중국의 댄서, 조선의 밀수꾼, 화가, 철학가, 시인, 골동품 수집가, 청년 대학생, 영화광 등이 있다. 투기 정치가도 있고, 은퇴한 구 관료와 신생활의 실행자, 신학자가 있으며, 만청 정부 관리의 부인이었다가 하녀로 전락한 여자 고용인도 있다.

베이징 사람들

  이곳도 다채롭다. 오래된 색소도 있고 새로운 색소도 있다. 왕가의 방대함과 역사적인 시대와 몽골 평원의 색소가 있다. 몽골과 중국의 상인들이 낙타 떼를 이끌고 장쟈커우張家口와 난커우南口에서 이 유서 깊은 성문을 진입한다. 몇 리씩 이어진 성벽이 있고, 사오십 피트 넓이의 성문이 있다. 성루와 고루鼓樓가 있어 황혼 무렵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준다. 절과 오래된 화원과 보탑이 있는데, 그곳의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 다리 하나마다 모두 역사와 고적古迹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베이징을 거주하기에 이상적인 도시로 만들고 있다. 간단하게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건축, 둘째 생활의 방법, 셋째 사람들.

  베이징은 12세기에 건축되었지만, 현재의 형식은 15세기 초 명 왕조의 영락제가 조성했는데(영락제는 장성도 중수했다), 위대한 제왕의 기상을 잘 갖추고 있다. 남쪽의 성은 외성으로 북쪽의 내성보다 약간 작다. 내성의 가장 바깥쪽이 남문이고, 거기서부터 5리 남짓한 길이로 겹겹이 있는 성문을 지나면 중앙의 황궁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된다.

베이징 성

  내성의 중앙은 황성으로 사방이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황금색 기와로 덮여 있으며, 뒤에는 메이산煤山[6]이 있다. 성 안에는 다섯 개의 궁전이 있는데, 무지개 색 지붕 위에 눈부신 기와가 덮여져 있다. 메이산 위에서는 도시의 중앙 부분과 부근의 고루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황성의 서쪽과 서삼쪽에 삼해三海가 있는데, 예전에는 휴식을 위한 왕실 호수였다.

  성 안으로 두 개의 대로가 평행으로 달리면서 도시의 주요 중축을 이루고 있다. 성의 동쪽은 안딩다졔安定大街이고, 서쪽은 쉬안우먼다졔宣武門大街로, 각각의 폭은 60척이다. 황성 앞의 동서로 나 있는 대로가 톈안먼다졔天安門大街로 폭이 백 척이 넘는다. 외성의 남문 밖 양 쪽에는 톈탄天壇과 셴눙탄先農壇이 있는데, 제왕들이 제사를 드리며 풍년과 태평성세를 기원하는 묘당이다.

  중국인들의 건축 미술의 개념은 숭고함보다는 고요함을 취하는 데 있다. 황궁의 지붕은 대부분 낮고 넓은 양식으로, 이것은 제왕 이외의 사람들은 2층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기에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지위를 두드러지게 하는 데 그 효과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중앙의 가로를 따라 베이징을 관찰하면, 우선 계속 이어져 있는 아치형 성문을 지나면 황성의 궁전에 도달하게 되는데, 관광객들은 짙푸른 하늘 하래서 황금기와가 빛나는 황궁의 지붕을 볼 수 있다. 아주 감동적인 광경이다.

쯔진청紫禁城의 황금 기와 물결

하지만 베이징을 이렇듯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생활 방식에 있다. 이렇듯 잘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번잡한 시내 부근에 살더라도 고요하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 생활비는 저렴해서 일상생활을 쾌적하게 향유한다. 관료와 부자들은 큰 술집에서 마실 수 있고, 가난한 인력거꾼도 동전 두 닢이면 기름과 소금, 장과 식초를 살 수 있고, 거기에 약간의 향료가 들어간 반찬을 더할 수도 있다. 어디에 살든 집 근처에는 정육점과 술집, 찻집이 있다.

  그대는 자유롭게 아주 자유롭게 학업과 오락거리와 취미, 또는 도박과 정치생활을 추구할 수 있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그대가 무엇을 입고, 무슨 일을 하건 그대에게 한 마디 말도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베이징의 위대함과 세계화이다. 그대는 성인군자나 범죄자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도박꾼이나 학자, 화가, 정객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제왕이 될 생각이 있다면 황궁의 옥좌에 가서 오전이나 오후 시간을 보내며 제왕이 되는 환상의 나래를 펴는 것으로 그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가 시인이라면 도성 안에 있는 몇 개의 공원 중에서 아무 곳이나 하나를 선택해 어슬렁거리며 산보하거나 다탁에서 옹근 오후를 보낼 수도 있다. 소나무 아래 대나무 의자에 기대거나 등나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어도 되는데, 어느 것이나 2마오毛 반도 들지 않는다. 아울러 그대는 항상 웃음을 띠고 예의바른 점원에게 대접을 소홀히 받지도 않는다.

  여름날 오후라면 스차하이什刹海를 가도 된다. 이곳은 절반은 밭으로 쓰이고 절반은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으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쾌적한 생활을 누리며, 고약을 파는 차력사나 변검變臉 전수자들의 기예를 감상할 수 있다. 시즈먼西直門을 나서면 왕가의 대로에서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노닐다 버드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에서 잠시 쉬는 것도 괜찮다.

  주위는 시골마을과 보리밭으로, 벌거벗은 어린 거지가 길 위에서 한 푼의 돈을 구걸하고 있다. 그들과 한담을 나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고 잠든 척하다 음악과 같이 억양이 센 성조가 점점 그대의 배후로 사라지는 걸 들을 수도 있다. 속칭 싼베이쯔화위안三貝子花園이라고도 부르는 완성위안萬牲園을 가도 되는데, 시즈먼 밖에 있다. 위안밍위안圓明園의 이탈리아 식 궁전의 폐허에 가서 옛 유적을 추모하는 것도 괜찮다.

석양에 물든 위안밍위안의 폐허 유적

  피서를 위한 여름궁전[7] 가는 길에서 하루 종일 전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되는데, 대리석 보탑이 표지가 되는 위취안玉泉에 가게 되면 짙은 녹색의 시원한 샘물로 그대의 발을 씻으며 또 다른 쾌적한 오후를 보낼 수 있다. 조금 더 멀리 나가 시산西山에 가서 여름 한철을 보낼 수도 있다.

  베이징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평민이다. 무슨 명철한 학자나 대학교수가 아니라 인력거를 끄는 쿨리다. 시산에서 피서산장[8]까지는 5마일 정도 되는 거리로 인력거를 타고 여행하면 1위안元을 들이면 충분하다. 그대는 아마도 이것을 염가의 여행으로 정말 괜찮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유쾌한 소일거리는 더더욱 아니다. 그대가 기괴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은 인력거를 끄는 쿨리들 역시 유쾌하게 길 위에서 한담을 나누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도 농지꺼리를 하거나 웃음을 보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돌아올 때는 아마도 밤중이 될 터인데, 남루한 옷을 걸친 늙은 인력거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는 유머와 고상함을 띤 웃는 얼굴로 자신의 팔자소관을 늘어놓으며 그가 빈궁에 이르게 된 불행한 처지를 하소연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인력거꾼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해서 인력거에서 내리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그대를 집까지 모시겠다고 뻗댈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뛰어내리면서 그에게 차비 일체를 준다면, 그는 목이 멜 정도로 놀랄 텐데, 그대는 그것이 그가 평생 받은 적이 없는 고마움일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다.

(1941년 상하이 인간서옥人間書屋 출판『어당수필語堂隨筆』)


[1] 시징西京은 역시 고도인 시안西安을 가리킨다.

[2] 둥징東京은 송의 수도인 카이펑開封을 가리킨다.

[3] 베이징의 유명한 의과대학이다.

[4] 베이징에는 몇 개의 인공호수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삼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하이中海, 난하이南海를 가리킨다.

[5] 경태람景泰蓝은 자기와 동瓷铜이 결합된 중국의 특수한 공예품 중의 하나로 베이징이 경태람의 발원지이다. 그 제작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적동紫銅으로  먼저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무늬나 밑그림을 그려 넣는다. 밑그림을 따라 동사铜丝로 각종 꽃무늬를 붙여 넣는다. 그 뒤 채색 작업을 하고나서 법랑 유약을 바르고 여러 차례 굽기를 반복하면 완성이 된다. 완성된 경태람을 잘 닦아내면 그 독특한 광택을 지니게 된다. 이런 공법은 명나라 경태景泰 년간(1449년∼1457년)에서 시작되었고 초창기에는 남색蓝色만 있었다고 하여 경태람景泰蓝이라고 불렸다. 현재는 다양한 색깔을 구비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전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6] 쯔진청紫禁城 북쪽에 있는 야트막한 인공 산으로 예전에 황궁의 연료로 쓰였던 석탄(중국어로는 매탄煤炭)을 묻어두었다고 해서 메이산煤山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징산景山이라 부른다.

[7] 이허위안頤和園을 가리킨다.

[8] 흔히 말하는 피서산장은 허베이 성河北省 청더承德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이허위안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