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변천 5

5) 청 중엽 소설평점의 연속

청 중엽 이후, 소설평점은 여전히 발전의 추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미 전 시기의 생기발랄하과 광범위한 영향은 잃어갔다. 어떤 연구자는 심지어 소설평점이 진성탄 비 《수호전》에서 장주포 비 《금병매》로 넘어가는 반세기 동안 “이미 자신의 좋은 시절은 다 보내고, 후대의 평점파는 다소 폄하하는 의미를 띤 이름이 되어버렸다.” 소설평점의 역사적 지위로 말하자면, 이 설은 일리가 있지만,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청 중엽 이후의 소설평점은 여전히 소홀히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른바 청 중엽이란 청의 옹정(재위는 1723~1735년), 건륭(재위는 1736~1795년), 가경(재위는 1796~1820년) 삼대를 가리키며, 시간적으로는 약 백여 년이다. 청 중엽의 소설평점은 주로 건륭과 가경 시기에 집중되었다. 옹정 연간에는 《이각성세항언(二刻醒世恒言)》 등 소수의 작품만이 있을 뿐인데, 내용이 간략해 볼 만한 것이 없다. 건륭 이래로는 소설평점이 다시 흥성해서 각종 평본이 잇달아 나왔고, 수량도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들은 대체로 명저 소설의 평점 계열과 기타 소설의 평점 계열, 이렇게 양대 평점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명저 소설의 평점은 명말청초의 ‘사대기서’의 광범위한 평점을 거친 뒤, 이때에 이르면 새로운 자취가 나타나게 된다. 진성탄 비 《수호전》과 마오 씨 부자 비 《삼국연의》, 장주포 비 《금병매》는 이미 독자의 깊은 사랑을 받았기에 이 시기에는 이들 평본들만이 중복해서 간행되었다. ‘사대기서’ 가운데 《서유기》만이 평본이 분분하게 나와 새로운 《서유기》 평본이 여러 종 출현했는데, 장수선(張書紳)의 《신설서유기(新說西遊記)》(건륭 13년)와 차이위안팡(蔡元放)이 중정증평(重訂增評)한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건륭 15년), 우이쯔(悟一子) 천스빈(陳士斌)이 평점한 《서유진전(西遊眞銓)》(건륭 45년), 류이밍(劉一明)이 평점한 《서유원지(西遊原旨)》(가경 13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평본은 그 평점의 사고 방향이 기본적으로 《서유증도서》의 노선을 계승했기에, 《서유기》의 주지(主旨)를 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서유기》가 소설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예술적 가치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해 평점의 질이 다른 사람의 의도와 모두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진성탄이나 마오 씨 부자, 장주포 비본에 비견되는 평점의 정본은 아직 출현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새로 나온 중요한 소설은 《홍루몽》과 《요재지이》, 《유림외사》로, 중국 고대소설사에서 명저에 드는 거작들이다. 하지만 《홍루몽》은 건륭 57년에야 인쇄본이 출현했고, 현존하는 《요재지이》의 최초 간본은 건륭 31년의 칭커팅(靑柯亭) 각본이며, 《유림외사》의 경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최초 간본은 가경 8년의 워셴차오탕(臥閑草堂) 본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소설은 당시 사회에서 아직 광범위한 영향을 이끌어낼 수없었고, 이에 따라 평점 역시 상대적으로 적막했다. 건륭 시기에 나온 이 세 가지 명저 소설에 대한 평점은 《홍루몽》 초본에 대한 ‘즈옌자이 비평본’과 《요재지이》 칭커팅 본의 왕스전(王士禎) 평점뿐이며, 《유림외사》는 건륭 간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와본(臥本)’의 셴자이라오런(閑齋老人) <서>에는 “건륭 원년 춘 이월”이라 서(署)했으나 실제로 평점한 시간과 평점이 유포된 상황에 대해서는 이제껏 정론이 없는 상태다. 그러므로 상술한 세 가지 명저의 평점 가운데 왕스전 평 《요재지이》만이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뿐 ‘즈옌자이 비평본’은 《홍루몽》 초본이 상대적으로 널리 유포되지 않았기에, 독자들의 광범위한 주의를 끌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이 시기에는 기타 소설의 평본 계열이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계열의 작품 가운데 특히 차이위안팡(蔡元放)이 평점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와 둥멍펀(董孟汾)이 평점한 《설월매(雪月梅)》, 수이뤄싼런(水箬散人)이 평열(評閱)한 《주춘원소사(駐春園小史)》, 쉬바오산(許寶善)이 두강(杜綱)의 소설 《오목성심편(娛目醒心編)》과 《북사연의(北史演義)》, 《남사연의(南史演義)》에 평점한 것 등이 가장 뛰어났다. 만약 명저 소설의 평점이 문인들의 사상과 의취(意趣)를 표현하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계열의 소설평점은 문인적인 성격의 기초 위에 소설평점의 상업적인 전파성과의 결합을 더욱 강조했다.

가경 시기의 소설평점은 《유림외사》 와평 본이 발군이라 할 만한데, 이것은 이후 《유림외사》 평점 가운데 유일한 조본(祖本)이다. 《유림외사》의 유전사(流傳史)에서 와평은 이미 소설 텍스트와 거의 한 몸이 되었는데, 특히 와평이 《유림외사》의 사상과 주지(主旨)를 분석하고, 풍자적인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인물 형상을 감상한 것은 후대의 평점자와 독자들에 대해서 광범위하면서도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별도로 허칭촨(何晴川)이 평점한 《백규지(白圭志)》와 쑤쉬안(素軒)이 평점한 《합금회문전(合錦回文傳)》 등은 통속소설의 예술적 특성을 자못 많이 드러내 보여주어, 비교적 높은 이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 중엽의 소설평점을 종으로 개괄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곧 소설평점이 명말청초의 번성기를 지난 뒤 이 시기에는 평본이 번다하긴 했지만, 전대 사람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고, 그들과 비견되는 평점가와 평점 저작들은 왕왕 전대 사람들의 성과를 계승하는 기초 위에 국부적으로 이어가는 모습을 드러냈고, 소설평점의 모방 흔적 역시 날로 분명해졌다. 즈옌자이(脂硯齋)와 셴자이라오런(閑齋老人), 차이위안팡(蔡元放) 등은 이 시기 소설평점의 발군이지만, 영향력은 이미 진성탄 등과 비교하기 어려웠다.

6)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의 증강

청 중엽 소설평점의 중요한 특색은 평점의 함의에 있어 문인의 취향이 끊임없이 제고되고 심지어 부분적으로 발전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소설평점이 지속되었던 중요한 현상이자, 소설평점이 쇠미해지는 중요한 징표로 볼 수 있다.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이 증강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발전의 과정을 거쳤다. 곧 리줘우(李卓吾)가 《수호전》을 평점하는 가운데 기울였던 광기와 오만(狂傲), 그리고 현실에 대한 정감이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의 단서를 열었다. 이러한 전통은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 《수호전》 평점에서 계승되는 한편. 상업적인 독서 지도(導讀) 작용과 서로 결합해 소설평점의 기본적인 골격을 확립했다. 이러한 골격은 진성탄 비 《수호전》과 마오 씨 부자 《삼국연의》, 장주포 비 《금병매》를 거치면서 강화, 고정되고 정점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고대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생명력이 풍부했던 계승 관계이자 소설평점이 광범위하게 유전되고, 문인과 보통의 독자들 모두에게 사랑 받았던 중요한 원인이었다. 진성탄과 마오 씨 부자, 장주포의 성공은 후대의 소설평점에 대해 심원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문인들의 마음 속에 소설평점의 중요한 지위를 확립했다. 이에 강희 이후의 소설평점 가운데 몇몇 문인 평점가들은 소설평점 가운데 문인들의 의취(意趣)를 표현하는 전통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오히려 소설평점이 고유하게 갖고 있던 상업적인 독서 지도(導讀) 작용을 점차 포기했는데, 이것은 소설평점의 생명과 혈맥을 아주 크게 단절시켰다. 이에 소설평점은 이런 문인적인 성격의 편면성이 제고되는 가운데 점차 쇠미해졌다.

청 중엽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이 증강된 것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소설평점이 평점가와 소설가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이다. 이른테면, ‘즈옌자이 비평본’ 《홍루몽》은 개체의 자각성을 띠고 있는 문학 비평이다. 이러한 비평은 평점가와 작자 사이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기초 위에 성립하는데, 이에 “차오쉐친과 즈옌자이는 하나다(一芹一脂)”라는 문학사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요재지이》의 왕스전(王士禎) 평점 역시 독특한 인연을 갖고 있는데, “선생은 정력을 다하여 이 책을 이루어내자마자 처음으로 위양(왕스전을 가리킴)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위양이 백냥 천냥으로 그 원고를 사고자 했으나 선생은 절대 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을 가하여 돌려주었다(先生畢殫精力, 始成是書, 初就正于漁洋, 漁洋欲以百千市其稿. 先生堅不與, 因加評隲而還之.)”[<《요재지이》예언(《聊齋志異》例言), 칭커팅(靑柯亭) 각본] 이 설의 진위를 가리기는 힘들지만, 왕스전이 《요재지이》를 평점했다는 것은 오히려 사실이다. 이렇게 소설의 고본(藁本)을 평하고 바로잡는 것은 소설평점을 일종의 개인적인 성격을 띤 행위로 만들어버렸다. 고대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평점가와 작가 사이의 관계는 혹은 평점가가 자신의 정감과 심미 의취로 작자와 작품을 선택해 이로부터 주체적인 평가와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혹은 상업적인 지렛대의 제약 하에 근본적으로 작가의 존재를 무시하고 순전히 소설이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것을 고취하는 데 그 의의를 두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청 중엽 이래의 소설평점이 이러한 기초 위에 만들어낸 새로운 틀거리는 의심할 바 없이 소설평점이 문인의 자각성과 사적인 성격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표지이다.

다른 하나는 평점가가 일 개인의 열독을 통해 순전히 주관적으로 소설의 의리를 천명한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예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왕단이(汪憺漪), 황저우싱(黃周星)이 평점한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에서 보이며, 장수선(張書紳)의 《신설서유기(新說西遊記)》와 천스빈(陳士斌)의 《서유진전(西遊眞銓)》 중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장수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어, 독자들은 막연하게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비록 몇 명의 비평가가 있었으나, 혹은 선(禪)을 말한 것이라 하고, 혹은 도를 말한 것이라 하며, 또 금단(金丹)과 연금술이라 여기는 이도 있을 정도로 대부분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였으나, 결국 《서유기》의 올바른 뜻은 아니었다. 옛사람의 수많은 절묘한 문장과 무한하게 많은 절묘한 뜻은 모두 근거가 있는 학문이니 황당하고 무익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은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此書由來已久, 讀者茫然不知其旨, 雖有數家批評, 或以爲講禪, 或以爲談道, 更有以爲金丹采煉, 多捕風捉影, 究非《西游》之正旨. 將古人如許之妙文, 無邊之妙旨, 有根有據之學, 更目爲荒唐無益之談, 良可嘆也.)” [<《신설서유기》자서(《新說西遊記》自序)>, 건륭 14년 유치탕(有其堂) 간본]

이에 그들은 작품의 주지(主旨)와 의취(意趣)를 밝혀냄으로써 그 미망을 깨고자 했다. 장수선은 《서유기》를 일언이폐지하면, “단지 사람들에게 성심(誠心)을 가르치는 것을 학문으로 삼았을 뿐이므로, 물러나 후회할 필요가 없다(只是敎人誠心爲學, 不要退悔)”고 하였다.[<《서유기》총론(《西遊記》總論)>, 위와 같은 책] 그리고 천스빈(陳士斌)이 비주(批注)한 《서유기》는 이 책이 “삼교를 일가처럼 다룬 이론이고 본성과 운명을 모두 수련하는 도(三敎一家之理, 性命雙修之道)”라 여겼다.[류이밍(劉一明), <《서유기원지》서(《西遊原旨)》序)>] 여러 설이 분분하고 각자가 한 가지 말을 고집하여, 작품의 실제 함의로부터 가면 갈수록 멀어졌으니, 거의 평점을 그들의 재학을 빛나게 하고 학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아버렸다.

청 중엽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이 증강한 것을 정면에서 보자면 문인이 소설을 중시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것은 소설 발전사에서 중시할 만한 현상이다. 아울러 이러한 현상이 출현하게 된 까닭은 한편으로는 명말청초 이래 소설평점의 문인화 전통과 관련이 있는 동시에, 이것은 또한 청 중엽 소설 창작의 전체적인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 고대 통속소설은 그 자체의 발전 과정 속에서 민간으로부터 문인화로 발전해간 역사 궤적을 거쳤는데, 이러한 발전 과정은 매우 완만했다. 원말명초 《수호전》과 《삼국연의》의 출현은 고대 통속소설이 송원 화본의 기초 위에서 최초로 문인화로 나아간 것인데, 이것은 후대 소설의 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명 가정 이후 《삼국연의》와 《금병매》가 나타난 것은 통속소설 문인화의 상대적인 성숙을 나타내준다. 명말청초에 이르면 한편으로는 문인적인 색채가 자못 풍부한 인정소설이 점차 중요한 지위를 점하여 통속소설의 창작이 ‘세대 누적형’에서 점차 ‘개인 독창형’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동시에 소설평점가 역시 통속소설에 대해 전체적인 수정과 정리를 가했는데, 특히 명대 ‘사대기서’의 평점은 통속소설의 발전에 성공적인 예술적 범례를 제공했다. 그러므로 통속소설의 문인화는 명말청초에 다시 한번 큰 걸음을 내디뎠고, 이것은 청 중엽 찾아온 문인소설의 창작 붐에 견실한 기초를 놓았다. 청 중엽 소설의 문인적인 성격의 정도는 공전절후의 것으로 문인이 독창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은 이미 크게 주도적인 지위를 점했다. 특히 《홍루몽》과 《유림외사》는 중국 고대소설사에서 가장 문인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의 걸작이다. 청 중엽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은 바로 이러한 창작 배경에 의탁한 것이고, 동시에 그 자신의 관념과 이론 비평을 이렇듯 전면적으로 소설 문인화의 과정 속에 융합시켰다.

그러나 청 중엽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이 소설평점 발전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더욱 강렬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청 중엽 소설평점이 갖고 있는 문인적인 성격이 편면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부분적으로 소설평점이 이미 형성해 놓은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향도성(向導性)이 서로 결합한 비평 전통을 단절시켰다. 소설평점은 그 본원으로 말하자면, 그 활발한 생명력은 그것만의 독특한 민간적인 성격과 통속성에 바탕한 것으로 문인적인 성격이 제고된 것은 단지 소설평점의 전체적인 품위를 높이는 중요한 수단일 뿐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것이 소설평점에 가져다 준 것은 단지 생명의 고갈뿐이며, 이로 인해 소설평점은 점차 쇠퇴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펑전롼(馮鎭鸞)은 가경 연간에 왕스전이 평한 《요재지이》가 “경사 잡가체(經史雜家體)의 부족함”과 “문장 소설체”로 《요재지이》를 비점했다고 지적했다. 그가 제창한 것은 바로 평점이 소설 자체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 중엽의 《서유기》 평점은 비록 평본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왔지만, 끝내 진성탄 비 《수호전》 등과 같은 평점 정본은 출현하지도 않았고, 이런 문제를 설명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