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정전둬鄭振鐸
정전둬는 중국문학연구가로 호는 시디西諦이다. 푸졘 성福建省 출신이며, 베이징의 러시아어전수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런던에 유학하였다. 1921년 문학연구회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이듬해부터 기관지 『소설월보小說月報』의 편집에 종사하면서 창작도 하였다. 문학사 연구에 힘을 기울여 희곡 ·소설, 그 밖의 민간문학 방면에서 처음으로 계통적인 기술記述을 시도하였으며 『삽화본揷畵本 중국문학사』(1932)와 『속문학사俗文學史』(1938) 등을 저술하였다. 항일전 중에는 상하이에 있으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고서적 등의 보존·수집에 전념하였다. 일본군 점령하의 상하이 생활을 그린 『칩거산기蟄居散記』(1945∼1946)가 있다. 중국정부 수립 후에는 문화부 관계의 공직에 있었으며, 1958년 중국문화사절단으로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는 도중 항공기 사고로 죽었다.

그대가 봄에 베이징에 도착한다면 첫 번째로 받은 인상은 아마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쳰먼前門 동역이나 서역에서 내려 역을 나서면 베이징의 잿빛 흙을 밟는 순간 큰 바람이 불어와 그대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바람은 한 덩어리의 진흙 모래를 말아 올려 그대가 조심하지 않으면 이내 두 눈이 감겨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아울러 입 안으로도 미세한 모래가 불어 들어와 이빨 사이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귓바퀴와 눈시울, 그리고 검은 마고자나 양복 외투 위에 금방 누런 잿빛 모래가 쌓인다. 집에 도착하거나 여관에 도착하면 한 바탕 꼼꼼하게 씻어내야만 개운해진다.

“이 빌어먹을 동네 같으니! 바람이 그렇게 불어대고, 먼지는 또 왜 그리 많은지!”

그대는 아마도 아주 불쾌한 마음에 저주의 말을 쏟아낼 것이다.

바람이 하루 종일 휘휘 불어대는 가운데 난로의 은회색 연통과 창호지는 핑팡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시끄러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창에 가득한 황금색에 그대는 내심 기뻐하며 이것이 햇빛이라고 생각하고는 오늘 하루는 유쾌한 마음으로 놀러 다닐 수 있을 거라 여길 것이다. 하지만 바람 소리는 여전히 휘휘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다. 눈을 비비고 이불을 두른 채 침상에 앉으면 곧 낙담하게 된다. 그 누리끼리한 것을 햇빛으로 오인했다가 이게 온 천지에 불어대는 황사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람 소리는 윙윙거리며 여전히 쉬지 않고 있다. 그대는 또 한 번 낙담한다.

하지만 오후가 되거나 이틀 후 정도가 되면 바람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다. 진짜 햇빛이 담장에 밝은 황색으로 비추고 창안으로 들어온다. 따스하고 평화로운 기운에 그대는 금방이라도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잘게 부서지는 듯한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작은 참새가 짹짹거리는 소리가 대부분이다.―마침, 정원에는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한 그루 있어 짙은 붉은 색 봉오리가 맺혀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한다. 대추나무 잎은 한참 밖으로 움트려 한다.―베이징에는 대추나무가 아주 많아 거의 집집마다 정원에 한 두 그루씩 있는 거 같다. 버드나무의 부드러운 가지는 이미 여릿한 황색을 띠고 있다. 거대한 느릅나무만큼은 시커먼 마른 가지에 봄소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방문을 열고 정원에 나와 심호흡을 한번 한다. 아, 그곳에서는 신선한 공기가 생명력을 띠고 있는 듯하다. 그대의 정신과 기운이 절로 맑아지고 상쾌해진다. 햇빛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늘은 끼끔하니 구름 한 조각 없어, ‘남방의 가을 하늘’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그대는 알고 있어야 한다. 베이징이 맑은 하늘을 드러낼 때는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한 것이’, 봄날뿐 아니라 사계절 모두 저 영원히 청명한 기운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햇빛은 그대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따스하게 비춘다.

“참을 수 없어!”

그대는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몰래 외칠 것이다.

그대는 틀림없이 이 자연의 호소에 응해 거리로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대가 부자라서 주머니에 충분한 돈을 갖고 있다면 호기를 부리며 자동차를 탈 것이다. 자동차의 유리창 안에 갇히면, 그대는 어항 안에서 사육되는 금붕어와 같이 생기 없는 생물이 될 것이다. 그대는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한다. 자동차는 무슨 중요한 회의에라도 가듯이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대는 놀러 나온 것이지 회의에 가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모든 자연적인 풍경들을 그대의 뒤로 밀어낸다. 그대는 음미할 수도, 멈출 수도, 마음껏 감상할 수도 없다. 이거야말로 저팔계가 인삼과를 먹은 격이다. 그대는 이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베이징은 그렇게 있는 체하는 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동차를 탄 나그네는 영원히 베이징의 진면목을 만날 수 없다. 베이징은 ‘관광지’이다. 당연하게도 ‘주차간화走車看花’―‘주마간화走馬看花’보다도 살풍경한 짓―하는 인물을 반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대는 ‘양차洋車’를 타야 한다. 주의할 것은 그대가 남쪽 지방 사람이라면 황포차黃包車라 소리를 질러도 인력거꾼들이 그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황포黃包’의 북쪽 지방 발음은 ‘왕팔王八’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부한 대로 “인력거”라고 불러도 그들은 이해 못 할 것이다. 만약 “고무 바퀴 차㬵皮”라 부르면 그들은 그대가 톈진天津에서 온 것을 알고 돈을 더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예 서양식으로 “릭샤”라 부르면 그들도 알아는 듣겠지만, ‘마오毛’ 단위로 인력거 값을 주어야 한다.

옛 베이징의 인력거꾼

‘양차’는 베이징에서 가장 주요한 교통수단이다. 값은 싸고 편안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것이 아주 적당하다. 하지만 대로를 달릴 때, 앞차에 아름다운 아가씨나 서양인이 있고 공교롭게도 그대의 인력거꾼이 젊고 건강한 젊은이라면 그들끼리 경쟁을 하다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예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 근래 베이징의 도로 정책은 아주 괜찮아서, 한적한 거리나 작은 골목, 중요한 인물이나 외국인이 거주하지 않는 곳, 또는 “바람이 안 불면 먼지가 세 자나 쌓이고, 비가 내리면 진흙탕이 되는 거리”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 요충이 되는 구역은 그럭저럭 산보를 할 만하다.

골목 입구를 나와 황성 방면으로 걷다 보면, 점입가경이다. 황금색의 유리기와가 햇빛에 빛을 발하고, 붉은 색 담장은 아주 의미심장하게도 저 ‘특별구’를 에워싸고 있다. 톈안먼天安門에 들어서면 즉각적으로 휘황한 경치에 눈이 쉴 틈이 없게 된다. 그대가 총명하다면, 여기서는 차에서 뛰어내려 산보하듯 걸어야 한다. 용이 휘감고 올라가는 한백석漢白石 재질의 화표 두 개가 중간에 우뚝 서 있어 길게 늘어선 한백석 난간과 세 개의 한백석 아치 형 다리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것은 부귀와 고아한 기상을 조화롭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덕이 있는 노년의 학사대부가 세상 물정을 두루 경험하고 화기火氣가 모두 누그러진 듯한 자태로 불콰한 얼굴을 한 벼락부자의 혐오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봄에 살얼음이 녹게 되면 그리 얕지도 넘치지도 않는 연못의 물이 거울처럼 새파랗게 비춘다. 한 가운데 있는 아치형 다리의 세 개의 구명이 수면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있다.

톈안먼 화표

다리를 지나 북으로 걸어간다. 두터운 성문도 아주 사랑스럽다(여름에 바람 쐬기 아주 좋은 곳). 우먼午門 앞에는 잡초들이 우거져 마치 분칠을 하지 않은 촌부와 같이 그 나름의 멋이 있다. 좌우에 두 줄로 늘어선 작은 집들에서는 이제라도 막 문이 열리면서 명·청대에 있었던 몇 차례의 정변政變을 일러주고 대신과 장군들이 웅성거리며 어가御駕를 따라 출입하는 듯하다. 여기에도 백색의 화표가 두 개 있는데, 약간 누런 색을 띤 것이 한층 더 연륜과 고아함을 느낄 수 있다. 그대가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잠시 북으로 향해 돤먼端門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데, 거기는 역사박물관의 입구로 표를 구매해야 한다―아주 유쾌한 경치를 볼 수 있다. 문을 나서 회색의 궁성 담장을 따라 서북쪽이나 동북쪽으로 걸어가면 후청허護城河의 물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푸른 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태묘太廟나 중산공원中山公園 뒤쪽의 측백나무 숲은 울창한 것이 깊은 산 속의 오래된 묘를 보는 것 같다. 그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대보다 더 느리게 걷는 이들이 있는데, 넓은 소매의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구닥다리 신발을 신은 채 손에는 새장을 들거나 어깨 위에 긴 자물쇠가 채워진 새를 올려놓고 느릿느릿 걸어 다닌다. 어떤 때는 작은 발바리들을 이끌고 가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기세 좋게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그대가 둥화먼東華門이나 시화먼西華門까지 갔다가 되돌아 올 때면 그들 역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대와 마찬가지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유난할 정도로 고요한 물가에서 어슬렁거린다. 어슬렁거리는 것은 베이징 사람들 생활의 주요한 일부분으로, 그들은 그렇게 똑같은 물가나 성벽 아래서 옹근 반나절 동안 어슬렁거린다. 큰 바람이 불거나 큰 눈이 내리거나 아주 추운 날이 아니면 날마다 그리고 매년 늘 똑같다. 그대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영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그들이 몰락한 공자나 왕손이라고 상상한 끝에 그들의 화려했던 과거와 몰락한 오늘을 비통한 마음으로 그리워할 것이다.

둥화먼 옆 후청허에서 낚시하는 사람

“딱!” 하는 소리에 그대는 크게 놀랄 터인데, 그것은 목동이 한 무리의 양떼를 몰고 가며 긴 채찍으로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이다. 그 소리에 이어 1934년 식 자동차가 빵빵거리며 달려간다. 그로 인해 그대의 엉크러진 상념들은 갈갈이 찢긴다.―그대의 비통한 심경이란 건 그저 공허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깨 위에 새를 올리고 개를 몰고 다니는 이들은 몰락한 왕손이 아니라 대부분 새와 개를 길러 먹고사는 장사치들이다.

그대가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 남쪽으로 걸어가면 톈안먼 안에 도착하게 된다. 이번에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걸어간다. 커다란 석판이 깔린 길에는 차마가 다니지 않는데, 앞쪽의 높고 장대한 성루가 그대의 목표가 된다. 좌우는 모두 높이가 사람 머리만큼 자란 관목 숲이다. 그 무렵은 노란 개나리가 한 바탕 시끌벅적한 봄기운을 활짝 펼쳐 보이고 있다. 산당화도 꽃망울이 맺혀 있다. 늦게 피는 꽃나무는 가지 끝이 모두 녹색이다. 이 관목 숲에서 몇 시간 정도 배회할 수도 있다. 산당화가 만개할 때는 그대의 얼굴과 옷까지도 모두 붉은 색의 웃음기가 어리게 된다. 저 백색의 넓고 긴 돌길에서 산보하노라면 이내 유쾌해진다. 마음이 탁 트이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제의 고민거리는 이미 깡그리 잊어먹었다. 그대는 더 이상 베이징에 대해 어떤 저주의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대는 슬슬 [베이징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 시작한다.

남쪽으로 걸어가 쳰먼다졔前門大街의 가장자리를 걷다 보면 동서 쟈오민샹交民巷 입구의 나무 패방을 볼 수 있고, 그대가 기차에서 내린 동역이나 서역을 볼 수 있고, 앞에 우뚝 서 있는 아주 위풍당당한 패루를 볼 수도 있다. 어지럽게 오가는 사람과 차, 말과 화물들, 최신식 자동차도 있고, 아주 오래된 짐차도 있어 그야말로 가장 큰 운수 전람회인 셈이다.

잠시 서 있다 보면 이내 질리고, 두 발 역시 약간 시큰해질 무렵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 아주 싼 값에 인력거를 타고 중산공원 입구에 내릴 수 있다.

이 공원은 베이징에서 아주 특수한 중심지이다. 베이하이北海가 아직 개방되지 않았던 시기에, 이곳은 베이징 유일의 사교 집중 구역이었다. 거기서 그대는 사회의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볼 수 있다.―당연하게도 가난뱅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데, 그들은 몇 푼 하지 않는 문표로 인해 공원 밖으로 쫓겨난 것이다. 그곳에 잠시 앉아 있노라면 수없이 많은 지인들을 금방 불러 모을 수 있다. 그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거나 초청을 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찾아온다. 해당화가 만개하고, 모란과 작약이 활짝 피고, 국화가 만개한 황혼 무렵이면 그곳은 가장 떠들썩한 시장판이 된다. 찻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 빈 자리가 없다. 한 테이블이 일어나면 곧바로 기다리던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운다. 주인은 웃음을 띠고, 종업원들도 웃고 있다. 그들의 수입은 봄에 핀 꽃처럼 풍성하다. 국화꽃이 지고나면 서서히 썰렁해진다.

차 테이블에 앉아 편안하게 몸을 등나무 의자에 맡기면 햇볕이 온몸에 쏟아져 내려 솜옷의 등 쪽이 따뜻해진다. 전후좌우로 사람들이 걸어가며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단상의 모란꽃은 한 송이 한 송이가 대접만큼 크다. 꽃을 감상한다고는 했지만 사실상 눈길을 그저 여기저기 던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때는 눈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곳에서 나른하게 멍 때린 채 반나절쯤 그러고 있을 수도 있다.

한 줄기 훈풍이 불어오면 온천지에 백색의 버들 솜이 제 멋대로 둥글게 돌아다니다 구형球形을 이룬 뒤 담장 모퉁이로 밀려간다. 하늘 가득 날려 다니는 솜 같이 작은 덩어리들은 그대의 얼굴에 부딪히고 콧구멍으로 짓쳐들어온다.

그대가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온다면 몇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뚱뚱한 이도 빼빼마른 이도 큰 나무 아래 공터에서 태극권을 연습한다. 이 운동은 폐병에 걸린 사람들도 끌어들여 참가하게 해 그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간, 이 공원이야말로 폐병 환자들이 가장 활동을 많이 하는 때이다. 피골이 상접한 중년의 사람들이 지팡이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다가―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라지만― 몇 걸음 옮기고는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기침을 해대다 “캭” 하는 소리와 함께 가래를 땅바닥에 내뱉는다. 그 때문에 그대는 다시는 이 공원에 오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공원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아무도 매일 아침마다 벌어지는 저 비극을 떠올리지 않는다.

공원 뒤의 거대한 측백나무 숲도 수난을 당한다. 다연茶煙과 해바라기씨 껍질이 푸르른 측백나무 잎을 누런색으로 바래게 해 숲의 수명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중산공원이 시끌벅적한 것과 대조적으로 몇 십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태묘는 썰렁하기만 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태묘에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적다. 젊은 연인들만 어쩌다 한 두 쌍이 사람들을 피해 이곳에 와서 밀담을 나눈다. 간혹 가다가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고요한 곳에서 산보하고 있다. 이곳의 측백나무 숲은 수백 년 동안 폐쇄되어 있다가 새로 개방된 탓에 아주 건강하고 나무 위에 둥지를 튼 재두루미도 이사를 가지 않았다.

태묘

태묘에 진열된 청대 황제들의 제전祭殿과 침궁을 보지 못한 이들은 그것이 아주 휘황찬란하고 화려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다지 볼 만 한 것은 없다. 노란 비단에 꽃이 수놓아져 있는 침구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게 아니다. 공물을 올리는 탁자 위의 나무로 깎아 만든 기물과 촛대 등등은 부잣집 사당의 것만 못하다. 예전에 명대 사람의 필기를 읽으니 명 효릉에 가서 공물을 참관하니 올려진 것은 동과탕冬瓜湯과 같은 아주 소박하고 저렴한 요리들뿐이었다고 했다. 여기도 황제가 아직 궁중에 있었을 때나 제사지낼 때나 그만 저만 했을 거라 생각된다. 제왕이든 평민이든 무덤 속에 들어가 해골이 되는 건 매일반이고 흠향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따름이다.

다음날 그대는 베이징 성의 북쪽을 유람할 수도 있는데, 그곳은 볼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허우먼後門의 왼쪽 인근에는 국자감國子監과 종루鐘樓, 고루鼓樓가 있다. 종루와 고루는 어느 도시에나 있지만, 베이징의 경우는 특히 웅장하다. 국자감은 예전의 최고 학부로 그곳에는 석고石鼓가 소장되어 있다.―하지만 현재 이 유명한 석고는 남쪽으로 옮겨 갔다.

허우먼에서 서쪽을 향해 걸으면 스차하이什刹海다. 전해 오는 말로는 『홍루몽』에 묘사된 대관원大觀園이 스차하이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평민들의 여름 놀이터다. 북쪽에는 아주 큰 규모의 빙고氷庫가 있었다. 전체 면적을 이루는 것은 논과 연꽃 호수이다.(베이징 사람들의 연꽃 재배는 일종의 업으로 벼농사와 마찬가지다.) 여름에 연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확실히 볼 만 하다. 후이셴탕會賢堂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소나기가 연꽃잎을 때릴 때 연꽃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와 타닥거리며 가늘게 부숴지는 소리는 다른 곳에서는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차양을 친 삿자리의 다탁에서 들으면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으나, 차양에서 물이 새 빗물이 삿자리에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 객이 주인을 쫓아내는 느낌이 든다. 가장 좋을 때는 여름이 지나간 뒤 마른 연꽃이 호수에 가득하고 스차하이의 번잡한 저잣거리도 이미 판을 접을 때인데, 그 때 후이셴탕 누각 위에서 난간에 의지해 빗소리를 들으면 확실히 또렷하게 “남아 있는 연꽃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묘미가 있지만 베이징의 가을은 비가 적어 이런 경지는 쉽게 맛볼 수 없다.

스차하이의 반대편은 베이하이北海의 후문이다. 여기를 통해 베이하이를 들어가 동쪽으로 걸어가면 청신자이澄心齋, 쑹포 도서관松坡圖書館, 팡산仿膳, 우룽팅五龍亭을 거쳐 극락세계에 도착하는데 어느 곳 하나 안 좋은 곳이 없다. 다만 애석한 것은 우룽팅 등은 여름에 사람이 너무 많아 붐빈다는 것이다. 극락세계는 이미 어찌 할 도리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불상도 목이 잘리고 팔이 부러지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옛 정취가 듬뿍 있는 곳은 이 곳뿐이다. 그 곳은 행락객들이 제일 가지 않는 곳이다. 후면에서 남쪽으로 걸어가면 베이하이 이사회 등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도 개방이 되어 있어 다탁이 있지만 아주 썰렁하다. 우롱팅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겨울에는 빙선冰船을 타고 미끄러져 건너면―둥근 섬으로 사면이 모두 물이고 다리 하나와 대문으로 서로 통해 있다. 섬의 중앙에는 백탑이 우뚝 솟아있다. 산세의 높낮이에 의지해 되는 대로 가산假山과 묘우廟宇, 회랑, 작은 방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구불구불하게 공사되어 있는 것이 반나절 유람거리가 될 만 하다.

날씨가 맑은 날 이란탕漪瀾堂의 한백석 난간에 의지해 고요하게 파문이 일지 않는 호수 물을 보노라면,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반사되는 수면에 어쩌다 유람선 몇 척이 띄워져 있고, 백로 몇 마리가 날아가며, 한 무리의 야생 오리 떼가 놀라 꽥꽥대는 것이 그대로 하여금 아련한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겨울은 최악의 시기로 이곳은 빙상장이 열려 청춘남녀가 분주하게 내달리며 떠들어댄다. 그대가 만약 이미 소년의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맑고 고요한 것을, 홀로 노니는 것을, 묵상하기를 좋아한다면, 그대는 이곳에 나타날 필요가 없다.

베이하이의 앞문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진아오위둥챠오金鰲玉蝀橋다. 이 한백석으로 만든 대교는 중난하이中南海와 베이하이를 갈라놓는다. 베이하이의 백일白日은 그린 듯 수면 위에 비치고 중하이의 완산뎬萬善殿의 전경도 또렷하게 보인다. 중난하이 역시 원래는 공원이었으나 지금은 ‘금단의 땅’이 되어버렸다. 단지 동쪽의 일부 지역, 이른바 완산뎬만 개방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작은 데다 구경하러 가는 사람도 아주 적지만, 건물 배치는 아주 훌륭하다. 룽왕탕龍王堂에 길게 늘어선 것은 모두 새로 만든 진흙 소상인데 역겨우리만치 졸렬하다. 그대가 세심한 사람이아면 전각 옆의 작은 집에서 담장 귀퉁이에 놓여 있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두 개의 목조 보살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형태와 면모는 아름답지 않은 데가 하나도 없는 것이 요나라나 금나라 때 유물인 것이 확실하다. 다만 하나는 두 팔이 모두 부러졌고, 다른 하나는 두부가 절반만 남아 있다. 누가 이것들을 주의 깊게 볼 것인가? 신문 지상에서는 오히려 룽왕탕의 신상이 활력 있게 만들어졌고, 명대의 유물이라는 사실만 떠들어대고 있는데, 이게 사실은 민국 3, 4년(1914, 1915년)에 만들어진 최신의 물건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

중난하이의 후문에서 나와 비스듬히 반대편에 있는 것은 베이징도서관이다. 녹색 유리 기와로 새로 지어진 건물은 건축비가 1백 4만 위안 이상인데, 매년 도서 구입비는 오히려 이 금액의 12퍼센트도 안 된다. 고서는 팡쟈후통方家胡同의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과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을 병합했고, 신서는 대부분 의화단사건의 배상금으로 구입한 것이다.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라 불릴 만 하다. 도서관 외부의 화원은 베이하이와 인접해 있는데 역시 백색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싸구려 시멘트로 만들어진 것이라 진정한 한백석은 아니다.

베이징도서관에서 다시 진아오위둥챠오를 건너 동쪽으로 걸어가면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다. 선우먼神武門으로 들어서면 곳곳에서 오래된 사당과 같이 생기가 하나도 없는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제왕가’의 시대에는 수천 명의 궁녀와 환관들이 모여 살면서 짝 없는 남녀들의 악기惡氣가 충천했을 것이다. 소장되어 있는 오래된 유물들은 모두 이미 남쪽으로 옮겨갔기에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선우먼의 반대편은 징산景山이다. 산 위에는 다섯 개의 정자가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 말고는 모두 파괴되었다. 동쪽 산자락은 숭정 황제가 자살한 곳이다. 봄에 신록이 물들 때, 멀리서 징산을 바라보면 녹색의 카펫을 깔아놓은 듯 이상하리만치 여리고 사랑스럽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궁성 전체가 눈 아래 펼쳐진다. 둥쟈오민샹東交民巷 대사관 구역의 무선 통신기, 둥창안졔東長安街의 베이징호텔北京飯店, 싼탸오후통三條胡同의 셰허의원協和醫院이 부조화를 이루며 그대의 주의를 끌 것이다. 그 나머지 가가호호는 모두 만록총중萬綠叢中에 감추어져 있어 기와 한 장, 지붕 하나 보이지 않고 온 도시가 녹색의 바다인 듯하다. 이곳에 가보지 않고서는 베이징 성 안의 수목이 얼마나 빽빽한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대갓집이든 작은 집이든 어느 곳이라고 녹색이 없을까? 북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및 허우먼後門이 잡힐 듯 보인다.

징산에서 바라본 허우먼과 구러우

삼대전三大殿과 고물진열소古物陳列所는 한나절의 시간이 소요된다. 시화먼西華門이나 둥화먼東華門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고물진열소는 고물들이 너무 많이 옮겨져서 현재는 우잉뎬武英殿만 개방되고 있는데, 그래도 볼 만한 것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리궁린李公麟의 『격양도擊壤圖』만 하더라도 반나절의 시간이 걸린다. 묘사된 인물들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 하고 자태가 모두 다른데, 허투른 붓질이 하나도 없다.

삼대전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웅장하다. 전각 앞에서 한백석으로 된 ‘단서丹犀’를 굽어보면 그 옛날 신비로운 기상으로 충만했던 ‘조정’과 수쑨퉁叔孫通이 정해놓은 ‘조의朝儀’가 늘상 있어왔던 신비한 존엄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대가 환상이 풍부하다면, 눈을 감아보라. 아마도 고요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문무백관들이 황제의 명령에 응대하고 알현하며 영민하게 오가는 것이 보이는 듯 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쾌적한 다탁이 있다. 이곳에 앉아 구름이 새겨진 한백석 난간과 아주 세밀하게 조각된 폐도陛道가 일렬로 늘어선 것을 바라보면 화려하고 밝은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들여 베이징 성의 남쪽城南을 돌아보자. 쳰먼을 나서면 상업 지구와 회관 구역이다. 예전에 한족들은 내성에서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이 베이징 성의 남쪽과 외성이 아주 중요한 번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하고 있다. 오히려 유명한 명승지가 몇 개 있어 그대가 머물고 배회할 만 하다. 서쪽에는 타오란팅陶然亭이 있고, 서쪽에는 시자오쓰夕照寺, 녠화쓰拈花寺와 완류탕萬柳堂이 있다. 이 모두가 예전에 문인들이 회합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하릴없이 퇴락하여 노동자들이 새끼를 꼬고, 비단을 짜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만 그루의 버드나무萬柳’라는 것도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다. 타오란팅만은 여전히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내성의 베이하이와 태묘, 중산공원 등을 둘러보았다면, 이런 곳에서는 ‘변두리’라는 느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는 게 없다. 그대는 아마도 한족들을 위해 억울해 할 수도 있다. 20여 년 전 그들은 단지 이곳에서만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내성의 모든 명승지의 경우 그들은 모두 바깥으로 쫓겨났다. 청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집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했던 것은 논외로 한다. 그들은 [내성의 명승지에 살 수 없어] 부득이하게 차선을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성 바깥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몇 십, 몇 백만 명에 달하지 아니한가?

현재도 베이징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로 남아 있는 타오란팅

남성의 오락장은 톈챠오天橋가 중심이다. 이곳은 평민들이 모이는 곳으로 일체의 민간의 오락거리와 싸구려 중고물품이 모두 여기에 있다.

셴눙탄先農壇과 톈탄天壇 역시 웅장한 건축물이다. 톈탄의 공사는 특히 거대하고 호방하다. 모두 원형으로 한 층 한 층의 한백석 난간과 계단, 하늘을 찌를 듯 수없이 많은 커다란 측백나무들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형의 성단聖壇을 에워싸고 있다. 전각의 건축은 둥근데, 사방의 계단과 난간 역시 모두 둥글다. 이것은 삼대전의 네모난 것과 아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커다란 측백나무 밑을 배회하노라면, 형언하기 어려운 회고의 감정에 이끌리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유람하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베이징에 좀 더 머물게 되면 베이징의 생활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생활이라는 것은 쾌적하고 느릿느릿하며 음미하고 누리면서도 절대적으로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한 무리의 낙타 떼가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안온하고 평화롭게 한 걸음 한 걸음 목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 바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으면서. 저 커다란 동물들의 눈 속에 평화와 관용,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굴욕을 견뎌내는 성정이 드러나 있다. 이것이 바로 베이징 생활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대는 이렇듯 웅장한 건축물이나 쾌적한 생활과 대조적으로 지하의 어두운 생활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대에게 ‘잡합원雜合院’에 들어가 볼 기회가 생기면, 열 몇 가구의 남녀노소가 작은 뜰 안에서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정경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진흙 위에 기어 다니고, 아낙들은 누렇게 뜬 얼굴로 하루 종일 화가 난 듯 원망스런 기색을 띠고 있다. 때 없이 기침 소리가 집 안에서 새어 나온다. 공기는 최악이라 그대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반나절도 머물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잡합원’이야말로 노동자, 인력거꾼의 거주지이다. 베이징의 생활이 쾌적한 것은 첫째로 집이 넓고 정원이 깊으며, 햇빛과 공기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 해당하는 말이다. 8∼90 퍼센트 이상의 인구는 그악스런 ‘잡합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북성과 남성의 외진 골목의 경우 상당수의 사람들이 ‘잡합원’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훨씬 더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 가족의 몇 식구가 바지 하나 옷 한 벌로 살아간다. 그들은 땅 밑에 굴을 파고 산다. 한 사람이 옷을 입고 외출하면 집 안에는 벌거벗은 사람 몇이 그 안에 서 있어야 한다. 동굴에는 볏짚이나 찢어진 신문지 같은 걸 깔고 온기를 얻는다. 이게 무슨 삶이란 말인가!

해마다 겨울이면 옷도 입지 못하고 굶주린 이들이 길 위에서 얼어 죽는다. 해마다 겨울이면 죽을 나눠주는 곳이 몇 군데 문을 연다. 그걸 먹으러 오는 이들은 모두 끔찍스럽게 가난한 이들이다. 그런데 옷이 없어 죽을 나누어주는 곳까지 올 수 없음에랴!

‘아홉 개의 심연 아래 또 아홉 개의 심연이 있다.’ 베이징의 표면은 그렇게 영락하고 파괴되어 가도 아직까지는 도시의 번화함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면이 그렇듯 엉망진창이고 고통스럽고 어두울 거라 생각 못할 것이다.

하루 종일 삼해 공원을 배회하다 톈챠오에 이르면 죄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대, 유람을 나선 과객인 그대가 그것을 보게 되면,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이 고성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지옥에 들어가지 않겠다.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는 류의 말을 하게 될까?

1934년 11월 3일 쓰다

(1934년 12월 『중학생』 제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