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7

한무제漢武帝

17. 무제가 삭방(朔方)과 신진(新秦)으로 백성을 이주시켜 변방이 튼실해지다

무제는 백성을 너무 고생시켰으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조치는 성공적이었다. 창고를 비워 구휼하고, 식량을 빌려주어서 백성을 구제하게 해 준 부자들을 표창했으며, 그래도 부족하면 변통을 부려서 재해를 당한 백성 70여만 가구를 삭방(朔方)과 신진(新秦)으로 이주시켜 현관(縣官)에게 관리하게 하여 생업을 마련해 줌으로써 즐겁게 살도록 해 주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기꺼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고을에 안주했고, 그에 따라 변방도 튼실해졌다. 이 정책은 조조(鼂錯)가 예전에 제기한 것이었다. 조조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았지만, 무제는 때를 타서 백성을 이롭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때를 잘 이용하면 재앙을 복으로 바꿀 수 있으며, 나라의 창고는 비더라도 그 덕분에 백성이 살고 변방의 피해가 완화되었으니,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면서도 아무런 손해가 없는 정책이 아니겠는가! 역사서에서는 무제가 그 정책으로 억(億)에 가까운 재물을 낭비했다고 폄훼했는데, 그렇다면 백성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부고(府庫)를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 있었어야 현명한 처사였다는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비방한 책이라서 모든 것을 다 비방했다.

18. 이광(李廣)은 명성이 높았으나 장수로 임명하기에는 부족했다

명성이 높다고 해서 문사(文士)를 발탁하면 장차 반악(潘岳)을 육기(陸機)의 지위로 끌어올리고, 이연년(李延年)을 사영운(謝靈運)에 비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큰 손해를 끼치거나 이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높낮이와 경중의 균형을 잃어서 오히려 비판적인 공론(公論)이 일어날 것이다. 하물며 명성이 높다고 해서 장수로 등용하면 어찌 되겠는가! 장수는 백성의 생사와 나라의 존망에 관계된 사람이다. 그런데 세속의 백성이 어찌 알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것이며, 사대부들이 어찌 알고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분개하겠는가? 나라의 존망과 안위에 관련된 중요한 임무를 무능한 이에게 준다면, 설령 수많은 백성이 그를 칭송한다 한들 왕조가 하루아침에 패망하는 것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광이 정벌을 담당하여 선우(單于)와 맞대결을 펼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하는 것은 세속에서 교묘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인데, 악취미를 가진 사대부들은 나라의 안위가 자신들의 마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얘기한다.

이광은 변방을 나가서 공을 세운 적이 없으면서 ‘운이 나빠서’ 그랬다고 핑계를 댔는데, 이는 어쩔 방도가 없어서 임시로 둘러댄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죽자 그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 눈물을 흘렸으니, 그가 명성을 날리려고 작은 은혜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군대의 일은 전진하고 후퇴하는 시기를 일관된 마음으로 조정해야 하며,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전략이 누설되지 않아야 하는데, 세속의 용렬한 이들이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광이 이런 명예를 얻은 것은 집안에 재산이 여유롭지 않고 사대부들과 어울리며 종종 비분강개하는 담론을 잘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아! 그는 웃음 띤 얼굴로 호감을 사고 자잘한 은혜로 감동을 주었을 뿐이니, 사대부와 세속의 일반 사람들이 인물을 칭송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저 이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에게 생사가 걸린 위급한 때에 하늘과 존망을 다투고 사람과 승패를 다투는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위청이 이광에게 동쪽 길로 나가서 선우의 예봉을 피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의 사적인 마음 때문이 아니라, 은밀히 무제의 경고──이광이 이제 늙었다는──를 들었기 때문에 그가 전투에서 패배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출전할 무렵에 무제는 이광을 내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그가 굳이 출전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사대부들이 다들 칭송했는데, 무제도 그저 그 충정에 감사하면서도 정벌의 전체적인 임무는 그에게 맡기지 않았으니, 그가 이광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훌륭한 장수가 있는데 임용하지 않아서 조(趙)나라가 염파(廉頗)를 파면하여 멸망하고, 연(燕)나라가 악의(樂毅)를 의심하여 참패하게 한 일도 있었는데, 무제는 어떻게 사막에서 흉노를 격파하는 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을 시기하여 견제하면 진여(陳餘)가 이좌거(李左車)와 뜻이 맞지 않아서 조나라와 관계를 끊고, 제갈량은 위연(魏延)의 계책을 채택하지 않아서 위(魏)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어째서 위청은 치안산(寘顔山)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광을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 두고 잠시 흉노를 억제하게 한 것은 장수를 부리는 훌륭한 방법으로서, 사대부나 세속의 용렬한 이들이 그것을 헤아릴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이광이 동쪽 길로 나갔다가 길을 잃었으니, 장수로서 그의 능력을 대략 알 만하다. 그가 스스로 목을 그어 죽은 날, 천하 사람들이 그를 위해 눈물 흘릴지언정 한나라 사직과 백만 병사의 목수을 위해 통곡하지 않았으니 더 나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광이 장수가 된 것은 (자신의 용맹과 지모 덕분이라기보다는) 과감히 전진한 병졸들의 기개 덕분이다. ‘수레에 시신을 싣고 돌아오는[輿尸]’ 비극적인 결과를 무제는 이미 오래전에 경계한 바 있다.

악비(岳飛)가 중원을 수복할 수 있었는지는 내가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사대부들에게 칭송을 받고 세속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니, 바로 이 때문에 그는 그 중대한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명을 받아 대군을 지휘하게 되어 목숨을 걸고 강적과 싸우는 상황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 지휘해야 하는데, 어찌 담소로 달래며 뇌물과 서신을 주고받는 자잘한 지혜로 무능한 자들이 기꺼워 흠모하는 헛된 명성을 얻은 이가 그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19. 급암이 지방관으로 나가 이식(李息)에게 장탕을 내쫓으라고 부탁하다

충신과 간신은 양립할 수 없다. 군주의 조정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서 있는 이들은 참소를 염려할 필요 없고 비판과 조롱을 피할 수 없지만, 반드시 나라를 위해 간사한 자들을 제거하여 사직을 안정시켜야 하나니, 이것이 바로 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봉록을 받아먹으면서 나라의 재난을 피할 방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벼슬자리에 있는데 책무를 위임하지 못해서 벼슬을 버리고 떠나 은거한 채 외부와 담을 쌓은 채 재야에서 지낸다면 그 역시 소인배에게서 멀리 떨어져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 반드시 그들을 이겨서 스스로 통쾌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첨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나라를 병들게 해놓고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지, 그들과 원수가 되어서 기어이 벼슬을 얻어 그들과 싸워 이기려 하기 때문은 아니다.

급암이 장탕을 미워하는 것은 마땅한 이유가 있다. 군주가 그에게 간언의 임무를 맡겼다면 온 힘을 다해 공격하여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준 군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리고 간언하는 직책을 잃고 조정 밖으로 나가 군수가 되었더라도 회양(淮陽)에서 충심을 바쳐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야 한다. 그런데 굳이 다시 중랑(中郞)이 되어서 장탕의 잘못을 더 적발해 탄핵함으로써 영욕을 다투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라의 공적인 시비를 끌어다가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 하면서 권력을 쥐고 반드시 승리할 방도를 추구했으니, 이는 기세를 부린 것일 따름이지 자신을 뜻을 실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한 것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는 굴원은 쫓겨나자 군주가 소인배를 중용한 데에 대한 원망을 잊지 않았는데, 잘못된 것이냐고 묻는다. 그런데 굴원은 초나라의 종신(宗臣)이고, 장의(張儀)와 근상(靳尙)이 중용된 것은 초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무렵이었으니, 급암을 어찌 굴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실의에 빠져서 이식(李息)에게 장탕을 쳐내라고 부탁하여 기어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것은 기세를 부린 것일 뿐이지 군자가 할 도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