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11

29. 유굴리(劉屈氂)가 여(戾) 태자를 공격한 것은 창읍왕(昌邑王)의 봉토를 탐냈기 때문이었다

유굴리(劉屈氂)가 여(戾) 태자 유거(劉據)를 공격한 것은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처벌하면서 한 말에 감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잘못된 짓을 한 것이다. 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승상에게는 주공이 남긴 기풍(氣風)이 없구려!”

그 말은 완곡해서 유굴리를 문책하는 뜻은 담겨 있지 않고, 대의(大義)를 설명하여 태자를 꾸짖고 천천히 때를 봐서 태자가 군대를 해산하게 하려 했으니, 어찌 훌륭한 대책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유굴리는 반드시 출전하여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였으니, 이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창읍왕(昌邑王)의 봉지를 탐냈기 때문일 따름이다. 태자가 죽으면 창읍왕이 다음으로 태자가 될 거라는 것은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광리(李廣利)와 결탁하여 외척 세력에 빌붙어 서자를 태자로 세우려 했는데, 그의 이러한 수작은 하루에 쌓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굴리는 곧 처형되었으니, 간사한 자가 천성을 해치고 분수에 맞지 않는 바람을 요행으로 이루려 했다가 죄를 모면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음험한 자가 재상이 되게 했는가? 무제가 총애하는 이비(李妃)에게 빠져서 이광리를 신임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좌지우지 농락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인재를 등용하면서 사적으로 친한 이들의 이목을 빌렸다가 결국 자기 친아들의 목숨조차 지켜주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로다!

30. 사마천, 이릉(李陵)을 위해 잘못을 꾸며 숨기다

사마천은 사심(私心)을 품고 역사를 서술했으니, 반고(班固)가 그의 불충(不忠)을 조롱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이릉(李陵)이 투항한 것은 죄가 상당히 뚜렷해서 가릴 수 없었다. 그가 고립무원의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항했다고 하지만, 보병 5천 명을 이끌고 변방을 나간 것은 자신의 용맹을 자랑한 것이지 무제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출정한 것이 아니다. 이릉의 삼족을 멸하게 되자 그 재앙이 이서(李緖)에게까지 미쳤고, 나중에 이광리(李廣利)가 흉노를 정벌할 때 이릉은 3만여 명의 기병(騎兵)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아흐레 동안 전투를 벌였는데도 이서에게 죄를 떠넘길 수 있겠는가? 만약 이릉이 선우에게 강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추격하여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면, 흉노에게 설마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겠는가? 이릉이 양다리를 걸칠 마음이 있었다면 선우도 어찌 그를 믿고 중병을 맡겨서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한나라 장수와 맞붙게 했겠는가! 사마천은 이릉의 잘못을 꾸며 숨기다가 힘이 모자라자 이릉의 조부인 이광(李廣)을 끝없이 칭송하여 그들이 대대로 쌓은 업적을 내세우려 했다. 사마천의 책은 올바른 도리를 저버리고 사적(私的)인 당파를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이나 하는 말이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장수의 몸으로 적에게 투항하고, 그런 뒤에는 새로운 군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섰으니 그 오점을 씻고 싶어도 이미 검게 물든 흰 천이 다시 흰색이 될 수 없듯이, 크나큰 절조를 이미 잃은 뒤에는 그 나머지도 깨끗이 씻을 수 없게 된다. 관우가 유비에게 복귀한 것은 행운이다. 만약 그가 백마(白馬)의 전투에서 안량(顔良)을 당해내지 못하고 죽었다면 결국 주인을 배신하고 원수를 섬긴 필부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 또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이릉은 “(나는)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한나라에 보답하고 싶다.”라고 했지만, 이것은 소무(蘇武)를 만나자 부끄러워서 둘러댄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배반은 본래 사마천이 꾸며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31. 무제, 상관걸(上官桀)의 아첨에 미혹되어 임종할 때 태자를 보좌해 달라고 부탁하다

충신과 간사한 자는 쉽게 분별할 수 있는데, 마음으로 의심하고 있다 해도 막상 눈앞에 마주하게 되면 쉽게 미혹된다. 무제가 어린 태자를 보필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세 명인데, 그 가운데 상관걸(上官桀)이 가장 높지만 곽광(霍光)과 김일제(金日磾)에 비하면 흑백처럼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가 무제의 눈에 들게 된 일로부터 추측해 보면 그의 행적이 뚜렷하고 그이 마음도 환히 드러난다. 곽광은 대문 문을 드나들 때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고, 김일제는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도 수십 년 동안 곁눈질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실을 돈독히 하면서 올곧은 태도를 잃지 않기 위해 이렇게 행동했다. 그런데 상관걸은 마구간의 말이 말랐다는 질책을 받자 바로 사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하여, 제가 밤낮으로 걱정하시느라 말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사옵니다.”

그러면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관걸은 나라의 안위와 관련된 큰일에 참여하는 대신이 아니라 마구간을 관리하는 신분이니 말에만 신경 쓰면 그뿐이지, 눈물은 왜 흘렸단 말인가? 신중하게 자신의 청렴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군자의 무리이고, 간사하게 남의 환심을 사는 자는 소인의 무리이다. 군자는 자신을 알기 때문에 크나큰 천하에 던져지더라도 그저 자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소인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고 총애를 얻으려고 남의 희로애락에 영합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잊어버린다. 이로 보건대 충신과 간사한 자들이 뒤섞이지 못하는 것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신하이기 때문에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저 칠척(七尺)의 작은 몸이고 눈과 귀가 몸에 달려 있지만 마음은 그 안에 들어 있으니, 충신과 효자는 이 몸으로 군주와 부모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몸과 마음의 준칙(準則)을 실천할 따름이다. 곽광과 김일제는 천성(天性)이 여기에 가깝지만 그저 배우지 못했을 뿐이니, 상관걸을 어찌 그들과 나란히 논할 수 있겠는가? 무제가 곽광과 김일제를 대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상관걸을 대한 것은 그를 제대로 몰랐을 뿐만 아니라 곽광과 김일제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그저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볼 뿐, 상대가 처신하는 방법을 통해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