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형태 3

3) 소설평점 형태 그 첫 번째: ‘평림(評林)’과 ‘집평(集評)’

일종의 평점 형태로서 ‘평림’은 명대 위샹더우(余象斗)의 소설 간본에서만 보이는데, 소설평점사에서 하나의 특이한 예로, 현존하는 소설평점본은 세 가지가 있다.

《음석보유안감연의전상비평삼국지(音釋補遺按鑒演義全像批評三國志)》[만력 20년 솽펑탕(雙峰堂) 간본]
《수호지전평림(水滸志傳評林)》[만력 22년 솽펑탕(雙峰堂) 간본]
《신간경본춘추오패칠웅전상열국지전(新刊京本春秋五覇七雄全像列國志傳)》[만력 34년 싼타이관(三台館) 간본]

이상의 세 가지 간본은 《수호지전평림》이 ‘평림’이라는 두 글자를 직접 쓴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종은 모두 표지에, 전자의 경우 “안감비점연의전상삼국평림(按鑒批點演義全像三國評林)”이라 제(題)하고, 후자의 경우 “안감연의전상열국평림(按鑒演義全像列國評林)”이라 제했다. 이 세 가지 간본은 형태상 모두 “상평, 중도, 하문(上評, 中圖, 下文)”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대 소설 간본 중에서만 보이는 체례로 그 평어는 후대 소설평점의 미비에 해당한다. 위샹더우의 ‘평림’ 본은 소설평점의 각도에서 볼 때, 그다지 높은 이론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고, 평어는 자못 간략하며, 매 칙의 평어는 모두 “시사를 평함(評詩詞)”, “리쿠이를 평함(評李逵)” 등과 같은 표제를 갖고 있다. 다만 이렇게 평점과 그림, 본문이 서로 어울러진 간본의 형태는 오히려 통속소설의 전파에 일정한 가치를 갖고 있다. 위샹더우는 소설의 작자, 평자, 출판자의 신분을 한 몸에 체현한 통속문학가로 현재 그가 간행했다고 알려져 있는 소설은 20종에 이른다. 그 형태는 평림본을 제외하면, 모두 ‘상도하문(上圖下文)’이다. 그래서 이것은 보급을 염두에 둔 통속문학 독본으로, 평점 역시 소설의 보급을 위해 삽입되었다.

‘평림’이라는 단어는 만력 연간의 서적 간본 중 비교적 잘 보이는데, 그 함의는 위샹더우 간본과 명백하게 달랐다. 일반적으로 이른바 ‘평림’은 집평(集評)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만력 초년 링즈룽(凌稚隆)이 집(輯)한 《사기평림(史記評林)》이 그러하다. 쉬중싱(徐中行)의 <각사기평림서(刻史記評林序)>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싱(吳興)의 링즈룽이 《평림》을 편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쓰마쳰이 《사기》를 완성한 것도 반드시 가업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링 씨 집안은 역사학으로 뛰어난 바, [그 아비인] 링웨옌 때부터 대략 갖춰졌지만, 큰형인 링즈저가 채록한 것까지 추가되다 보니, 취지가 달라 결론이 같지 아니 하였다. 링즈룽은 그 범례에 따라 선친의 뜻을 완성했는바, 숲처럼 모아 쓰마쳰 뒤에 첨부했다.(凌以棟之爲評林何謂哉?……推本乎世業, 凌氏以史學顯著, 自季墨有槪矣, 加以伯子稚哲所錄, 殊致而未同歸, 以棟按其義以成先志, 集之若林而附于司馬之後.)”

그래서 이른바 ‘평림’이라는 것은 평어를 “숲과 같이 모았다(集之若林)”는 뜻이다. 링즈룽의 <《사기평림》범례>에서 칭한 바에 의하면, 이 책에서 모은 평어는 “고금에 이미 간행된 것들(古今已刻者)”로 이를테면, 니원졔(倪文節)의 《사한이동(史漢異同)》, 양성안(楊升庵)의 《사기제평(史記題評)》, 탕징촨(唐荊川)의 《사기비선(史記批選)》 등이 있다. “베껴서 전한 것(抄錄流傳者)”으로는 “허옌천, 왕쿠이예, 둥쉰양, 마오루먼 등 몇 가(何燕泉, 王魁野, 董潯陽, 茅鹿門數家)”가 있고, “특히 《사통》이나 《사요》와 같은 여러 사람의 책을 보고,……《사기》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각각 본문 위에 표시를 해 드러내었다.(更閱百氏之書, 如《史通》, 《史要》,……凡有發明《史記》者, 各視本文標揭其上)” 동시에 편집자는 또 《사기》가 유전되는 중의 몇 가지 중요한 평주본, 이를테면 쓰마전(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과 장서우이(張守義)의 《사기정의(史記正義)》, 페이인(裵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의 내용을 그에 상응하는 본문 속에 나누어 집어넣었고, 또 미비 중에는 때로 자기의 안어(按語)를 덧붙였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고금의 평어를 한 권에 모아 놓은 평점 형태다. 만력 22년에 간행한 《신준상정주석첩록평림(新준詳訂注釋捷錄評林)》 역시 명확하게 “수찬 리쥬어 집평(修撰李九我集評)”과 “한립 리팅지 집평(翰林李廷機集評)”이라고 밝혀놓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이른바 ‘평림’이라는 것이 집평을 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위샹더우의 ‘평림’ 역시 그와 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위샹더우의 ‘평림’의 미비를 보면 다른 평자는 표시되어 있지 않고 반대로 속표지(扉頁)의 제서(題署)와 ‘지어(識語)’ 가운데에는 모두 위에 “서림 원타이 위샹더우 평석(書林文台余象斗評釋)”이나 “이제 위샹더우가 개정하고 증평했다(今余子改正增評)” 등의 글자가 서(署)되어 있는 것으로 의심할 바 없이 평점이 위샹더우의 손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책 이름에 서적 유통에 비교적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평림’이라는 단어를 표기한 것은 아마도 위샹더우가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를 불러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일 터인데, 이렇게 간행할 때 허위로 날조해서 사람들을 속인 것은 위샹더우가 낸 책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소설평점 중의 ‘집평’은 청대에 출한 것으로, ‘집평’은 고대의 경전에 대한 주석이나 사서에 대한 주평(注評), 문학 선평에서 흔히 보이는 체례로 고대 문헌의 전파와 연구에서 매우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 ‘집평’이라는 단어는 소설평점사에서 나타난 적이 없지만, 집평의 의미를 갖고 있는 소설평점은 오히려 드물지 않게 보이는데, 그것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동시에 여러 명의 평점을 청함으로써 소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비교적 초기의 것으로는 청 순치 연간에 간행된 《여재자서(女才子書)》에 보인다. 이 책은 옌수이산런(烟水山人) 쉬전(徐震)이 지은 것으로 모두 12권이며, 매 권마다 한 명씩의 재녀(才女)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권말에는 모두 총평이 있으며, 평자는 댜오아오써우(釣鰲叟), 웨린주런(月鄰主人), 환안싼런(幻庵三人) 등으로 때로 작자의 자평도 있는데, “자기(自記)”라 서(署)했고, 매 권마다의 평어는 2, 3, 4조 등으로 일정치 않다. 강희 연간에 간행된 《여선외사(女仙外史)》에는 이러한 형식이 정점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쓰였다. 이 책의 평어는 본문의 앞의 서(序)와 평, 그리고 회말총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책의 평점에 참가한 이는 67명 남짓으로 그 가운데는 류팅지(劉廷璣), 천이시[陳奕禧; 쟝시(江西) 난안(南安) 군수], 예난톈[葉南田; 광저우 부(廣州府) 태수], 바다산런(八大山人) 등과 같은 고관대작이나 문단의 명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은 이름을 가탁했지만, 이렇게 방대한 평점 진용을 갖춘 것은 소설평점사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가경 연간의 《경화연》 평점 역시 집체 창작 활동이다. 이 책의 평점자로는 쉬샹링(許祥齡), 샤오룽슈(蕭榮修), 쑨지창(孫吉昌), 쉬안즈(喧之), 멍루(萌如), 허청(合成), 예청(冶成) 등 몇 명에 이른다. 쉬샹링은 100회 회말총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을 이제 막 몇 권 읽었을 때, 내가 마침 다른 일이 생겼는데, 돌아와 보니 판각이 이미 절반 넘게 끝나 있었다. 이에 읽어본 몇 책 분량에 대해서만 좁은 소견(이 미치는 바)을 덧붙이고, 청맹과니의 몇 마디 말을 각 편의 머리에 두었는데, 만에 하나라도 그에 합당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몇 년 전 이 책의 중간 부분 10여 권을 읽었던 것을 기억해보면, 그 가운데 구성이 치밀한 부분과 묘사가 뛰어난 곳이 지금도 눈앞에 선한데, 그것을 하나하나 지적해내지 못한 것이 실로 한스러웠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여러 벗들이 이 책의 회목을 정한 것을 은근히 기뻐하면서, 나보다 앞서 그것을 심득한 이들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또 어찌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겠는가!(此集甫讀兩卷, 余適有他役, 及返而開雕已過半矣. 惟就所讀數本, 附管見所及, 盲瞽數語于各篇之首, 未識有當于萬一否? 弟回憶數年前捧讀是書中間十餘卷, 其中細針密線, 筆飛墨舞之處, 猶宛然在目, 而竟不獲爲之一一指出, 實爲恨事. 然竊喜諸同志爲之標題, 諒有先得我心者矣, 又何恨焉!)

이것으로 이들 평점자들이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친구사이로, 《경화연》을 감상하고 비평하던 ‘살롱’ 식의 비평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집평’의 두 번째 방식은 소설평점의 부단한 누적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주로 명청 양대의 소설 명저에 대한 평점 중에 나타난다. 이러한 방식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채용한 것은 청초의 《삼국연의》 간본으로, 이를테면 청초 이샹탕(遺香堂) 간본 《회상삼국지(繪像三國志)》의 경우 평어는 무명씨의 방비(旁批)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리줘우 평본을 답습한 것이다. 청초 량헝탕(兩衡堂) 간본 《리리웡 비열 삼국지(李笠翁批閱三國志)》의 평점은 어떤 것은 마오 본 《삼국연의》의 협비와 같고, 어떤 것은 이샹탕 본의 방비와 같다. 당연하게도 이들 간본은 명확한 집평 의식 없이 단지 서방(書坊)의 일종의 장사 수단일 따름이다. 청대에 집평 의식을 명확하게 갖고 있던 평점본으로는 《유림외사》, 《홍루몽》, 《요재지이》 이 세 가지 평본 계열이 있을 뿐이다. 《유림외사》 평본으로 현존하는 것은 와평(臥評) 본과 치성탕(齊省堂) 평본 그리고 톈무산챠오(天目山樵) 평본이 있다. 뒤의 두 종의 평본은 모두 와평 본을 저본으로 하여 와평 본의 평어를 모두 싣고 있는데, 그렇기에 하나의 평점은 부단히 누적되는 간행 과정에 불과하다. 《요재지이》에는 왕스전(王士禎)과 허서우치(何守奇), 단밍룬(但明倫), 펑전롼(馮鎭鸞) 등 사가의 평이 있는데, 그 기본적인 정황은 다음과 같다.

《비점요재지이(批點聊齋志異)》[도광 3년, “신성왕사정이상평, 남해하수기체정비점(新城王士正貽上評, 南海何守奇體正批點)”이라 제(題)했다.]
《요재지이신평(聊齋志異新評)》[도광 22년, “신성왕사정이상평, 광순단명륜신평(新城王士正貽上評, 廣順但明倫新評)”이라 제(題)했다.]
《요재지이합평(聊齋志異合評)》[광서 17년, “신성왕사정이상평, 부릉풍진란원촌, 남해하수기체정, 광순단명륜운호합평(新城王士正貽上評, 涪陵馮鎭鸞遠村, 南海何守奇體正, 廣順但明倫雲湖合評)”이라 제(題)했다.]

이 평점의 누적성 역시 매우 분명하다. 《홍루몽》 평점 역시 그러하다. 《홍루몽》 고본(稿本) 단계에서 이른바 ‘즈옌자이 비평본’ 자체는 일차적인 집체 평점 활동이다. 그러나 건륭 56년(1791년) 청웨이위안(程偉元), 가오어(高鶚)의 목활자 본이 세상에 나온 뒤 가경 이후 평본이 속속 나왔는데, 집평(集評) 성격의 간본 역시 종종 출현했다. 이를테면, 광서 연간의 《증평보도석두기(增評補圖石頭記)》에는 “왕시롄(王希廉), 야오셰(姚燮) 평”이라 서(署)했지만, 수록된 평어에는 타이핑셴런(太平閑人)의 <독법>, <보유(補遺)>, <정오(訂誤)>와 밍자이주런(明齋主人)의 <총평> 등도 수록되어 있다. 광서 10년의 《증평보상전도금옥연(增評補像全圖金玉緣)》 역시 “왕시롄, 장신즈(張新之), 야오셰 평”이라 서했으나, 실제로 평어는 이제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소설평점의 집평 활동은 청대, 특히 청말 시기에 이미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다. 이와 별도로 소설평점사에는 평점본에 대한 평점도 출현했는데, 이를테면 황샤오톈(黃小田)의 《유림외사》 와평(臥評) 본에 대한 평점과 원룽(文龍)의 《금병매》 장주포 본에 대한 평점이 그것이다. 이들 평본은 비록 미간행되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주목할 만하다.

당연하게도 ‘집평’은 중국 고대 문학전파사에서 시문 비평과 같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집평 역시 사실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작업은 20세기 5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중시되었고, 고전소설 명저의 ‘회평본(會評本)’이 잇달아 나와 연구자와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