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17 구이저우성 안순 둔보

구이저우성 안순 둔보 – 토착민을 밀어내고는 요새에 갇혀 산 백성들

구이저우贵州라고 하면 먀오족, 둥족, 부이족, 수이족 등 소수민족을 떠올리지만 그곳에는 한족汉族도 살고 있다. 앞에서 먀오족의 이주와 수난을 들여다봤는데 그 반대편에는 그들을 밀어낸 누군가가 있다. 그들을 도륙해서라도 밀어내라고 명령한 것은 황제였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 구이저우 현지에 들어와서 몸으로 부딪쳐 그들을 밀어내고 그 공간을 채운 사람들은 혈통으로는 한족이었고 신분으로는 백성이었다.

구이저우에서 애당초 다수였던 토착민을 소수민족으로 밀어낸 것은 단순한 토벌전쟁만이 아니었다. 둔전제屯田制를 넘어서서 병사를 차출하면서 식솔까지 함께 대동케 하고, 군대와는 별도로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이주명령을 받은 한족 백성들은 구이저우로 들어왔다. 백성들은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군대 주위에서 농사를 짓고 주변의 척박한 산지를 조금씩 조금씩 개간해 들어간 것이다. 결국 구이저우의 땅은 토착민에서 낯선 한족 백성들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 오지로 들어온 백성이었지만 군사문화와 생존본능을 근간으로, 떠나온 사람들끼리의 유대감, 현지인에 대한 우월의식이 단단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가져간 전통과 문화를 잘 보존하면서 일상의 교류나 오락은 물론 혼인까지도 자기들끼리 하면서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냈다.

마을과 집에는 군사적 요소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집은 한 채 한 채가 작은 보루와 같아서 담장에는 사격 구멍이 허다하고, 옆집으로 피신할 수 있는 비상문들이 서로 가깝게 마주 보도록 만들어졌다. 집 한 채가 뚫리면 옆집으로 재빠르게 피신하려는 것이다. 집의 후면도 높은 돌담으로 에워싸는 것이 보통이다.

작은 골목들은 마을의 중심 가로로 이어지지만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골목과 골목은 직각이 아니라 조금씩 어긋나게 만들어졌다(아래 우측 사진).

적군이 골목 하나를 장악하더라도 다음 골목까지의 시야를 차단함으로써 직선 사로射路에 노출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미로에 빠지는 느낌이 난다.

적군이 중심 가로에 들어서면 메인 출입구를, 골목길을 들어서면 골목 입구를 막아버리면 독 안에 갇힌 형세가 된다. 이곳에서는 문을 잠그고 개를 때려잡는다關門打狗고 표현한다.

마을 자체가 주둔지라 돌로 견고하게 만든 대문(위 좌측 사진)이 외부를 차단하고 그 위에는 조루를 설치하여 적을 감시한다. 망루를 겸하는 조루(아래 사진)는 마을 입구 이외에도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와 같이 황제의 명으로 파병된 군대가 강제 이주된 민간인과 함께 자급자족하는 구이저우의 군사적 취락을 둔보屯堡라고 한다. 군대가 주둔한 군보, 민간인이 모여 사는 민보, 상인들의 상보로 나누기도 한다.

구이저우의 안순安顺에서 윈난의 취징曲靖을 거쳐 쿤밍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둔보가 많았다. 특히 안순에는 둔보와 둔보문화가 잘 보존된 곳이라 둔보라 하면 이곳을 떠올리게 된다. 안순의 둔보를 거닐면서 소수민족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또 다른 백성들을 음미해보자.

안순에 둔보가 밀집해서 설치된 때는 명나라 초기다. 주원장이 원나라를 밀어내고 명나라를 세웠지만, 윈난에서는 원나라 황실과 연결된 양왕梁王과 토착세력인 단씨段氏가 저항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윈난, 쓰촨, 구이저우 지역을 확실하게 평정하기로 하고 1381년 30만 대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안후이에서 장시와 후난을 거쳐 구이저우로 진입했다.

지리적으로 안순은 구이저우의 복부고 윈난의 목구멍이라고 한다. 바로 이 안순에서부터 본격적인 토벌전을 개시했다. 명나라 대군은 안순에서 서쪽으로 진군하여 60∼100리마다 군사기지를 하나씩 설치하면서 윈난으로 진격했다. 백석강의 전투에서 양왕의 군대에 대승을 거뒀다. 패배한 양왕은 자살했으며 이후 명군이 파죽지세로 윈난 지역을 평정했다.

역사에서는 주원장의 토벌전을 북쪽의 군대를 뽑아 남쪽을 정벌했다는 뜻으로 조북정남調北征南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원장은 군사적으로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구이저우를 완전히 복속시키기로 했다. 군대를 보내면서 군인 가족까지 보내 아예 현지에 정착시켰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차출하여 조직적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역사에서는 북쪽의 백성으로 남쪽을 채운다 하여 조북전남調北塡南이라고 한다.

파견된 군대는 일절 군적 이탈을 금지시키고 군인이나 군속은 전부 가족을 데려가도록 법을 만들었다. 미혼 병사에게는 짝을 맺어주기까지 했다. 지역적으로는 인구가 조밀하고 경제가 발달했으나 농지가 부족했던 중원과 강남 지역에서 주로 차출했다. 이 중에는 떠돌던 유민과 파산한 농민, 범법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주자들에게는 토지를 나눠 주고 세금은 가볍게 했다.

토착민에게는 침탈이자 비극이었고, 이주민들에게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이 160만 명, 3대 황제인 영락제가 35만 명을 이주시켰다. 낯선 땅으로 이주당한 한족 백성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척박한 산비탈까지 개간했다. 결국 구이양에서 안순·윈난으로 가는 중요 지역은 전부 한족의 강역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이저우는 한족이 토착민보다 많아졌고, 이주민과 함께 한족 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600년 전의 일이다.

이 때문에 성안은 물론이요 성을 잇는 대로 주변은 한족이 차지했고, 토착민들은 황제의 군대와 한족의 문화에 밀려났다. 지금도 구이저우나 윈난에서는 성城은 한족이, 논畓은 좡족이나 이족彛族이 차지하고, 먀오족은 깊은 산중에나 산다고 이야기한다.

둔보인들은 현지인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고, 둔보문화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변화된 것들조차 이곳에서는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이런 현상은 복식과 희극에서 뚜렷하다.

1993년 이 지역에서 명대 왕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넓은 소매에 테를 두른 상의, 꽃과 새를 수놓은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600여 년 전의 복식이 20세기 이 지역 부녀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전통복장과 거의 똑같아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둔보의 희극은 관객들이 둘러선 평지에서 하기 때문에 지극地劇이라고 하는데, 지극의 내용이나 연출 형식 등도 명대 희극의 원형에 가깝다. 둔보인의 언어에서도 권설음이 많아 명대 관방어 발음이 전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 민속학자나 고고학자들이 둔보문화를 명대 중원문화의 활화석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해가 간다.

둔보는 넓은 지역에 많이 설치되었지만, 여행객이 둔보를 돌아보려면 안순 시내에서 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안순시安顺市 시수이구西秀区 치옌차오진七眼桥镇의 윈펑云峰 둔보문화 풍경구를 가면 좋다. 인근의 여덟 개 마을을 통칭하여 윈펑 팔채라고 하는데 윈산云山, 레이툰雷屯, 번자이本寨 등이 가장 잘 보존된 둔보다. 윈펑 팔채의 입장권을 사면 가이드가 둔보박물관으로 안내해 둔보문화를 설명해준 다음 2km 정도 떨어진 번자이로 안내해준다.

번자이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돌로 만들어진 돌의 세계다. 마을의 대문은 물론 골목길 좌우의 담장도, 골목의 노면과 층계는 물론 쓰레기통이나 방아까지도 온통 돌이다. 집집마다 담장에 사격공이 많은 것도 이색적이다. 19세기 영국이 중국에 마구잡이로 뿌려댄 아편을 사고팔던 흔적도 남아 있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사각형 창구에 돈을 주고 아편을 받는 구멍이 있다. 아편을 사는 위치를 향해 사격공이 뚫려 있어 당시의 흉흉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위의 사진).

민가의 구조는 대개 사합원인데, 대문의 좌우 문기둥이 밖을 향해 부채꼴처럼 넓게 벌어져 있어 팔자사합원八字四合院이라고도 한다. 천정이 있는 이층으로 남방의 사합원 형식이다. 대문에 들어서면 화려한 문양의 수화문垂花門(위의 사진)을 한 번 더 들어가기도 한다. 석재를 많이 쓰는 것이 다를 뿐 기본 구조는 중원이나 강남의 사합원과 유사하다. 둔보인들의 선조가 허난河南이나 저장折江, 안후이安徽 등지에서 이주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을이 돌로만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지역에 퇴적암이 많기 때문이다. 구하기 쉬운 건축 재료를 많이 사용한 것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토착민들이 둔보를 불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명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둔보를 공격해 불태운 것이 수십 차례나 되니 둔보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그들은 목재보다 석재를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둔보에서 참 어려운 질문에 부닥친다. 나중에 들어왔지만 다수가 되어버린 한족,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소수민족이라고 분류되는 토착민의 후예, 구이저우의 서로 다른 두 갈래의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일까 질문해보면 답이 쉽지 않다.

둔보 주변을 둘러보면,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논농사에 바쁜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다. 거기 사는 사람들 역시 보통의 욕망과 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이미 600여 년을 살아왔으니 그들도 이 땅의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그 이전에 살다가 밀려난 사람들의 땅은 어디일까.

고구려 유민이 강제 이주를 당하고 오랜 세월을 거쳐 현지인들과 융합되어 형성되었다는 먀오족, 그들의 땅은 어디일까. 고구려의 유민이니 만주가 그들의 땅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구이저우 어디라고 해야 할까?

한 걸음 더 나가보면, 2000년의 유랑 끝에 땅을 되찾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과 20세기 어느 날 갑자기 고향 땅을 잃어버린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들의 깊은 상처는 과연 치유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우리가 세계를 더 넓게 보고 역사를 더 깊게 생각해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