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5

한무제漢武帝

11. 순열(荀悅)의 ‘삼유설(三遊說)’은 학문과 절조를 갖춘 인사들을 장의(張儀)나 소진(蘇秦) 등과 같은 부류로 간주했다

공손홍이 곽해(郭解)를 처형해야 한다고 청하여 유협(遊俠)의 폐해가 천하에 만연하지 않게 되었으니 훌륭한 조치였구나! 유협이 흥성하면 위에서 백성을 지켜 기를 수 없고 유협이 그 일을 대신 맡게 된다. 진나라가 제후왕을 없애고 상업을 장려하자 백성들은 기댈 군주가 갑자기 없어졌고, 부유하면서 세력이 강한 이들이 일어나 유협을 초빙한 바람에 유협이 천하에 횡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과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심하면 세력과 목숨을 잃는 것도 빠를 수밖에 없으니, 공손홍이 없었더라도 그들이 어찌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순열(荀悅)은 ‘삼유설(三遊說)’을 제시하면서 학문과 절조를 갖춘 인사들을 장의(張儀)나 소진(蘇秦), 극신(劇辛), 곽해(郭解) 같은 부류와 똑같이 혹세무민하고 혼란을 조장하면서 신불해와 상앙의 자잘한 지혜를 익혀 한나라 말엽에 당고(黨錮)를 일으켜 현량한 인사들을 해치던 잘못된 습속을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조는 그것을 본받아 공융(孔融)을 죽이고 한나라 황실을 찬탈했고, 주온(朱溫)도 그것을 본받아 청렴하고 고상한 이들을 학살하고 당나라를 멸망시켰으며, 그 여파가 만연하여 소인배가 그것으로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혀 종묘사직에까지 재앙이 미치게 했다. 한탁주(韓侂冑)가 거짓 학문을 금지하고, 장거정(張居正)과 심일관(沈一貫)이 서원(書院)을 훼손한 것들도 모두 그 지류(支流)의 남은 맥을 계승하여 멋대로 자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곽해의 일족을 몰살하자 후세에 다시는 유협이 나타나지 않았다. 학문과 절조를 갖춘 인사들은 위에서 교화를 그르칠 때 군자가 나타나서 가르치니, 사람이 짐승과 같은 상태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이 덕분이다. 앞쪽의 재앙이 한창일 때 뒤쪽에서 일어난 재앙이 다시 왕성하다면, 하늘의 시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달렸으니 순열과 같은 소인배가 어찌 끝까지 가려 덮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유행(遊行)을 비웃으며 풍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12. 공손홍의 거짓은 베로 만든 이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급암은 공손홍이 베로 만든 이불을 덮은 것은 거짓이라고 비난했지만, 공손홍의 거짓이 어찌 거기에 있겠는가? 급암은 공손홍의 큰 거짓은 비판하지 않고 자잘한 것만 꼬집었으니, 너무 쪼잔했다. 급암은 남의 자잘한 잘못을 들추어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학술은 오로지 황로 사상에 치중해 있어서 먹는 것과 입는 것 모두 황로의 가르침을 따른 것을 최고로 여겼다. 그는 증삼(曾參)과 사추(史鰌)를 사람을 속박하는 형틀로 여기고, 명교(名敎)를 재갈과 고삐로 여기면서, 선행을 하더라도 명성을 날리려 하지 않고, 더없이 고상하고 결백함에도 모욕을 당한 듯이 여겼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요·순의 다스림을 본받으려 하는가?”

공손홍ㅇ은 삼공(三公)에 해당하는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후한 녹봉을 받았는데도 천으로 만든 이불을 썼다는 것은 거짓이다. 요·순은 천하를 지니고도 초가집에서 흙으로 계단을 만들어 살았는데, 급암은 당연히 그것을 거짓으로 여기면서 본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손홍은 제생(諸生)의 신분에서 가문을 일으켰는데 마흔이 되어서도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에 천으로 된 이불을 덮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런 것일 따름이지 그이 거짓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 급암은 황로 사상에 심취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서 명예를 멀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공손홍의 그런 모습을 보고 거짓이라고 여긴 것일 따름이다.

13. 회남왕 유안은 노자를 공부했기 때문에 자살했다

회남왕 유안의 저서 《회남자(淮南子)》 20편(篇)은 하늘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서술했으니 역시 박학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꾀한 것은 모두 어린아이의 계책에 지나지 않았으며, 친하게 지내던 이들도 유치하고 어리석은 형산왕(衡山王) 유사(劉賜)와 태자 유천(劉遷)밖에 없었다. 모반이 성공하지 못하고 군대마저 일으키지 못하게 되자 유안은 궁중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으니, 그 어리석음이 가소로울 뿐만 아니라 그 광망(狂妄)은 치료할 약조차 없었다.

성고(成皐)의 관문은 얼마나 막기 쉬우며 삼천(三川)의 험한 지형은 얼마나 차지하고 지내기 편한가? 하지만 자신은 위청(衛靑)을 상대로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자객을 보내 요행으로 성공하기를 바랐으니, 설령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들 위청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또 설령 자객이 위청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가 곽거병(霍去病)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공손홍이 비록 중요한 대신의 자리를 맡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찌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인가? 그는 가난하고 낮은 신분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삼공(三公) 자리에 올랐는데, 회남왕에게 무얼 바라고 감히 구족의 목숨을 걸고 명석하고 강력한 군주와 대장군의 칼날을 시험하려 했겠는가? 안으로 믿는 것은 그저 말만 교묘하게 둘러대고 실질은 없는 엄조(嚴助)뿐이고, 밖으로 의지하는 이들은 경박하고 무례한 좌오(左吳)와 조현(趙賢), 주교(朱驕)뿐이다. 우물쭈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오피(伍被)가 진즉 측근에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다. 유안의 어리석음이 이런 정도에 이르렀으니 당연히 주고후(朱高煦)와 주신호(朱宸濠)가 하찮게 여길 만했지만, 그는 문사(文詞) 덕분에 후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문사는 사람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안의 저작을 읽어 보면 본래 노자의 말에 바탕을 두고 변론하는 사인(士人)들이 유세할 때 하던 말을 뒤섞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술수를 내세워 음양의 운명을 통제하려 했으나 음양을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가 믿은 것은 술수였으니 자연의 차고 비는 변화[氣機]의 법칙을 엿볼 수 있었으며, 아울러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움직이고 멈추는 동정(動靜)의 위대한 법칙을 예측하고도 음양을 어찌하지 못했으니, 자신은 조물주의 능력을 엿보았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조물주의 창고에서 도둑질하여 천하에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풀 줄기[莛]로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같은 맹장을 때리고 나서 스스로 용맹하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도(道)’를 따르면 사람을 거짓되게 만들어 심지(心志)를 잃게 하고, 광망(狂妄)한 생각에 빠져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게 한다. 유안이 이런 학설을 공부했으니 자살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노자는 길흉과 생사를 벗어나도록 가르쳤으나 자신이 흉한 재앙과 같은 무리임을 알지 못했다. 유안의 저서를 읽을 때는 이 점을 귀감을 삼아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