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10 푸젠성 객가 토루

푸젠성 객가 토루 – 전란을 피해 숨어든 유민들의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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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통주택 가운데 사각형 또는 원형(아래쪽 사진)으로 3∼4층 높이의 단단한 흙벽을 두르고 있는 커다란 집에 수십 가구에서 100여 가구가 함께 사는 신비한 주택을 TV나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푸젠성, 광둥성 등지의 객가인客家人들이 사는 토루다. 3∼4층 높이의 흙벽을 지칭해 토루土樓라고 한다.

토루는 외벽이 두텁고 대문이 튼튼해서 대문만 닫아걸면 성채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데다 객가인이라는 독특한 뉘앙스까지 얹히면서 신비로운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이번에는 객가 토루로 들어가 그 속에 쌓여 있는 중국 역사의 한 흐름을 차근차근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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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객가는 어느 민족에 속하는 어떤 사람들일까. 객가인들은 왜 스스로를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고 불렀을까. 객가인들은 유목민과 같은 이동민족이 아닌데 왜 그렇게 멀리멀리 이민에 이민을 거듭했을까.

중국 대륙에서는 대규모 유민流民이 다섯 차례 발생했다. 전부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이었다. 1차는 한나라가 멸망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였고, 2차는 당나라가 기울면서 안사의 난, 황소의 난에 이어진 오대십국의 혼란기였다. 3차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차례로 남하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4차는 명말 혼란기, 5차는 청말 태평천국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시기다.

유민은 하나의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는 극도의 혼란기에 발생한다. 새 왕조가 대륙을 장악하면 전란이 잦아들고, 정치를 개혁하고 경제는 생산력을 회복하여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안정기를 넘기게 되면서 지배계층은 해이해지고 부패에 빠져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 심각한 자연재해나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외적 요소가 보태지면 권력층은 사분오열하고, 사선에 내몰린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총체적인 혼란은 엄청난 인명 손실을 수반하게 되고, 최후의 승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비로소 진정되는 게 하나의 순환이다.

이런 혼란기에 백성들은 극심한 전란을 피해 농토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힘겹게 피난했으니 이들이 객가인의 선조다. 고향과 농토를 버리고 남천을 감행한 이들은 창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갔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주한 곳이 장시성, 푸젠성, 광둥성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객가의 땅이다.

객가인들은 중원의 한족汉族이었다. 그래서 한족의 객가 민계民系라고 구분한다. 한족은 중국 전체 인구의 91.5%나 차지하는 탓에 여덟 또는 열여섯 개 민계로 세분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객가인 것이다. 인구로는 약 7000만 명이다. 흥미롭게도 중화문화권의 지도자 쑨원, 싱가포르의 리광야오李光耀 전 수상, 타이완의 리덩후이 전 총통, 중국의 덩샤오핑 모두가 객가인이다.

객가인들은 생존과 생산, 이주와 전쟁 모두 혈족이 단결하여 헤쳐왔기 때문에 대가족 또는 군사문화적 요소가 강했다. 물론 객가인들이 연고도 없는 산지로 들어가 농토를 개간하고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현지인에게는 침략이었고, 느닷없이 굴러 들어온 재앙이었다.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이어졌고,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도적 떼가 되어 기습과 약탈로 연명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살림집, 한 마을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사는 집이 바로 토루다. 토루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는 대가족 집체주택이다. 이주와 정착 모두 대가족이 힘을 합쳐야 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다.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고 당장 필요한 것보다 큰 집을 짓기도 했다. 일례로 청조 초기 열 명의 가족이 방 64칸짜리 4층 토루를 지었는데, 훗날 200여 명이 살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여러 가족이 공사비를 염출하여 지은 또 다른 토루는 4층으로 방이 288칸이나 되었고, 최대 900여 명이 같이 살기도 했다.

방들이 표준화·통일화된 것도 집체성의 한 단면이다. 한 칸의 1층에서 4층까지를 한 가구가 사용한다. 1층은 주방, 2층은 식량 창고, 3층은 침실, 4층은 침실 겸 창고다. 가운데 큰 마당에는 조당祖堂을 지어 조상을 모시는데, 소농경제 사회의 종법제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가가호호의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은 독립적이다.

두 번째 특징은 방어성이다. 도적 떼도 적지 않았고 야생동물 역시 일상생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내부로는 개방되어 있지만, 외벽은 벽체가 단단한 데다 창문도 적어 상당히 폐쇄적인 구조다. 외벽은 땅을 파고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거푸집을 세워 점성이 있는 홍토, 석회, 자갈을 섞어 넣은 다음 나무절구로 다져서 쌓아 올린다. 중요한 부위에는 찹쌀밥이나 흑설탕을 추가하여 점성을 더 높인다. 이렇게 쌓으면 망치로 못을 박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해진다. 더구나 하단 폭이 150cm 정도로 상당히 두껍다.

제일 꼭대기 층에는 토루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복도를 만들고 복도 곳곳에 작은 창이나 구멍(아래 좌측 사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외부의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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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은 적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별도의 방어 기능을 보강했다. 집은 크지만 대문은 하나다. 10∼20cm 두께의 튼튼한 목판으로 문짝을 만들고, 문짝 바깥 면은 철판을 입히기도 한다. 화공에 대비해 대문 위쪽에 방화수 시설까지 한 것도 있다. 문짝 안쪽에는 굵은 빗장을 가로지른 다음, 튼튼한 통나무 두 개를 문짝에 직각으로 받칠 수 있게 했다. 대문의 외벽 상단에는 밖으로 돌출된 상자 비슷한 것(위 우측 사진)을 만들기도 했다. 대문을 공격하는 적들에게 총을 쏘기 위한 것이다.

마당에는 식수용 우물이 필수적이다. 장기간 봉쇄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상이한 문화적 요소들이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토루의 살림집들은 벽체 안쪽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외벽 사이에 보를 놓은 목가구 구조다. 목가구 구조는 현지의 간란식干欗式 조각루弔脚樓와 유사하다. 방이 표준화된 것은 군영건축軍營建築 요소이고, 조당은 유교적 종법제도의 요소이며, 목가구는 현지 건축의 요소다. 토루는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자연스레 결합된 것이다.

토루는 처음에는 정방형이 많았고 훗날 사회가 안정화하면서 개방성이 강조된 장방형으로, 나중에는 건축기술이 발전하면서 원형 토루로 변해갔다.

원형 토루는 지진에 강한 구조였고, 건축공간을 최대로 확보한다는 면에서도 유리했다.

각각의 토루를 한꺼번에 돌아보자면, 푸젠성 장저우시漳州市 난징현南靖县 수양진书洋镇 스차오촌石桥村을 찾아볼 만하다. 장저우시는 푸젠성 남부 해안가의 도시로 우리가 잘 아는 샤먼厦门에서 서쪽 40km 정도 거리이고, 난징현은 토루가 많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방형 토루는 처음 입주할 때에는 연배가 높은 가족이 정당의 방을 배정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연배의 높고 낮음이 뒤섞이기 때문에 사합원에서와 같이 위치에 따른 서열 관념은 별로 없다. 19∼20세기에 들어서는 소농경제 시대의 종법제도가 느슨해지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경제관계가 더 중요해진 탓도 있다. 이 때문에 방을 매매하는 일이 생겼고, 어느 집은 두세 칸을 합쳐서 사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족이 늘었으나 방이 부족하면 4층 창고를 침실로 변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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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은 한 칸 또는 두 칸을 차지한다. 평상시에는 거주자들이 편하게 모여 앉는 곳(위 좌측 사진)으로, 지역사회나 관청의 공지사항은 물론 각종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교환되는 중요한 길목이다.

토루가 포화상태가 되면 토루 앞에 전원前院을 짓기도 한다. 2층짜리를 짓는데 1층은 공용공간으로 소나 돼지를 키우거나 작업공간을 설치하고, 2층은 칸을 분리하여 가구별로 나눠 사용하기도 한다.

마을이 안정되고 인구가 늘어가면서 방형 토루보다 좀 더 개방적인 장방형 토루(아래 좌측 사진, 위 우측 사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로 계곡의 물을 따라 길게 지은 탓에 산기슭 쪽 외벽은 방어를 위해 높이 세웠다. 계곡 쪽 담장은 아이들이 밖을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낮추거나 벽체를 투창透窓 형식으로 만들어 외부 전망을 개선했다. 이런 장방형 토루는 밖에서 볼 때에도 훨씬 개방적인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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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담장을 낮게 지었던 평온한 시기는 또 다른 격변을 맞아 더욱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원형 토루로 바뀌었다.

스차오촌의 경우 한동안 전란을 비켜가면서 계곡에 여러 채의 장방형 토루가 신축되었다. 그러나 1850년대 태평천국의 난이 터지면서 평온한 시기는 끝났다.

광둥성 출신의 객가인이었던 홍수전洪秀全이 광둥성 지역에서 농민전쟁을 일으키면서 남방 지역 대부분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렸다. 농민군은 푸젠성 지역에서 위세를 떨쳤고 곳곳에서 무서운 살육전이 벌어졌다. 태평천국 농민군이 수차례 이 지역을 통과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산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몇 채의 토루는 크게 파손되었고 경제사정도 피폐해졌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이후 20세기 초반까지도 경제사정은 회복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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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차오촌에서는 태평천국의 난 이후 60여 년이 지난 1927년에야 토루가 새로 지어졌는데, 전란의 혹독한 경험으로 방어성이 더욱 강조된 원형 토루가 지어졌다.

원형 토루는 방형 토루보다 건축기술로도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토루를 원형으로 지으면 방형의 네 귀퉁이에 생기는 사각死角도 없어지고 방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어 여러 가족이 돈을 모아 공동으로 건축하기에 좋았다. 방어력도 방형보다 훨씬 높아졌다.

스차오촌에서 60년 만에 지어진 원형 토루는 순유루順裕樓인데 스차오촌 뿐 아니라 난징현 지역에서도 가장 큰 원형 토루다. 순유루가 지어진 스토리도 꽤 흥미롭다.

장치건張啓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와 인근 지역을 다녀오는 길에 커다란 원형 토루를 보고는 자신도 훗날 원형 토루를 짓겠다고 맹세했다. 어린아이의 기특한 포부를 듣고 있던 옆 마을의 한 노인이 “네가 돈을 벌어 집을 지으면 너희 마을에 있는 내 밭을 택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말하는 사람은 덕담이었으나 어린 아이에게는 꿈이 되었다.

아이는 10대에 외지로 나갔고, 1926년 21세의 나이에 어느 정도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왔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마을이 망가진 이후 주택 부족이 심각했던 터라 이 젊은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원형 토루를 짓자고 의견을 냈다. 그러나 돈도 많이 드는 데다 옆 마을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밭 때문에 새로 짓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이때 장치건이 옆 마을의 촌장을 찾아가 어렸을 때했던 덕담대로 땅을 교환해 왔다.

땅을 확보한 장치건은 마을 사람들과 합심하여 1927년 지름 74m의 원형 토루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축비가 모자라 바깥 토루만 2층으로 짓고는 공사가 중단되었다. 장치건은 다시 남양으로 돈을 벌러 나갔는데, 3∼4년 후에 마을의 다른 장씨가 공사를 계속하여 1946년 현재의 4층 원형 토루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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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토루가 완성되고 사람들이 입주해서 살고 있는 동안 외지로 돈을 벌러 나갔던 장치건은 1949년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돈을 벌어 돌아왔지만 토루는 이미 완공되었던 터라 마을의 다른 토지를 사들였다. 그러나 그해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국민당에 승리하여 신중국을 선포했고, 1950년 전국에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고향에 돌아와 땅을 사들였던 장치건은 ‘화교 지주’로 지목되어 토지를 박탈당했고, 노동개조라는 이름으로 쑤저우의 어느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몇 년 후에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지금 난징 지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원형 토루는 한 어린아이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젊음과 패기로 기초를 닦았고,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그러나 원형 토루의 꿈을 좇아 외지를 떠돌다가 꿈을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온 그는 반동지주로 몰려 다시 객지로 쫓겨나 병사했다. 때를 잘못 만난 꿈이 불행으로 이어져 객사하고 만 것이다.

스차오촌의 경우 원형 토루는 1960년대까지도 신축되었다. 1949년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했다가 1958년에는 마오쩌둥의 급진좌파 정책으로 모든 토지는 농민공사가 소유하는 집체성 소유제도로 전환되었다. 그동안 인구는 계속 증가했고, 개별적인 주택 신축이 중단되면서 주택이 더욱 부족해졌다.

순유루의 경우 288칸의 방이 있었는데 가장 많을 때에는 900여 명이 살기도 했으니 집체주택이 아니라 집단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농민공사가 땅을 대고 입주할 사람들이 추렴하여 건축비를 충당해 토루를 신축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자본주의의 꼬리를 자르고’ 공산주의의 집체성을 강요하던 시기니 집체성의 표본인 토루를 짓기로 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1965∼66년에 세 채의 원형 토루를 완공하고는 추첨으로 방을 배정해서 입주했다. 신축 토루는 순유루보다는 작았지만 기본 구조는 동일했고, 마당 가운데는 순유루와 마찬가지로 묘당을 지었다. 치안 문제가 없어진 탓에 1∼2층에 창문을 설치한 것도 달라진 점이다.

새로 지은 원형 토루를 보면 사회주의 인민공사가 소농경제 시대의 봉건주의 건축을 했다는 것도 재미있고, 자본주의의 꼬리는 잘랐다지만 묘당이라는 봉건주의의 꼬리를 여전히 붙이고 있었다는 것도 꽤 흥미롭다.

살림집의 구조를 보면 우리나라가 자연에 어울리는 평화의 구조였던 반면, 토루는 토비土匪에 맞서는 전투적 구조다. 그 토비의 한 갈래가 왜구다. 왜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에서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런데 왜구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최단 직선거리로도 1200km나 되는 푸젠성까지 힘들게 오갈 수밖에 없는 절실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람과 물자가 유통되어야만 한다. 경제적 유통을 강제로 막거나 유통의 불균형이 심해지면 물자가 부족한 측에서 강제적 유통을 도발하게 되는데, 전쟁과 약탈이 바로 그것이다. 왜구도 그런 맥락에 있었다. 원나라와 고려의 두 차례 일본 정벌이 실패한 다음에 해상교역이 막혔을 때 왜구의 약탈이 심해졌고, 명나라 영락제가 해금정책을 시행하자 다시 해적 떼가 증가했다.

이것을 각각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라고 한다. 전기 왜구는 실제 일본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진왜眞倭라 하고, 후기 왜구는 영락제에 저항하는 다수의 중국 남방인과 소수의 왜인 해적들이 결합한 무장집단이라 가왜假倭라고 한다.

푸젠성은 송원대에 이미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한 무대였다. 영락제가 해상교역을 봉쇄하자 푸젠의 많은 수공업자, 조선업자, 상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왜인 해적집단과 연계하여 반란과 약탈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그리하여 후기 왜구는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았고, 그 발생 원인도 중국에 있는 것이니 왜구라는 말이 적확하지는 않다. 중국의 정책 실패로 인한 반란과 약탈을 바깥으로 떠넘긴 기만적 용어가 된 셈이다.

이제 토루에서 빠져나와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객가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객가인들은 스스로를 객가라고 불렀을까? 자기 자신을 손님이라 불렀을까? 아닌 것 같다. 청조 초기에 이 지역에서 토착민과 객가인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을 때 토적土籍과 객적客籍으로 구분하는 말이 있었으니 객이란 말이 사용되기는 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칭하는 말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민족분류 또는 객가문화 연구가 시작되면서 뤄샹린罗香林(1906∼1978)이란 학자가 객가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객가인들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일반화되었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객가라는 말을 거부하고 애인涯人이라고 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해석으로 객가인들이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면서 손님이 머물 수 있는 집이라고 표현한 말이라고도 한다.

객가인들이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고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살던 곳을 떠나 스스로 객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 같다. 외지에 나가 새로운 삶을 펼치는 것이 몸에 배었는지 타이완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로, 또다시 미주와 유럽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태양이 있는 어디에나 객가인이 있고, 땅 한 쪽만 있으면 어디나 객가인 마을이 있다고 한다. 바로 화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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