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16 후난성·구이저우성 먀오족 조각루

후난성·구이저우성 먀오족 조각루 –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이 고단한 몸을 쉬던 집

광시, 구이저우, 윈난, 후난 등 중국 서남부는 각기 다른 전통과 문화를 품고 있는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민가에서도 지역성과 민족성이 함께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좡족과 둥족에 이어 먀오족苗族의 조각루弔脚樓를 살펴보면서 1000년을 넘긴 그들의 남천사南遷史와 고구려 유민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한다.

조각루는 집을 지면에서 띄어 올린 간란식 주택으로 산지에서 주로 나타난다. 집의 한쪽은 산이나 계곡 또는 강가의 경사면에 앉히고, 다른 한쪽은 경사면 아래에서 세워 올린 기둥으로 받치는 구조다. 산에 지을 때에는 낮은 곳을 향하게 하고, 강가에 지을 때에는 강을 등지고 길을 향해 앉힌다. 집을 받치는 나무기둥이 늘어뜨린弔 다리脚 모양이라 조각루라고 하는데, 먀오족들은 반변루半邊樓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사에 짓는 이유는 집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평지가 워낙 없는 산지라서 평지가 있으면 우선 농사를 지어야 하므로 집은 아예 비탈면에 짓는 것이다. 집은 3층으로 기본 구조는 간란식 주택과 대동소이하다.

조각루는 후난, 구이저우, 광시, 윈난 등 중국 서남부 산지에서 두루두루 견되는 주택으로, 먀오족만의 민간건축은 아니다. 그런데 먀오족 마을 가운데 조각루가 아름다운 마을이 몇 개 있으니 이왕이면 그 마을들을 하나씩 찾아보려는 것이다. 후난성 서부의 펑황고성鳳凰古城(위 사진)과 구이저우 중부의 시장먀오자이西江苗寨(아래 사진) 두 곳이다.

펑황고성은 중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옛 마을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준다. 후난성 성도인 창사長沙에서 서쪽 330km 정도이고 장자제張家界 서남쪽 150km 정도인데, 먀오족과 투자족土家族이 많이 사는 곳이다.

펑황고성이 유명한 이유는 이 마을을 관통하는 퉈강沱江(쓰촨성의 퉈강과는 다른 강) 강가에 늘어선 고풍스럽고 소박한 조각루들 때문이다. 양쪽 강변에 조각루를 받치고 있는 촘촘한 기둥이 독특하다. 밤이 되면 기둥을 비추는 조명이 강물에 반사되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다(위 사진). 강변 길에는 청춘남녀 여행객들이 모여들어 펑황고성 전체가 낭만으로 가득 차곤 한다.

펑황고성은 청나라 강희제 시절에 지어진 고성으로 성루와 성벽은 물론 좁다란 돌길 골목도 잘 보존되어 있어 고풍의 향기가 진한 곳이다. 이런 향기에 야경의 낭만이 더해지니 중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옛 마을로 꼽을 만하다.

필자는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에게 장자제를 여행한다면 펑황고성까지 가보도록 권하곤 한다. 후난성 창사에서 출발하여 장자제와 펑황고성을 찾아보고, 구이저우성으로 넘어가 퉁런銅仁을 거쳐 카이리凱里 외곽의 시장먀오자이까지 찾아간다면 아주 멋지고 의미 있는 먀오족 기행이 된다.

시장먀오자이는 시장첸후千戶먀오자이라고도 하는데, 구이저우성 제2의 도시인 카이리 외곽이다. 인구 6000여 명의 99%가 먀오족으로 중국에서 먀오족이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다.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산비탈의 조각루가 경이로운 마을이다.

펑황고성의 조각루가 강가에 늘어선 것과는 달리 시장먀오자이는 양쪽 산비탈에 조각루가 빼곡하다. 마을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새벽에 햇살이 비치면 촘촘한 비늘이 반짝이는 듯하고, 밤이 되면 집집이 켜둔 전등이 향촌의 멋진 야경을 연출한다. 도시의 고층 빌딩이나 공원의 경관 조명으로는 연출할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조각루 한 채 한 채를 들여다봐도 먀오족의 소박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2층에 만들어진 미인고美人靠라는 먀오족 특색의 건축양식이 눈길을 끈다. 미인고는 밖으로 낸 2층 거실의 창문 하단에 달린 것으로 일종의 붙박이 의자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을 계자난간이라고 한다. 기대앉아 바람을 쐬거나 햇살을 받으면서 수를 놓고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멀리 내다보면 산 아래 계곡이나 건너편 마을이 보이고, 아래로는 지나가는 이웃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시장먀오자이의 야경은 바로 미인고에 하나씩 켜둔 전등이 연출하는 것이다(위 우측 사진).

시장은 먀오족 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인데, 시西씨가 정벌했다는 뜻이다. 먀오족은 1000년에 걸쳐 중원, 강회, 강남 등지에서 고난에 찬 이주를 해온 사람들이다. 나중에 이주해 온 시씨가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토박이들을 몰아내고 정착한 곳이다. 지명에서 보듯이 먀오족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 고난의 역사다.

먀오족은 중국 내에 약 900만 명이 살고, 해외에 2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가 네 번째로 많다.

시장먀오자이에는 먀오족 박물관이 하나 있다. 복식과 건축, 놀이와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문화가 잘 담겨 있다. 그 가운데 먀오족 고대사를 보면,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치우蚩尤의 후손 가운데 남으로 이주한 이들이 먀오족이라는 것이다.

치우는 중국에서 전쟁의 신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결전을 앞두고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도 치우에게 지낸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악귀를 막기 위해 와당에 새긴다는 도깨비가 치우라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들이 열렬히 흔들어대던 그 엠블렘이 도깨비였으니 치우를 흔들어 4강에 올랐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2009년 겨울 먀오족을 생각하며 시장먀오자이를 찾아갔다. 참으로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멀어진 인연이란 감회에 젖어 먀오족 마을을 돌아봤다. 그 이후 필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의식을 다지는 여행으로 북방의 초원 여행과 구이저우의 먀오족 기행을 권하곤 했었다.

그런데 필자가 막연히 알고 있던 먀오족 이야기를 훨씬 뛰어넘는 최근의 학술연구 성과를 만나게 되었다. 역사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먀오족의 선조는 고구려 유민이란 것이다.

먀오족의 선조는 고구려의 유민이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의 연합공격에 의해 668년 멸망했고, 669년 20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의해 중국으로 강제 이주됐다. 일부는 만주 지역에서 황하와 창강을 건너 이주했고, 일부는 평양에서 바다를 건넜다. 이 가운데 10만 명은 강회, 산남 등지에 보내졌는데 이들이 당나라의 탄압과 현지인과의 갈등 속에서 이주에 이주를 거듭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먀오족이다.

이들은 고구려 유민으로서 자의식이 강해 자신들의 문화를 잘 보존했다. 남방의 소수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고구려의 도작稻作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체질인류학적 특성도 한국인과 가깝다. 주몽신화와 같이 여시조가 낳은 알에서 선조가 태어났다. 동맹과 유사한 고사절이란 축제를 벌이는데, 부여의 영고와 마찬가지로 북을 모셔오는 의례를 거행한다.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은장식은 고구려와 동일하다. 복식에서 남자들의 바지 가랑이 사이에 삼각형 바대를 댄 것이나 여자들이 주름치마를 입는 것 역시 고구려와 동일하다. 혼례에서도 처가살이와 형사취수 풍속이 남아 있고, 상례에서는 시신을 집 안에 묻으며 망자의 영혼을 고구려 땅으로 돌려보낸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에 황하와 창강을 넘어온 이주의 역사를 그려 넣거나 선조들이 살던 고구려의 성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복식문화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자의식이 강한 고구려 유민들은 강제 이주된 곳에 동화되지 않고 저항했기 때문에 끊임없는 탄압을 당했고, 이를 피해 고난의 이주를 거듭했다. 당나라는 이주정책을 통해 강력한 북방의 유민을 동화 내지 말살시키려고 했다. 송원시대의 토사土司정책에 이어 명나라는 조북정남調{北征南, 청나라는 개토귀류改土歸流라는 민족자치 말살정책으로 이들을 억눌렀지만, 이들은 항거로 일관했다. 그리하여 먀오족은 “돌은 베개로 삼을 수 없고 한족은 친구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한족은 “먀오족이 30년이면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60년이면 큰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먀오족은 중앙정권의 강력한 군사력에 패할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중국을 벗어나 동남아와 서양 각국으로 이주했다.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1300년 역사는 바로 먀오족의 역사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인류학자 게디스는 “세계 역사상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두 개의 민족이 있는데, 하나는 유태인이고 하나는 먀오족”이라고 말했다. (김인희,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푸른역사, 2010)

김인희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교수가 밝혀낸 고구려 유민 또는 먀오족의 남천사, 1300년에 걸친 눈물겨운 간난고투의 노래다.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으로 권한다. 김인희 교수는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학에 고고학과 인류학을 연계시켜 2000년부터 10여 년간 고구려 유민에 대해 수많은 현지답사와 문헌연구를 통해 이런 연구결과를 낸 것이다.

김인희 교수는 먀오족은 치우에서 시작해 삼묘三苗를 거쳐 내려온 것이라는 중국의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의 조작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먀오족의 기록은 송나라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는데, 그보다 1000년에서 2000년 이상의 공백을 훌쩍 뛰어넘어 치우와 삼묘에 연결시킨 것은 현대의 먀오족 학자들이 자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송나라 이전의 먀오족 역사를 찾을 수 없어 그 이전의 남만의 역사에 붙였고, 진한 이전의 역사는 삼묘와 치우로 끌어다 붙였다는 것이다.

청나라 시대에 특히 먀오족의 수난이 심했다. 청나라는 그 이전의 소수민족 자치제도인 토사土司를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보내는 관리流官가 통치하도록 했다. 이것을 개토귀류라고 하는데, 이에 저항하는 소수민족과 토착민들을 잔혹하게 토벌했고 이 가운데 먀오족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청나라는 먀오족을 자신들에게 복속하는 숙묘熟苗와 저항하는 생묘生苗로 나눠서 생묘를 무참하게 도륙했다. 강희제가 1703년 군대를 보내 살육한 먀오족이 40만여 명이었고, 불 질러 버린 마을이 300개가 넘었다. 가혹한 세금과 정치적 박해를 견디지 못한 먀오족은 옹정제 시대인 1735년 포리包利와 홍은紅銀의 영도 하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30만 명의 먀오족들이 주살당하는 처참한 보복으로 끝났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이후 1855∼72년까지 레이공산에서 장수미張秀眉와 양대륙楊大六이 반기를 들어 먀오족 최대 최장의 반란을 일으켰다. 17년간 민족자치를 하면서 전쟁을 벌였으나 끝은 비극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도 먀오족의 봉기는 다섯 차례나 더 있었다.

이런 역사로 인해 지금도 중국 정부의 먀오족 정책은 수면 아래서는 아주 냉대하고 억제하는 것이라는, 공식적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중국의 지인들에게 듣기도 한다. 언제든 저항할 수 있지만 순치되지 않는 민족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 같다. 역사도 물론 그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