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9

23. 호자구(瓠子口)에서 황하 물길을 다스린 것은 하지 않느니보다 못했다

황하의 물길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기는 쉽지만 시행하기는 어렵다. 반경(盤庚)은 이렇게 말했다.

재물을 모으지 말고 백성의 살길을 찾아 노력하여 각자 공을 세우도록 하라. 無總於貨寶, 生生自庸.(《尙書》 〈盤庚下〉)

고금을 관통하는 병폐가 모두 이 말에 담겨 있다. 중국의 지형은 키[箕]처럼 생겼으니 서쪽 끝의 산은 키의 가슴[膺]에 해당하고, 남북으로 산맥을 끼고 있으며 그 산맥이 이어져 바다로 치달리니 이것이 바로 키의 양 옆구리[脇]이다. 그리고 중간 부분은 낮게 파인 평원의 형태로 회하(淮河)와 사수(泗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포구로 이어지니 이것이 키의 배와 혀이다. 산에서 가까운 곳은 토질이 윤택하고 점성이 있어서 마르면 단단해지고, 낮고 평탄한 곳은 토질이 건조하고 쉽게 바스러진다. 드문드문 흩어진 모래와 먼지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와 쌓여서 낮은 곳에서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이는데, 산에서 나온 황하가 그 중간을 지날 때 부딪쳐 길을 뚫으면 아무 장애가 없다. 그 물길은 마치 생각이 있어서 바다로 쉽게 돌아가는 길을 미리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그냥 이 길을 골라서 흐를 따름이다.

요·순 시대에는 황하가 산을 나오기도 전에 먼저 막혔기 때문에 산비탈을 등진 채 따라서 재수(濟水)와 탑수(漯水)의 물길을 빼앗아 바다로 들어갔으니, 이 일대의 토질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여 년을 이어오다가 주(周)나라 정왕(定王) 때에 이르러 제방이 터지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황하 물줄기가 산을 등지고 있어서 제방이 상대적으로 제방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대우(大禹)는 그 물길의 기세를 타고 황하를 두 줄기로 나누어 구하(九河)와 소통시킴으로써 예주(豫州)와 서주(徐州)의 재앙을 완화했다. 황하가 우연히 순조롭게 흘러서 대우가 그 기회를 이용해 물길을 다스렸으니, 이는 하늘이 준 행운이 작용한 결과이지 대우가 반드시 만세(萬世)에 이어질 물길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하의 남쪽 제방은 본래 취약해서 나날이 잠식되다가 결국 터질 수밖에 없었고, 터지고 난 뒤에는 그대로 남쪽으로 흐를 뿐 다시 북쪽으로 돌릴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신적인 능력을 가진 대우가 주나라와 한나라 무렵에 태어난다 한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무제가 호자구(瓠子口)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물길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고 북하(北河)가 여전히 소통되고 있어서 억지로 막아 다시 북하를 따라 흐르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 년도 되지 않아서 결국 그 추세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梁), 초(楚) 지역과 회수, 사수 일대는 본래 황하가 반드시 지날 수밖에 없는 지역인지라, 혹시 억지로 물길을 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송나라 때에 이르러 왕안석도 여전히 그 물줄기를 북쪽으로 흐르도록 만들고 싶어 했으니, 그 어리석음은 실로 치료할 약이 없었다고 하겠다.

서주와 예주, 연주(兗州) 이남의 지역은 하늘이 황하의 물줄기가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도록 안배한 곳이다.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어떤 물길을 빼앗아서 흘러가야 비로소 흐름이 안정되어 넘치지 않게 된다. 황하가 물길을 빼앗는 것은 반드시 큰 하천이어야 하니 탑수와 제수, 장수(漳水)는 모두 박방의 큰 하천이다. 하음(河陰)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남쪽으로눈 서주, 북쪽으로는 문상(汶上)에 이르기까지는 물길이 모두 흩어져 흘러서 황하에 물길을 제공할 만한 큰 하천이 없다. 그래서 황하는 마음대로 흐를 수밖에 없어서 어느 지역이든 마음대로 빼앗아 물길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모래와 소금기가 많아서 곡식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하고, 철이나 주석, 목재, 대나무, 뽕, 삼 등도 생산되지 않고 그곳 주민들이 이익을 챙기기 위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어서 교활한 자들은 나날이 부유해지고 우둔하게 성실하기만 한 이들은 나날이 궁핍해지니, 대개 이런 곳은 중국에서도 누추한 지역이라 하겠다. 이렇게 황하가 남쪽으로 흐르고 나서 다시 북쪽으로 물길을 돌릴 수 없으니, 남쪽의 산비탈은 여하(汝河)와 채하(蔡河)를 따라 동쪽으로 흐르다가 첨(灊)과 곽산(霍山)을 지나 강포(江浦)에 이름으로써 황하가 절대 잠식하지 못하는 곳인지라 후세에 물줄기를 다스릴 필요가 없었다. 여러 고을의 척박한 토양을 버리고 주현(州縣)도 자리를 옮겨서 주민의 부세(賦稅)도 경감하고 이주한 이들의 생업을 안배해 주면 나라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거의 없고, 황하를 다스리는 수고도 영원히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조정에서 전부(田賦) 수입이 없어지는 것을 아까워하고, 새로 주현의 건물을 짓느라고 잠깐이나마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며, 토호(土豪)들도 재물을 버리기 아깝고 전답과 움막에 미련이 있어서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며 방해하기 때문이다.

맹저(孟諸)는 늪지[藪]이고 호하(濠河)와 사수 일대의 평야는 돼지와 양을 방목하는 곳이니, 만세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곳으로 황하가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다. 그러므로 수리(水利)를 탐하는 마음이 없다면 황하의 물줄기는 다스리지 않아도 되지만, 뭔가 크게 일을 벌이고 싶다면 황하가 흐르는 방향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낮은 곳을 골라 여러 개의 도랑을 파서 물줄기를 분산시키고, 그 일대의 제방을 모두 허물면 된다. 신적인 능력을 지닌 대우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보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반드시 황하가 범람하여 그 스스로 서주와 사수의 넓고 평평한 포구를 마음껏 씻고 흐르며 커다란 하천의 형세를 이룰 때까지 기다려서 수로 정비를 시행해야 더욱 자연스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되지 않았다면 잠시 이익을 포기하고 황하를 다스리지 않은 채 내버려 둔 채, 후세에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호자구와 선방궁(宣房宮)에 수십 년 동안 바르고 치장해도 그저 장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4. 두주(杜周)가 옥사(獄事)를 지연시키며 연루자를 체포한 폐해

《주역》 〈여괘(旅卦, ䷷)〉의 상사(象辭)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형벌을 시행할 때 밝게 살펴서 신중하고 신속하게 판결하며, 지체하지 않는다. 君子以明愼用刑, 而不留獄.

여괘의 위쪽에 있는 이괘(離卦, ☲)는 밝음[明]을 나타내고, 아래쪽에 있는 간괘(艮卦, ☶)는 그침[止]을 의미하니, 밝고 신중하게 하면 빨리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밝게 살피려고만 하면서 시간의 한도를 두지 않는다면 사건 처리가 한 해가 넘도록 지체되어 천하를 진동하니, 그 폐해가 대단히 심할 것이다.

무제가 두주(杜周)를 정위(廷尉)로 임명하자 사건 하나에 연루되어 증인으로 체포된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적은 경우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멀리는 수천 리 밖에 사는 이들이 옥사(獄事) 때문에 분주했고,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사람이 몇천몇만 명에 이르렀다. 아! 백성이 이 지경까지 고생했다니! 그런데 처음에 그는 본래 사건을 밝게 살펴서 신중하고 신속하게 판결하려 했다. 같은 죄악을 저지른 자가 아니라면 악당 두목과 같은 자의 흉악한 죄를 다 설명할 수 없고,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면 피차간의 변론을 반박할 수 없으며, 억울한 판결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억울함을 사실대로 밝힐 수 없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저절로 밝게 살펴서 신중하고 신속하게 판결하게 될 것이다. 밝게 살펴서 신중하게 판결한 공로에 따라 근거 없이 추궁한 일을 칭찬하면 천하 사람들은 끊임없이 옥에 갇힐 것이니, 밝게 살펴서 신중하게 판결하는 일이 적당한 때에 그칠 줄 모른 채 사건의 판결을 계속 지체한다면, 이는 너무나 잔혹한 처사가 아닌가!

증거가 다 갖춰지지 않으면 판결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운 폐단이 나오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잘못 판결하여 무거운 죄를 너무 가볍게 처벌했다면 사안이 의심스러워서 처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경우일 수도 있고, 가벼운 죄를 너무 무겁게 처벌했다 해도 신중하다고 자부하여 추호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에게 중형을 선고해 버린 경우일 리는 없다. 탐관오리와 토호가 해를 끼쳐서 백성이 이미 그 재앙을 당했는데 조정에서 그 죄를 밝히면 백성들도 마음이 통쾌할 텐데, 왜 굳이 관아에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죄를 밝혀야 통쾌하게 느끼겠는가? 그들이 약한 백성에게 수탈한 것은 이미 잃어버린 것인지라 백성도 애초에 되찾으리라고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편히 살면서 쉬게 해 준다면 시들고 상처받고 남은 부분이나마 점차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다시 천 리 먼 곳을 가며 고생하도록 내몰고, 판결을 오래 끌면서 성가시게 오라고 재촉하고, 여행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곤란을 겪게 하며, 심지어 옥에 가두고 형구(刑具)를 써서 고문하기도 한다. 이는 독초를 먹고 요행으로 살아남은 이에게 또 독약을 먹이는 셈이니, 불쌍한 우리 백성은 왜 불행을 겪고 또 이렇게 밝게 살펴서 신중하게 판결하려는 법관을 만나 시달려야 하는가!

그러므로 간언과 탄핵을 담당한 대간(臺諫)은 소문만 듣고도 상주하여 탄핵해야 하고, 순찰관은 탐문하여 교활한 토호를 체포해야 하며, 사안이 명백하면 번거롭게 증인을 부르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사건의 판결을 지체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법이 엄밀하면 천하가 그 해독을 입고, 밝게 살펴서 신중하게 판결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한 때에 사건을 종결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밝지 않고 신중하지 않은 편이 더 낫다.

25. 무제는 너무 성급하게 도적을 체포했다

간사한 자를 성급하게 다스리면 간사한 자가 더욱 깊이 숨으니, 도적은 그 가운데 더욱 심한 경우이다. 도적질이 발각되면 모두 놀라서 다급히 도망친다. 도적질하는 날은 다들 숨을 구멍을 미리 생각해 둔다. 그러므로 급하게 잡으려 하면 더욱 단단히 숨고, 숨겨 주는 이도 연좌죄(緣坐罪)로 처벌될까 두려워 더욱 꼭꼭 숨긴다. 이렇게 되면 진시황의 위세로도 장량(張良)의 집에 숨은 항백(項伯)을 잡지 못했는데, 하물며 사법부의 담당 관리 하나와 그 휘하의 몇 명도 안 되는 포졸들로 도적을 잡을 수 있겠는가? 시간이 점점 지나면 상부에서도 잡으려는 독촉이 느슨해지고, 도적도 은신처에 오래 머물 수 없으며, 숨겨 주는 이도 지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도회지에서 거리낌 없이 활개 치며 다니는 자도 나타나게 되니, 이 기회를 이용해 체포하면 돼지를 우리에 몰아넣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무능한 관리가 어찌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도적을 염려하겠는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저 죄를 얻어 좌천(貶謫)되는 것뿐이다.

무제는 도적질이 일어났는데 범인을 모두 잡지 못하면 녹봉 이천 석(石)을 받는 군수와 그 아래 자잘한 관리들까지 포함해서 범인 체포를 주관하는 자를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것은 관리들이 도적들의 상황을 숨기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 폐단을 없애고, 도적들이 몰래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으나,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러므로 고조는 〈약법삼장(約法三章)〉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상응하는 처벌을 내린다.[盜者抵罪]”라고만 하여, 처벌은 하되 급하게 서둘지는 않았다. 도적은 많은 이들이 증오하는데, 사람들이 감히 도적을 증오하지 못하고 도적을 잡는 법령을 증오하게 한다면, 도적이 어찌 창궐하지 않겠는가? 도적을 잘 다스리는 이는 시일(時日)에 제한을 두지 않고, 나중에 사면해 주는 관용을 베풀지 않으며, 도적을 체포한 이는 공로를 표창하고, 잡지 못하더라도 죄를 묻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오직 도적을 잡으려고 노력할 것이니 도적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위에서 도를 잃으면 도적이 일어나는데, 누차 붙잡아 법에 따라 처벌한다 해도 어진 이는 오히려 그들을 측은하게 여긴다. 하물며 한때의 노기로 인해 임시변통의 법을 만들어 없앨 수 없는 추세를 만든다면 어찌 되겠는가! 무제는 나라를 잃을 수도 있는 정책들을 펼쳤는데,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