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10

26.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음덕(陰德)이 인심과 풍속을 망친다

선한 이는 상을 주기 때문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며, 지사(志士)는 그런 상을 받으면 오히려 부끄럽게 여긴다. 소인은 상을 받으려고 선행한 것처럼 꾸미니, 이에 따라 위선이 무성하게 일어나 포상도 남발되게 된다. 이에 세속에 다시 음덕을 얘기하는 이들이 나타나서 그것을 통해 천하에 선행을 권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행을 내세워 귀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것은 구제할 약도 없는 구차한 풍속이다.

음덕설은 후세의 불교에서 도용(盜用)하여 천하의 어리석고 못난 자들을 꼬드겨 자신의 악행을 중지하기를 바라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러나 그 주장을 살펴보면 곤충 한 마리를 살려주거나 밥 한 소쿠리를 베풀면 나중에 무궁한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거나, 죽을 때까지 요행이 없다면 다시 내생에 그런 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채찍질해 몰고 군자를 협박하여 성인의 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잃게 하는 짓이다. 동한 이전에 불교가 아직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이런 주장을 먼저 한 이들은 역사가들이니, 바로 왕하(王賀)의 음덕설이 그것이다.

왕하는 도적을 쫓는 일을 감독하면서 많은 이들을 풀어주었다. 법의 공평함을 어기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무이며, 죄 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 것이 더불어 사는 인정이다. 그런데 왕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려 준 사람이 만 명이니 후손이 흥성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그가 자기만족의 은혜를 팔아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을 품었음을 말해 준다. 왕망(王莽)의 간사함은 왕하가 앞장서서 이끈 결과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왕씨 종족이 결국 멸망하여 만세 동안 난적(亂賊)의 괴수가 되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역사가들은 그가 음덕을 베풀었다고 칭송했고 소인배들은 은혜를 마음에 품었으나 그것이 인심과 풍속을 망치고 불교의 도에 지나친 주장으로 변질되어 그 영향이 아주 오래도록 종식되지 않게 되었다. 근래에 오강(吳江)의 원황(袁黃)이라는 자가 이 음덕설로 천하를 미혹하여 어리석은 이들이 많이 미혹 당했다. 그 역시 왕하가 선행을 내세워 천행(天幸)을 바라다가 결국 구족이 몰살된 일을 알고 있을까?

27. 한나라가 칠과(七科)를 통해 변방병력을 충원한 것은 농업을 중시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뜻이 있었다

한나라는 칠과(七科)를 통해 변방병력을 충원해 북방 오랑캐를 정벌했는데, 가혹한 법이기는 하지만 풍속을 바로자고 농업을 중시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 첫째는 죄지은 관리이니, 이는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지키는 데에 인색하고 자중자애(自重自愛)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도망자이니, 이는 죄지은 백성이 자수하여 외지를 떠돌며 처벌을 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데릴사위[贅胥]이니, 이는 백성이 자신의 부모를 버리고 처가를 따라서 음양(陰陽)의 기강을 어기기 때문이다. 넷째는 상인, 다섯째는 원래 시적(市籍)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고, 여섯째는 부모의 이름이 시적에 올라간 이들, 일곱째는 조부모의 이름이 시적에 올라간 이들이었다. 농부가 힘들여 농사지으면 상인이 속임수로 이익을 획득하니, 농부를 부려서 사대부에게 거만을 떨고, 풍속을 망치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해치는 것이 상인보다 심한 경우가 없다.

상인의 요역(徭役)을 무겁게 하는 것은 주(周)나라 때 상인이 우마차와 타고 다니는 말에 대한 세금을 내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단의 상업을 억제하고 근본인 농업을 숭상하기 위해서였다. 한나라는 옛날과 시대가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정책은 비록 가혹했더라도 재물의 이익을 천시하고 천륜을 중시하며 본업인 농업을 돈독하게 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당나라 때에 이르면 6호(胡) 16국의 오랑캐 풍속을 이어받아 농민을 병사로 징집하기 시작했다. 두보(杜甫)의 시 〈석호리(石壕吏)〉를 읽으면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한나라를 본받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주나라가 남긴 제도에 따라 갑옷과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쓰일 비용을 상인에게서 얻는 것은 만세에 걸쳐 시행해도 될 법령이 아니겠는가?

28. 무제는 재능을 믿었으나 도리에 대해서는 굽혔다

인정이 피어나는 것과 재능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모두 도리상 어느 정도 마땅함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저지하여 과하게 넘치는 것을 경계하기만 한다면 재능과 인정은 올바른 도리를 널리 퍼뜨리는 데에 활용할 수 있다. 재능과 도리가 지나치게 흐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견고하고 올곧은 성정(性情)뿐이다. 그러므로 선왕은 정이 깊고 재능이 아주 뛰어나서 천하의 뜻이 통하게 하고 천하의 일을 완성했음에도 일관되게 도에 순응했다. 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짐이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후세에 법이 없을 것이고, 군대를 내보내 정벌하지 않으면 천하가 불안할 것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노라. 그러나 만약에 후세에도 짐과 같이 행한다면 망한 진나라의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다.”

이런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으니 어찌 현명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후세에 경계를 주는 것이 인정이고, 위대한 법을 세워 중요한 원칙을 성실히 따르는 것이 재능이라면, 천하의 뜻이 통하게 하고 천하의 일을 완성하려는 이는 당연히 이것들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덕을 잃고 천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재능을 이롭게 쓰고 나서 선택할 것이 없고, 인정이 동한 뒤에 다른 곳에까지 넘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제는 신선을 선망하고, 궁전을 건축하며, 행차와 나들이를 사치스럽게 하면서 마치 지금 남아도는 재화를 마음 내키는 대로 써도 괜찮을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지나친 사치와 요사한 무당의 기운이 암암리에 그를 유도하여 인정과 재능이 과하게 넘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재능을 굽힐 곳이 없어서 올바른 도리 앞에 굽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고, 인정을 베푸는 것이 정해지지 않아서 성품에 따라 베풀 곳을 정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얻었다 할지라도 긴 쪽으로 치우치면 짧은 쪽이 있기 마련이다. 무제가 유학을 숭상하며 도리를 공부할 때 동중서와 예관 같은 이들이 도리와 성정을 얘기했지만, 모두가 도리와 성품의 겉껍질만 얘기했을 뿐 정수와 핵심에는 어두워서 자신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경계할 줄 모른 채, 무제가 깊은 생각에 빠져 스스로 천성을 즐기도록 유도했다.

그럼에도 무제가 거기에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소제(昭帝)와 곽광(霍光)이 계승하여 관대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음에도 정책을 바꾸었다는 혐의는 받지 않았다. 송나라 신종(神宗)은 이것을 몰라서 사마광(司馬光)은 삼 년 동안 정책을 바꿨다는 조롱을 받았고, 소인이 선인(先人)의 유지(遺旨)를 빙자해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구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무제의 이 말은 너무나 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