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12 푸젠성 객가 안정보

푸젠성 객가 안정보 – 한 마을을 품어들인 향신의 고귀한 생각

위룡옥은 객가 건축문화에서 반원형의 위룡옥이 후면을 둘러싸면서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변모해간 위룡옥 가운데 한국의 일반 여행객에게도 권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집이 있다.

푸젠성 중부 싼밍시三明市 동남쪽 40km 거리에 있는 화이난향槐南乡 양터우촌洋头村의 안정보安貞堡라는 민간주택이다.

안정보는 건축면적만 5790㎡(약 1750여 평)나 되고, 방이 360여 칸이나 되는 대형 주택이다. 좌우로 45m, 전후로 70m나 되고, 전면 높이가 9m나 되는 거대한 주택이다. 안정보라는 이름 자체에 이미 작은 성堡이라 되어 있고, 정면 중앙에는 묵직한 철 대문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전면의 좌우 끝에는 총과 대포를 갖춘 포루炮樓가 호위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출되어 있으니 우리 관념으로는 주택이 아니라 성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외벽의 하부가 워낙 단단해 보이고, 지붕이 앞에서 뒤로 한 칸 한 칸 높아지는 층차가 한눈에 보이며, 처마의 끝선이 날렵하게 치켜 올라가 있다.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박힌 거대한 거북이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상대방을 응시하며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다. 상하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약점을 잡아 공격할 곳이 없어 보인다. 앞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구릉이 이어진 이 거대한 안정보는 멀리 보이는 순간부터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담장 안에 마당이 있고 여러 채가 분산된 듯 합쳐지는 우리네 전통주택과 는 다르다. 하나의 독채 주택이 이렇게 거대한 몸집을 뽐내고 있고 앞에는 넓은 연병장까지 펼치고 있으니, 건축학도가 아닌 일반 여행객도 구경 삼아 찾아갈 만한 곳이다.

안정보는 청 말기 1885년에 착공해서 14년간의 공사를 거쳐 완공했다. 이 지역의 유지였던 지점서池占瑞와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다. 그래서 지관성池貫城이라는 별칭도 있다. 당시는 혼란기로서 치안이 부실해 도적 떼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가산을 보호하고 일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성채 스타일로 지은 것이다. 객가인들의 토루와 같은 맥락이다.

지씨 부자는 안정보를 짓기 위해 수차례 베이징에 가서 자금성의 황궁 건축과 그 외 여러 건축물을 둘러보고 벤칭마킹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도적 떼들이 쳐들어온 게 수차례였고, 그 가운데에는 보름 가까이 격렬하게 공격받은 적도 있었으나 모두 막아냈다고 하니 그 방어력은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대문 앞마당에는 축구장 하나는 족히 들어갈 만한 연병장이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앙에는 석굴 입구처럼 깊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아치형의 대문이 있고, 대문 상단에는 당호가 새겨져 있으며, 대문의 좌우에는 당호를 풀어쓴 대련이 있다.

安于未雨綢繆固(안위미우주무고)
貞觀沐風謐多(정관목풍밀정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미리 단단히 준비했기에 편안하고, 수고로이 노력했기에 평안하여 바른 도리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미우주무未雨綢繆는 올빼미가 비가 오기 전에 둥지의 문을 닫아 얽어맨다는 뜻이다. 《시경》에 나오는 말인데, 전란에 대비하여 큰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목풍沐風은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말로서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의미다. 도적 떼가 들이닥치면 인근 주민들을 안정보로 들이고 그들과 합심하여 방어함으로써 대의를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안정보의 전체 구조는 중축선을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이고, 전면은 사각형이고 후면은 반원에 가까운 곡면이다. 이 곡면으로 된 부분(아래 사진의 우측부분)이 앞에서 살펴보았던 위룡옥과 같은 개념이다. 단지 안정보의 위룡옥은 별채가 아니라 외벽 안에서 하나로 밀접하게 결합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외벽은 안정보를 찾아가는 이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다. 외벽은 하단과 상단이 다른 축성방법으로 지어졌다. 하단은 큼지막한 둥근 바위들을 4m 두께로 쌓아 올리고 그 틈새를 진흙으로 견고하게 메워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했다. 상단은 토루의 외벽과 같은 항토장夯土墻이다. 하단의 축조법은 일본의 성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곡선을 띠고 있다.

외벽 안으로는 2층 목가구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천두식과 태량식이 혼합되어 있다. 중앙은 당옥과 같은 개념으로 삼진 구조이고, 내부의 통풍과 채광을 위해 전·중·후 세 개의 천정天井이 설치되어 있다.

외벽 바로 안의 1층은 주거공간이지만, 2층은 방어용 복도가 전체 외벽의 벽면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복도에는 바깥을 살필 수 있는 조망창(아래 우측 사진. 좌측 사진은 조망창으로 내다본 안정보의 정면으로, 아래에는 대문이, 멀리는 동쪽 포루가 보인다)이 90개나 설치되어 있고, 사격공도 180개나 된다. 그야말로 요새다.

전체적으로 전면은 낮고 후면은 산에 기대어 약간 높아 배수에 적합하다. 지붕은 단속적으로 높아지면서 독특하고 멋진 외관(아래 사진: 좌측 후방에서 본 안정보)을 연출한다.

안정보의 건축요소 하나하나도 재미있다. 대문의 문짝은 이중이다. 앞면은 철판이고 뒷면에는 두꺼운 목판을 대어 만들었다. 대문 바로 위에는 화공에 대비해 방화수를 쏟아붓는 구멍이 따로 있다. 전면 외벽의 좌우 끝에는 대문을 공격하는 적들을 감시하고 반격할 수 있는 5m 정도 돌출된 각루가 있다. 이 각루 안에는 대포도 설치되어 있어 포루라고도 한다.

방은 모두 360여 개나 되는데 이것은 지씨 일족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일시에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장기간 고립되는 경우에 대비해 안정보 안에는 우물도 다섯 개나 된다.

그렇다고 안정보에 방어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처마, 문창, 양가梁架, 작체雀替, 창령窓欞, 두공斗拱 등은 목각이나 채화 등으로 되어 있어 당시의 민간 건축예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벽화는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등의 등장인물을 담고 있다.

안정보에서 재미있는 또 한 가지는 이렇게 큰 집에 거미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어느 집이든 구석마다 거미줄이 보이기 마련이고, 실제로 안정보 인근의 농가에는 예외 없이 거미가 살고 있는데 안정보에는 거미가 없는 것이다.

민간 속설로는 안정보를 신축할 때부터 걸려 있었던 두 폭의 그림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는 동자가 거미줄을 걷어내는 천주소취千蛛掃去라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만복초래萬蝠招來라고 하는데, 동자가 파초 잎사귀를 흔들어 박쥐를 부르는 그림이다. 거미줄을 걷어낼 뿐 아니라 거미의 천적인 박쥐까지 불렀으니 거미가 살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인근의 중학교 학생들이 교사의 지도를 받아 자료조사를 하고

1년에 걸쳐 관찰했다. 실제로 안정보 안에는 박쥐가 많이 살고 있어 거미가 살아남지 못했고, 1950년부터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등광이 없어 거미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안정보는 1899년 완공한 다음 지씨 부자와 그 후손들이 살았다. 그러나 1950년 신중국은 토지개혁을 하면서 안정보를 몰수해 행정관청의 창고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80년 향鄕정부가 안정보의 문물 가치를 인식하고 지씨 후손들에게 책임을 맡겨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현급, 성급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에는 국가관리로 지정되었다.

안정보를 두루 살피면서 필자의 시선을 끈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길게 여운을 남긴 것은 향신鄕紳이란 말이다. 이 말은 안정보 입구의 설명문에 나오는 말인데, 지씨 부자의 신분을 묘사한 것이다. 신紳은 관복에 걸친 허리띠란 뜻이고, 신사숙녀의 신과 같은 글자다. 특별한 관직을 언급하지 않고 향신이라 했으니 지씨 부자는 관직에 나갔어도 높지 않았고, 그저 재산이 좀 많았던 지방유지 정도였다.

이런 지씨 부자가 14년에 걸친 큰 공사 끝에 도적 떼가 쳐들어올 경우 마을 사람 전부를 피난시킬 수 있는 큰 집을 지은 것은 참으로 큰 덕이 아닐 수 없다. 고난이 닥치면 누군가는 한 끼 식사를 베풀고 누군가는 하룻밤 숙박을 돕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고난의 근본 원인을 고쳐 10년, 100년의 미래를 도모하게 된다. 어느 수준에서든 조금 덜 힘든 사람이 조금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재산을 기꺼이 베푸는 것은 인간사회가 발전해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겨우 향신이라는 칭호밖에 없었지만 그의 베풂은 동시대를 살던 이웃을 넘어 멋진 건축물을 통해 낯선 외국인에게까지 전해졌으니 결코 ‘향신의 덕’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