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 해제解題와 서序

해제解題

《열미초당필기》는 기윤(紀昀)이 만년에 보고 들었던 것을 회상하여 쓴 필기체 소설이다. 건륭(乾隆) 54년(1789) 비적(秘籍)을 편찬, 출판하러 열하(熱河)에 갔다가 “이미 교감 작업은 끝난 뒤라, 관리들이 선반 위의 선장본(線裝本)에 책 이름 써서 붙이는 일만 감독하면 되었기에 해는 길고 할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해내어 패설(稗說) 6권을 쓰고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이라 이름 지었다. 2년 뒤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쓰고, 그 이듬해 다시 《괴서잡지(槐西雜志)》를 썼으며, 그 다음해에 《고망청지(姑妄聽之)》 각각 4권씩을 썼다. 가경(嘉慶) 3년(1798) 여름에 다시 열하에 가서 《난양속록(灤陽續錄)》 6권을 썼다. 2년 뒤 가경 5년(1800)에 그의 문하생 성시언(盛時彦)이 이를 합간(合刊)하고 기윤이 북경에 있을 때 사용했던 서재의 이름을 따서 《열미초당필기오종(閱微草堂筆記五種)》이라 이름 붙였다. 주로 명말에서 청조 강희, 옹정, 건륭, 가경 4대에 걸친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민속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여우 귀신 이야기를 통해 인과응보를 즐겨 논하고 있다.

판본사항

《열미초당필기》의 판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初刻本(1800): 盛時彦이 合刊하여 만든 《閱微草堂筆記五種》인 嘉慶 5年本이다. 이 책은 《閱微草堂筆記》의 原刊本으로 속표지에 “河間紀氏閱微草堂原本”, “北平盛氏望益書屋藏板”이라 적혀 있다. 첫머리에는 “閱微草堂筆記序”가 있고, 다음으로는 “閱微草堂筆記目錄”이 있다. 본문은 한면이 10行, 1行이 21字로 되어 있다. 版心의 上端에 “嘉慶 5年 校刊”이라 적혀 있고, 下段에는 “北平盛氏藏板”이라 적혀 있으며 방점이 없다. 현재 북경대학 도서관, 상해 복단대학교 도서관 및 남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淸 嘉慶 21年本(1816) 重刊本: 淸 徐時棟의 批注並跋이 달려 있다.

3) 淸 道光 15年(1835): 廣州財政司刻本인 紀樹馥粤東重刻本은 그 속표지에 “河間紀氏閱微草堂原本”, “北平盛氏望益書屋藏版”이 적혀 있고, 앞에 觀奕道人이 직접 쓴 詩가 있다. 또한 “嘉慶庚申八月門人北平盛時彦謹序”와 “道光十五年乙未春日, 龍溪鄭開禧識”이 달려 있다.

4) 上海中華圖書館石印本: 첫머리에 “文人北平盛時彦序”가 있고, 그림 32폭이 있다. 제1책에 6폭, 제2책에 8폭, 제3책에 4폭, 제4책에 4폭, 제5책에 8폭, 제6책에 2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5) 《筆記小說大觀》本: 上海 進步書局 石印本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 가운데 11권ㆍ12권ㆍ14권ㆍ17권에 80則 조금 넘게 빠진 부분이 있어 嘉慶本을 근거하여 보충했다. “閱微草堂筆記目錄”이 있고, 본문은 한 면이 15행, 1행이 31자로 구성되어 있다. 版心의 상단에 “閱微草堂筆記”라 적혀 있고, 하단은 비어 있다.

6) 民國 7年(1918) 上海 會文堂書局詳註本: 蕭山 謝 璿, 陸鍾渭 詳註, 紹興 湯壽銘 校正을 보았다. 속표지에 “詳註閱微草堂筆記”가 있고, “戊午秋上海會文堂書局發行”라 적혀 있다. 原序, 蔡元培識 및 詳註閱微草堂筆記例言이 있고, 그 다음으로 詳註閱微草堂筆記目錄이 있다. 본문은 한 면이 15行, 1行은 34字로 구성되어 있으며 註가 상세하게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타 「民國上海錬石書局石印本」, 光緖 15年(1889) 「錢塘 沈氏 刻本 《閱微草堂筆記擇要》」, 「同治至光緖間粵東緯文堂刻本」 등의 석인본이 있고, 이 이외에도 최근에 나온 것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1980년 上海 古籍出版社에서 출판된 《閱微草堂筆記》(淸 紀昀 著, 汪賢度 校点)가 있다. 淸 道光 15년 刊本을 底本으로 삼고, 文明書局의 《淸代筆記叢刊》本, 進步書局 石印本, 會文堂書局 詳注本을 참고하여 校点했다. 책 뒤에 시 두수와 盛時彦의 序ㆍ鄭開禧의 序가 부록으로 달려 있다.

2) 1994년에 中國華僑出版社에서 출판된 《閱微草堂筆記注譯》(淸 紀昀 著, 北 原 등 9인 注譯)이 있다. 民國 7年(1918) 「上海 會文堂書局詳註本」을 참고하여 주석을 달고 있다.

3) 1995년 河北敎育出版社에서 출판된 孫致中ㆍ吳恩揚ㆍ王沛霖ㆍ韓嘉祥 校点의 《紀曉嵐文集》에 《열미초당필기》를 비롯한 그의 평생의 저술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이외에도 다수의 참고서목이 있다.

「서」

성시언(盛時彦)

유학자라면 누구나 문이재도(文以載道)에 대해 한마디씩은 한다. 무릇 도(道)는 어찌하여 불가의 심인(心印)이나 도가의 구결(口訣)처럼 심오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비밀스럽게 전해지지 않는가! 만사의 당연한 이치가 담겨있는 것이 바로 도이다. 그러므로 도는 천지간에서 수은처럼 땅에 흘러 알알이 둥글고, 달이 물에 비치듯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할 수 있으며, 작게는 일 한 가지, 물건 하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도 도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문(文)은 도가 표현된 한 단면이다. 문 가운데 큰 것은 《육경(六經)》이 되었는데, 그 속에 도가 들어가 있다. 도는 전해 내려오면서부터 각 왕조의 역사가 되었고, 여러 제자서가 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의 문집(文集)속에 들어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도가 문 가운데에 표현된 한 측면이고, 따라서 그 속에 담긴 말은 충분히 도를 밝힐 수 있다. 다시 시대를 거치면서 패관소설(稗官小說)이 되었는데, 패관소설은 언뜻 도와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의 한 일가로 나열되면서부터 역대의 서목(書目)에도 기록되었다. 황당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 가운데] 정도(正道)에 가까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나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 보탬이 되지 않은 바가 없었다.

하간(河間)선생은 학문과 문장으로 천하의 명망을 얻고 있지만, 천성이 고지식하여 탁상공론이나 서로의 문호를 치켜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재주 있는 사람이 방탕하게 놀고 시사(詩社)니 주사(酒社)니 하면서 명사풍류(名士風流)로 자처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식사를 하고 난 나머지 시간에는 전적만을 끼고 살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료검토나 고증이 내키지 않아서 기이한 이야기(異聞)를 수집하고 때로는 붓 가는 대로 글을 써서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했다. 이렇게 해서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등 다섯 권의 책에 기이하고 이상한 내용의 글이 실리게 되었고, 방자한 내용의 글이 적히게 되었다. 그러나 큰 뜻은 대개 순박하고 정도로 귀결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권선징악을 알게 하는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내세운 음란서적의 경우 한 순간에 지가는 올릴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매몰되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책은 서판에 새겨서 오래도록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수식이 많은 글들과 다르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돌이켜 보건대, 판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곡해하는 부분도 많아졌고, 또 명(明)나라 사람이 쓴 《냉재야화(冷齋夜話)》처럼 작품의 표제를 함부로 고치는 경우도 생겨났으니, 이 또한 독자들의 허물이다.

나 성시언(盛時彦)은 일찍부터 선생님을 좇아 선생님의 《고망청지(姑妄聽之)》를 새기고 책 말미에 발문(跋文)을 썼는데, [이를 보신] 선생님께서는 내가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셨다. 근자에 와서 여러 판목의 글자가 더욱 희미해져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에 선생님께 청해서 다섯 권의 책을 합쳐서 하나로 엮고, 각각의 원본은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바구니 안에 불을 켜놓고 손으로 교정보면서 감히 힘든 것을 꺼리지 않았고, 또한 선생님께 청하여 검사를 한 번 받은 후에 인쇄했다. 선생님의 책이 굳이 이 판각본으로 전해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魚)’가 ‘노(魯)’가 되는 표기상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줄여 세상을 가르치려는 선생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가경(嘉慶) 경신년(庚申年: 1800) 8월 문인 성시언이 북평(北平)에서 삼가 이 글을 쓰다.

文以載道, 儒者無不能言之. 夫道豈深隱莫測, 秘密不傳, 如佛家之心印, 道家之口訣哉! 萬事當然之理, 是卽道矣. 故道在天地, 如汞瀉地, 顆顆皆圓, 如月映水, 處處皆見. 大至於治國平天下, 小至於一事一物一動一言, 無乎不在焉. 文, 其中之一端也. 文之大者爲《六經》, 固道所寄矣. 降而爲列朝之史, 降而爲諸子之書, 降而爲百氏之集, 是又文中之一端, 其言皆足以明道. 再降而稗官小說, 似無與于道矣. 然《漢書》「藝文志」列爲一家, 歷代書目亦皆著錄. 豈非以荒誕悖妄者雖不足數, 其近於正者, 於人心世道亦未嘗無所裨歟!

河間先生以學問文章負天下重望, 而天性孤直, 不喜以心性空談, 標榜門戶. 亦不喜才人放誕, 詩社酒社, 誇名士風流. 是以退食之餘, 惟耽懷典籍, 老而嬾於考索, 乃採掇異聞, 時作筆記, 以寄所欲言. 《灤陽消夏錄》等五書, 俶詭奇譎, 無所不載, 洸洋恣肆, 無所不言. 而大旨要歸於醇正, 欲使人知所勸懲. 故誨淫導欲之書, 以佳人才子相矜者, 雖紙貴一時, 終漸歸湮沒. 而先生之書, 則梨棗屢鐫, 久而不厭, 是則華實不同之明驗矣. 顧翻刻者衆, 訛誤實繁, 且有妄爲標目, 如明人之刻《冷齋夜話》者, 讀者病焉.

時彦夙從先生游, 嘗刻先生《姑妄聽之》, 附跋書尾, 先生頗以爲知言. 邇來諸板益漫漶, 乃請於先生, 合五書爲一編, 而仍各存其原第. 篝燈手校, 不敢憚勞, 又請先生檢視一過, 然後摹印. 雖先生之著作不必藉此刻以傳, 然魚魯之舛差稀, 於先生敎世之本志, 或亦不無小補云爾.

嘉慶庚申八月, 門人北平盛時彦謹序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서

정개희(鄭開禧)

하간(河間) 기문달(紀文達)공은 오랫동안 한림원에 계시면서 대문장과 거작을 남기셨으니, 한 시대의 대문호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께서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좋아하셔서 풍자와 꾸짖음으로써 문장을 썼다고 말하는데, 오늘 내가 그 필기를 살펴보았더니 그 뜻이 진실하고 온화하며 체제가 매우 엄격했다. 또한 종지는 대체로 권선징악으로 귀결되고 있어서 그 옳고 그름이 성인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았고, 소설이기는 하지만 정사(正史)나 다름없었다. 기문달공은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벽운가(碧雲騢)」처럼 시비가 전도되지 않았고, 「주진행기(周秦行紀)」처럼 은혜와 원한을 가슴에 품지도 않았고, 「회진기(會眞記)」처럼 재자가인을 묘사하지 않았고, 「비신(秘辛)」처럼 잡스럽게 묘사하지도 않았으니, 그저 군자들에게 내쳐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마도 이 말은 기문달공의 겸손에서 나온 것 같다. 공의 손자 기수복(紀樹馥)이 영남(嶺南)의 관리로 왔을 때, 그를 쫓아다니면서 이 책을 달라고 하는 이가 많아 다시 판각하게 되었다. 기수복은 사람됨이 소박하면서도 학식도 갖추고 있어 능히 그 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고, 집안의 가풍을 떨어뜨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도광(道光) 15년 을미년(乙未年: 1835) 봄날 용계(龍溪) 정개희 쓰다.

河間紀文達公, 久在館閣, 鴻文巨制, 稱一代手筆. 或言公喜詼諧, 嬉笑怒罵, 皆成文章, 今觀公所著筆記, 詞意忠厚, 體例謹嚴. 而大旨悉歸勸懲, 殆所謂是非不謬於聖人者與, 雖小說, 猶正史也. 公自云: “不顚倒是非如「碧雲騢」, 不懷挾恩怨如「周秦行紀」, 不描摹才子佳人如「會眞記」, 不繪畵橫陳如「秘辛」, 冀不見擯於君子.” 盖猶公之謙詞耳. 公之孫樹馥, 來宦岭南, 從索是書者衆, 因重鋟板. 樹馥醇謹有學識, 能其官, 不墮其家風云.

道光十五年乙未春日, 龍溪鄭開禧識.

상주열미초당필기(詳註閱微草堂筆記)》서

채원배(蔡元培)

청대(淸代) 소설 가운데 가장 유행한 세 작품이 있는데, 《석두기》ㆍ《요재지이》ㆍ《열미초당필기》가 그것이다. 《석두기》는 전체가 백화(白話)로 쓰인 장회체(章回體) 평본(評本)으로 주석이 필요 없다. 《요재지이》는 당대(唐代) 단편소설을 정교하게 모방해서 쓴 작품으로, 일반 사람들이 인용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일찍부터 상주본(詳註本)이 나왔다. 반면 《열미초당필기》는 손 가는 대로 쓴 수필형태의 글이라 노인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주(註)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기효람(紀曉嵐)은 박학다식하여 아무 뜻 없이 글을 썼지만, 글자마다 모두 내력이 있어 그 글자를 찾아 증명하지 않으면 자칫 독자들이 진의를 파악하기 힘들다. 이와 같은 점에 착안하여 회문당주인(會文堂主人)이 특별히 상주(詳註)를 달아 다시 찍어내어 《석두기평본》ㆍ《요재지이주본》과 더불어 장차 기씨의 책이 더욱 더 사람들에게 환영받길 바랐다.

중화민국(中華民國) 7년 11월 18일 채원배 적다.

淸代小說最流行者有三, 《石頭記》․《聊齋志異》及《閱微草堂筆記》是也. 《石頭記》爲全用白話之章回體評本至多而無待於註. 《聊齋誌異》倣唐代短篇小說刻意求工, 其所徵引間爲普通人所不解, 故早有詳本. 《閱微草堂筆記》則用隨筆體信手拈來, 頗有老嫗都解之槪. 故自昔無作註者. 然紀曉嵐氏博極群書, 雖無意爲文而字字皆有來歷, 不爲證明, 讀者或不免失其眞意. 會文堂主人有鑒於此, 特詳註而重印之, 以與《石頭記評本》․《聊齋誌異註本》相將從此紀氏之書將益受普通人歡迎矣.

中華民國七年十一月十八日 蔡元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