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쇼 베이징에 오다

돤무훙량端木蕻良
돤무훙량의 본명은 차오한원曹汉文(차오징핑曹京平)으로 랴오닝 성辽宁省 창투 현昌图县 사람이다. 일찍이 베이징작가협회 부주석을 지냈다. 1928년 톈진天津의 난카이중학南开中学에서 공부하고, 1932년 칭화대학清华大学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에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했고, 처녀작 『어머니』를 발표했다. 이후 동북 출신 작가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작가가 되었다. 장편소설 『커얼친치 초원科尔沁旗草原』과 『대지의 바다大地的海』, 역사소설 『차오쉐친曹雪芹』 등이 있다.

보따리를 안은 소상인, 소학생 한두 명, 총을 멘 병사, 전족을 한 노파……, 석탄재가 쏟아져 내리듯 열차에서 내린다. 짐꾼들이 베틀 위의 북처럼 바삐 오가는데, 경찰과 탐정들이 기민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다. 호텔의 셔틀버스가 한편으로는 중국 여행 경험이 없는 여행객들을 향해 큰소리로 치근대며 호객을 하고 있고,……다른 한편으로 안면 있는 마부를 향해 눈총을 주고 있다.

모든 게 다시 조용해졌다.

플랫폼 위에 Hotel de Pekin(베이징호텔)이라고 씌어 있는 빨간 머리띠 모자를 쓰고 있는 비대한 몸집의 뽀이 두 사람이 서 있다.

두서너 명의 학생이 순례하고 있다. 외국인 한 사람이 시가에 불을 붙이고 있다.

전등이 갑자기 켜졌다. 군중의 정서가 즉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전용열차가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등불 속에서 갈색의 가죽옷에 파리 스타일의 작은 모자, 선홍색 입술, 희끗희끗한 머리, 넘실대는 화면이 은막 속의 열차로 화했다. 갑자기 차창에 희끗희끗한 머리가 어리었다.

“헤이!”

군중들이 시끌벅적하게 창 밑으로 모여들기 위해 앞으로 내달렸다.

문밖에 A자가 씌어져 있는 객차의 첫 번째 좌석에 77세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정교하게 제작된 중절모가 넓은 이마를 가렸다. 은색의 흰 수염이 넓고 큰 고무 재질 외투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창밖을 차갑게 일별하더니 곧 바로 시선을 돌려 무심하게 응시했다. 그 앞에 앉은 외국 신사 한 명이 아주 예의바르게 군중을 향해 미소를 띠었다. 객차의 입구에는 날씬한 아가씨가 목에 붉은 스카프를 메고 서 있으면서 경쾌하면서도 오만하게 차창에 붙어 있는 머리를 흘겨보았다.

쇼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 머리가 다시 소란스럽게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백색의 물보라, 쇼의 얼굴이 예전의 국제연맹 조사단 전용열차의 차문에서 떠올랐다.

그의 음파가 유서 깊은 베이징의 공기를 빌어 군중들의 귀에 전달된 첫 마디는 “Yes―”였다. 이것은 그가 로이터통신사의 기자 카드를 받았을 때 한 말이었다. 그의 두 번째 말은 “No!”였다. 이것은 그가 어느 중국인 기자가 그에게 몇 분 정도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한 말이었다.

흰옷을 입은 시종이 아주 숙련된 자세로 그를 부축해 열차에서 내렸다. 아주 능숙하게 그 시종의 손에 팁이 쥐어졌다.

이렇게 해서 사과 모양의 얼굴을 한 껑충하게 키 큰 이가 유명한 Peking Dust 위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가슴에는 코에 거는 안경과 작은 카메라, 망원경이 걸려 있고, 오른손에는 가볍고 간편한 행군용 침상과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골프채인지 불분명한 막대도 있었다.

상하이에서의 버나드 쇼. 왼쪽부터 아그네스 스메들리, 버나드 쇼, 쑹칭링, 차이위안페이, 루쉰.

열차 안에서 쇼 앞에 앉아 있던 신사가 아주 시원시원하게 걸어와서는 나에게 악수를 했다. 간단한 문답이 몇 마디 오간 뒤에 나는 사람들에 의해 쇼 앞으로 인도되었다.

역의 문을 나서자 그는 갑자기 느리게 걷던 부인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되돌아와 찾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검은 옷을 입은 노부인을 자동차로 모신 뒤 그도 차 안에 앉았다.

기자 두 명이 카드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쇼는 간단하게 “No, No, No”라고 몇 마디 하는 외에는 그저 한 마디만 말했다. 나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기자 하나가 아주 고집스럽게 쇼에게 같은 차로 베이징호텔에 갈 것을 요구했다. 결국 수행하던 중국 신사 하나가 그에게 알려주었다.

“규정에 따르면 여기(자동차의 앞좌석)는 두 사람만 앉을 수 있어서,……”

결국 그 기자는 저녁 무렵의 바람 속에서 밀감 같은 얼굴을 한 다른 기자와 아주 고심어린 논의를 한 끝에 차라리 류궈호텔六國飯店로 가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진홍색의 자가용 ‘824’ 자동차가 고성의 문안으로 사라졌다. 한 사람이 말했다.

“한 막의 희극이 막을 내렸군.”

.그렇게 군중들은 해산했다.

나는 다시 자동차로 돌아와 용감하게 쇼가 건네준 과자를 들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과자 위에는 어릿광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풍자의 웃음이 있었다. 이 웃음은 일반적인 부르주아계급 학자를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교묘하게 변호하건데, 어쨌든 내 자신은 레이튼 남작을 환영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1933년 2월 23일 톈진天津 『용보庸報』, 황예黃葉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